어찌어찌 흑마법사들을 때려잡은 이후. 필립은 챙겨온 비상 물품들로 부대원을 치료하고, 힐다와 칼튼은 연구실을 뒤적이는 사이. 나는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두고 있자니, 카렌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한 명쯤은 살려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도련……가주님?” “카렌카렌아. 그냥 편하게 불러. 나는 도련님 소리도 듣기 좋더라.” “안 됩니다. 이미 가주님께서는 자하브 가문의 주인이시고, 제국에 셋 뿐인 대공이시잖아요. 호칭은 똑바로 해야 해요.” “쓰읍. 난 좀 서먹해진 것 같아서 아쉽단 말이지.” “……명령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아니, 이런 걸로 명령할 것까지야. 카렌 네 말이 맞겠지. 난 이런 쪽은 아무래도 잘 모르니 말이야.” 정식으로 계승식을 마치고 가주가 되었기 때문일까. 묘하게 고분고분하단 말이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대충 뭉쳐놓은 흑마법사 시체를 발끝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조금 아쉽네요. 만약 한 놈 정도 살려두셨다면 뭐라도 정보를 캐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세상에. 카렌아. 그런 말랑한 얼굴로 고문 같은 것도 할 줄 아니?” 카렌의 볼따구를 양옆으로 주욱 잡아 늘리자, 얌전히 내게 불을 내어준 카렌이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하는 게 아니라 할아버님이 하는 거예요.” “아하. 뭐어, 너무 아까워하지 마. 설령 세 놈 모두를 살려서 심문한다 해도 제대로 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가요? 할아버님의 실력은 꽤 대단하십니다만…….”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론이 누구 하나 고문하는 일은 잘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 “가주님의 명으로 인한 것이라면 케세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 될 거예요.” “어……그건 그것대로 재밌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애초에 흑마법사 상대로는 애초부터 전제가 잘못됐어.” “예? 그게 무슨…….” “잘 모르는 거 보니, 카렌 너는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보네.”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나마 머리가 멀쩡한 대장격 흑마법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너도 마지막에 봤지? 갑자기 말투가 연극체로 변한 거. 이게 보통 대장격 흑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투가 오락가락하더라고.” “맞습니다. 비극의 신의 신력을 받아들인 부작용이라고 들었습니다.” “응? 그게 그런 이유였어……?” 지금껏 흑마법사는 여럿 잡았지만, 왜 그런지는 별로 궁금해한 적 없었기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일단 머릿속에 넣어둔 뒤. 하던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게 비극의 신 때문인지 그냥 미친놈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확실한 건 말투와 함께 머리도 오락가락한다는 거거든.” “그럼…….” “어. 정보를 빼내려 해도 헛소리만 하거나, 어찌어찌 정보를 알아내도 거짓이거나 함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를 실토하는 척 이쪽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던 놈도 있었고.” 그러니 흑마법사와는 말을 섞을 이유가 없다. 말을 섞더라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일단 죽이고, 시체나 연구실 같은 곳에서 정보를 알아내는 게 훨씬 나아. 그래서 이렇게 바로 빠져나가는 대신 여기저기 뒤져보는 거잖아.”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겁니다만.” “응?” 한데 모은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뒤적이며 대충 답해주던 도중. 카렌이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흑마법사를 상대해 보신적인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요. 너무 능숙하기도 하시고, 어쩐지 놈들이 가주님을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해서 말입니다.” “아……말 안 했었나.”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것도 없는 시체 하나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사실 칼립소에도 흑마법사 지부가 하나 있었거든.” “예, 뭐. 칼립소라면 하나 있을 법도 하죠.” “근데 좀 뭐랄까. 거슬려서? 자꾸 충돌해서? 응. 아무튼 그래서 쳐부쉈어.” “???”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하기야. 내가 좀 헷갈리게 말하긴 했지.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결국 내가 어린 시절에 흑마법사 조직에 실험체로 팔려나갔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하지 않는가. 내가 사실 자하브의 사생아가 아닌 짭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고……그게 아니더라도 당시의 기억은 내 가장 깊은 상처다. 지금도 흑마법사만 보면 발작을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어린 시절의 일을 말하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단 말이지. 스스로 약점을 밝히는 건 칼립소에서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니까. 내가 다른 흑마법사의 시체 하나를 더 수색하는 내내 눈만 깜빡이던 카렌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으……그러고 보니 가주님께서는 칼립소에서도 자신만의 조직을 꾸리셨었죠. 가장 낮은 곳의 주인이라는 게 설마…….” “응? 조직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지만, 같이 사는 친구들이 좀 있긴 했지.” 일종의 고아팸이라고 해야 하려나. 쉴 새 없이 대륙의 거물급 범죄자가 유입되고,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칼립소에서 고아는 취약계층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이들. 그렇기에 생존을 위해 자기들끼리 뭉치는 경우가 많았고, 막 흑마법사 조직에서 빠져나온 시기의 나 또한 자연스레 고아팸에 합류한 것이다. 고아팸의 가입 조건은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을 것이니까. 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다들 머리가 굵어지며 아이라 부르기 힘들어졌을 무렵. 누군가는 범죄 조직에 들어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용병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누군가는 마음이 맞는 몇몇과 함께 새로운 모임을 만드니. 내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같이 영차영차 힘내며 집도 사고 그랬는데……. 정작 집이 생기고 나자, 어렸을 때부터 사이좋았던 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더라. 어떻게든 중재시키려 해도 내가 얼굴을 비추는 순간 입을 싹 다물어 버리니 중재도 힘들었고. 나 혼자 남자라 내게는 말 못 할 갈등이 있겠거니 넘어갔지만……. 그러다 너무 크게 다투는 바람에 다 같이 살던 집이 박살 난 이후.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어째서 여초 직장에 남자 혼자 다니는 게 헬이라는 건지! 누나들 사이에서 자란 막내아들이 여자만 보면 진저리를 치는지……! 결국 각자 따로 살기로 하고, 마침 찾아온 아론과 카렌을 따라 칼립소로 오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적당히 생략할 건 생략하고, 숨길 건 숨기며 말한 내 이야기를 들은 카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런 걸 조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적어도 다른 흑마법사들은 그렇게 여겼겠죠. 과연. 이해됐습니다. 새로 생긴 조직을 견제하려다가 가주님께 역으로 당한 거군요.” “아니? 그냥 방해라서 내 쪽에서 보이는 족족 죽인 건데?” “…….” 입을 꾸욱 다문 카렌. 사실이기도 하지만……솔직히 말하자면 포악한 전투광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있었다.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카렌. 무표정은 여전하지만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속으로 자축하는 사이. 간신히 진정한 카렌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럼……소리 없는 자들의 종말이라는 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도 별거 아냐. 흑마법사 놈들이 쫄리니까 암살자 길드를 동원해서 날 죽이려고 하더라고.” “설마……?” “응. 그래서 암살자 길드도 같이 쳐부쉈어.” “…….” “아잇. 여기도 아무것도 없네.” 괜히 투덜대며 마지막 시체를 내던졌다. 이쪽은 허탕인가. 어째서인지 카렌이 멍하니 굳어있길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흠. 기회인가. 볼따구는 이미 많이 만져봤으니 패스한다. 그 대신 카렌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번쩍 들어 올리며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높다 높아~” “…….” 아무리 그래도 이건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무감각한 카렌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가주님. 내려주세요. 제 키가 작을지언정 나이는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싫은데?” “이익……!” 마구 발버둥 치는 카렌. 하지만 이미 완전히 몸이 들어 올려진 상태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한참을 저항하다가 결국 축 늘어지는 카렌.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표정. 하지만 묘하게 원망이 서린 눈빛에 낄낄 웃던 도중이었다. 연구실을 뒤져보다 무언가 발견한 걸까. 뒤에서 힐다가 살짝 신난 어조로 외쳤다. “여기 보세요 가주님! 해석이 필요할 것 같지만 뭔가 중요해 보이는 서류를 발견……가주님? 그리고 카렌 양?” 도중부터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는 힐다.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비비적거리길래 그제야 카렌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발이 땅에 닿았음에도 가만히 멈춰선 채……아니, 정확히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카렌. 수치스러움에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지나쳐 어벙하게 입술만 뻐끔대는 힐다가 쥐고 있는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아무래도 칼립소가 아니라 다른 지역이라 그런지 내가 모르는 암호체계를 사용하고 있었었다. 달리 말하면 암호화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라는 소리. “잘했어 힐다. 챙길 것도 챙겼고, 구할 사람도 구했으니 이제 돌아가자고.” “네? 아, 네. 그으……카렌 양은…….” “금방 회복하겠지 뭐.” 어깨를 으쓱이고는 왔던 길을 역으로 거슬러 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눈치를 보면서 카렌을 피해 따라서 움직이던 도중. 뒤에서 카렌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계승식 준비로 쌓여있는 업무가 많았었죠.” “뭣. 아니, 그런 건 제벨라 누님이 대신 하기로 했잖아!” “흥! 저는 원칙대로 일할 뿐입니다.” 카렌이 치사해졌다. ……뭐, 나 때문이지만. *** 햇살이 내리쬐는 밝은 창가. 하지만 바깥의 풍경은 볼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던 뚱뚱한 중년의 사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상단주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허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잠깐 좀 쉬고 싶으니 나가 주겠나?” “예? 아, 알겠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가는 비서. 그 모습을 확인한 중년인의 푸근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던전 진입조가 전멸했나.” 그리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의 어둠에서 펼쳐지는 것은 동지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청년. 에녹이 사납게 웃으며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다.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발동되는 기억의 전이.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던 상단주……아니, 상단주로 위장한 흑마법사가 한탄했다. “결국 칼립소의 바깥으로 빠져나왔는가. 그나저나 저 복장은……자하브? 허어. 그런가.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떨리는 손으로 차를 홀짝였다. “하기야. 우리의 고향을 부순 이가 보통 인물은 아니겠지. 아무리 업보가 목을 졸라와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니. 이제야 이해되었다. 최근에 자하브의 사생아가 가주가 되었다고 하던가.” 에녹이 실험체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던 흑마법사들마저 너무도 자하브스러운 에녹의 모습에 착각하고 말았다. 그냥 고아가 아니라 자하브의 사생아를 데려와 실험체로 삼았던 거라고. 실험 과정에서 잠들어 있던 피가 각성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착각이지만 이를 바로잡아 줄 연금술사는 진작에 에녹의 손에 죽었다. “허나 태양이라 한들 약점 없는 존재는 없는 법. 그 어떤 불길도 영원히 타오를 수는 없고, 그 어떤 빛도 언젠가는 어둠에 수렴하니.” 과거의 트라우마를 애써 억누른 흑마법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원수여. 네 정체를 알았으니, 이것으로 네 심장을 찌를 비수를 만들 수 있게 되었음이라.” 제국 전역에 흩어진 흑마법사들이 같은 기억을 공유받고, 은밀한 협력을 시작했다. 오직 자하브를 죽이기 위한 무기를 주조하기 위하여. ……그래. 자하브가 아닌 이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