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과 나락. 떡상과 떡락을 오가는 무한 스파이럴의 굴레. 군량미 담당관의 모가지를 쑤컹함으로써 자신의 혐성을 또다시 만천하 독자들에게 과시한 조조였지만. - 유비는 영웅의 자질이 있고 민심을 얻었으니, 다른 사람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빨리 처리해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 이제 천하의 영웅이 내 밑에 모여들 때인데, 한 사람을 죽이기는 쉬우나 그러면 천하인의 마음을 잃는 것이다! 돈 주고 쌀 주고 성 주고 병사 주고 모든 것을 다 준 채, 결국에는 빤스 한 장 걸치고 도망쳐 버린 귀 큰 놈의 귀순을 받아들이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물론 소설적으로 본다면 크로스오버의 또 다른 주인공을 어찌 내팽개칠 수 있겠냐만. 주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 큰 놈을 받아들이는 선택에. 매실로 환각을 자아내는 이전 에피소드와 더불어서 또다시 조조 코인의 반등을 견인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드디어 여포 토벌전인 것이와요!” 어찌 하이엘프가 인간의 밑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며 꿍시렁대던 클로에 또한. 김율의 불꽃 튀기는 ‘느이 애비도 인간 황제 밑에 있제?’ 한 방에 현실을 직시하고 소설을 소설로써 즐기기 시작했다. 쥐흔충 깐프가 교화되어 마침내 정도의 길을 걷기 시작하니, 장족의 발전이라고 평할 수 있었다. “그래서 휴재를 하려구요.” “……그건 또 무슨 말인데스와?” 김율의 선언에. 클로에는 자신도 모르게 방언이 터져 나왔다. * * * 휴재는 아침에 눈을 뜰 때, 점심에 밥을 먹을 때, 저녁에 잠깐 늘어져 쉴 때 등 언제든지 하고 싶은, 그야말로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것. 별다른 직업 없이 글만 쓰는 나라서 그나마 아침 먹고 1편, 점심 먹고 1편, 저녁 먹고 1편이라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지만. 내가 만약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벌써 뇌가 녹아버린 채 도로롱 뻗어버렸을 것이다. “휴재라니, 그게 무슨 말인데스와! 그런 폭거는 있을 수 없사와요! 이 장면에서, 이 장면에서 휴재해버리면!” 깐프가 뿌에엥 빼애앵거리며 파닥거리는 걸 애써 밀어내면서.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를 담아낼 생각입니다.” “다른 방법?” 여포는, 지금 너무 거품이 잔뜩 꼈다. 내가 뿌린 씨앗이 업보로 돌아왔던 거지만. 그래도……. 호로관 메뚜기라면 그 정도 포스는 풍겨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었고. 애초에 유비와 조조의 교점이 제대로 되어주는 게 역설적으로 여포였으니까, 그 정도의 비중을 몰아주는 것은 소설적으로 맞았다. 이른 바 1부 최종 보스 같은 느낌. 문제가 되는 건, 여포의 최후. 유비 버전에서의 여포는 그야말로 문무겸비 최강최흉의 지장, 뒤통수를 칠지언정 나름대로 명분과 이유가 있는 존재. 조조 버전에서의 여포는 그냥 원래의 여포 이미지. 빡대가리, 고집불통, 힘만 센 멍청이. 두 가지 이미지를 너무 극명하게 다룬 나머지, 조조와 유비, 그리고 여포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조형하는 난이도가 너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 “여포의 최후는 만화로 그릴 겁니다. 그러니까 지면을 좀 많이 할애해 주세요.” 내 말에. 클로에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뭐, 내가 그릴 건 아니지만. 원래 대학원생은 쥐어 짜내면 뭐든지 다 나오는 존재다. . . . 대략 내 플랜을 설명하고, 클로에가 물개박수를 치는 꼴을 흐뭇하게 감상한 후 귀가. “오셨습니까, 김율.” 히스토리에는 집안의 대들보이자 버팀목, 가장에게 합당한 예우를 올렸다. 최근 살짝 사춘기스럽게 엇나가기 시작한 히스토리에를 한 방에 교정할 수 있었던 특급 레시피는 무엇이냐. - 미, 미, 미……. - 미? - 미천한 것 주제에……! 그래도 제법이군……! 내 플랜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는지. 베르투스 공작의 삼남, 레기 어쩌고가 자기가 일방적으로 처맞은 주제에 깽값까지 물어주곤 깨갱 도망쳤다. 나는 그 화해의 제스처를 바로 수용했다. 그 결과. 연구실의 식량이 빵빵해졌고, 식단이 다채로워졌으며. “김율, 오늘 메뉴는 뭡니까?” “기대해도 좋을 거야.” “으히……!” 연비가 살짝 안 좋은 깡통이 해피합삐를 띄우며 아주 고분고분해졌다. 딱히 그런 RP를 넣은 적도 없는데, 식욕도 왕성하고 식탐도 많으며 심지어 입맛도 조금 까다롭기까지. “다 김율 때문이잖습니까.” “내가 왜?” “처음 태어났을 때 먹었던 빵 맛만 생각하면…… 지금도 슬퍼집니다. 인간은 어떻게 이런 걸 먹고 살았을까, 그래서 지능이 발달하지 못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땁.” 확실히. 히스토리에가 갓 태어난 따끈따끈한 깡통이었을 때. 연구실의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카이사르 이야기가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이 세상이나 현대 세상이나 적당한 수준의 작가 수입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카이사르 이야기로 벌어들인 돈도 대충 월급으로 환산하면, 이세계 평균 직장인 월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 괜히 삼국지로 세태와 야합을 한 게 아니었다. 삼국지를 쓰고서야 비로소 직장인 월급에 어느 정도 비빌 수 있을 만큼의 수입이 나왔으니까. 뭐……. 신문이라는 게 어쩔 수 없다. 출판 시장은 출판 비용이 발목을 잡고. 신문은 다른 콘텐츠들과 파이를 분배하니까. 그래도 당분간은 이렇게 호의호식할 수 있을 정도의 도네이션을 쏴준 베르투스 공작님께 잠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작업은?” “수정이 오히려 더 오래 걸리는지라. 그래도 금방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았쓰.” 집에 오는 길에 산 초코소라빵을 입에 하나 물고, 히스토리에의 입에도 하나 물려주고서. 그녀가 작업을 하는 꼴을 잠깐 구경했다. 인격이 부여된 이후에도 깡통적인 면모는 남았는지, 우리 깡통이가 일하는 걸 보면 항상 신기했다. 특히 생성형 인공지능 본연의 기술을 뽐낼 때가 가장 기가 막혔으니. USB 포트 인근에 손을 올린 채, 부릅! 눈에 힘을 빡 주면. 뾰롱! 하고 인공지능 산 그림이 튀어나온다. ……마법도 있는 세상에, 이딴 게 왜 가능하지라는 생각은 이미 예전에 갖다 버렸다. “저기, 쟤 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예리하군요.” “어어, 그 손가락은 안 된다……!” “음……? 제가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만.” “그런가……? 하기야, 현대도 아니니까…….” 대신, 인공지능 그림 특유의 고질적인 문제와 더불어서 내 심리 속에 있는 기저 질환의 해결은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세계에 존재하는 중세 화풍의 그림 콘텐츠 정도는 압도적으로 따잇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다들 목도해라. 원작. 진수 앤 나관중. 스토리 각색. 김율 및 여러 삼국지 창작물. 일러스트. 깡통. 스페셜 땡큐. 코■이 게임즈. 이학인 씨, 진모 씨, 이문열 씨, 이현세 씨…… 그 외에도 수많은 분들. 그 모든 아이디어와 기술력의 집약체를……! * * * 마도공학이라는, 언제부터 존재했을지 모를 기술력 덕분에. 김율과 히스토리에가 밖을 뽈뽈 쏘다니면서 딱히 원시 고대 미개 중세 시대의 사회상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제국은 꽤 풍요롭고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성비는 중요한 법이었으니. 대량 인쇄 및 대량 판매를 핵심으로 하는 신문은 보통 흑백으로 출간되기 마련이었다. 아니면 기껏해야 1면에 색채를 넣는 정도였다. 비용 차이가 말도 안 되게 났으니까. 하지만. - 왓 더……! 이거는, 이거는 꼭 풀 컬러로 세상에 공개되어야하는 데스와! 김율이 전달한 원고를 보고 방언을 빵빵 터트린 클로에의 결단 덕분에. 진리일보. 또다시 특집. “호외요! 호외! 진리일보, 전면 풀 컬러!” “두 영웅 이야기의 만화가 연재된대요!” “여포의 최후가 궁금하시다면! 즉시 구매!” 새벽. 신문 가판대의 호객 소리가 요란하게 세상을 깨웠다. 두 영웅을 보는 독자들도. 심지어 두 영웅을 보지 않는 사람들도, 풀 컬러라는 어그로에 이끌려서 자신도 모르게 진리일보를 집어 들었다. 진짜 작정이라도 한 듯, 국제 문제나 정치 문제를 다루는 지면에 있는 사진들까지 컬러풀하게 담겼다는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애초에 지금 사람들은 깐프의 가증스러운 미소나 드워프의 술주정, 그리고 제국 수도 근처에서 목격된 황금색 용의 목격담이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니. 파라랑, 팔랑── 곧바로 문학 지면으로 넘기면. [두 영웅: 황족이 혈통을 숨김은 금일 휴재입니다.] 스킬 획득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연의 기반 작품은 과감하게 휴재를 때리는 결단과 함께. 가장 먼저 펼쳐진 것은 조조 이야기, ‘악당이 야망을 숨김’. 몇 화동안 계속 이어진 여포와의 결전에서, 마침내 물속성 마법(아님)을 이용해 도시를 물에 잠기게 만들고서. 하나씩, 하나씩. 여포군의 네임드들을 생포하고. 마침내는 여포까지 생포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이 나고, 만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목도했다. 컴퓨터로하는것은뭐든지잘해 깡통님께서 찍어내고, 편집하고, 때로는 김율의 충고를 받아들여 섬세하게 깎아낸 정수를. 그것은 단순한 만화가 아니었다. ……아마 21세기의 감각으로 보았다면, 그저 일러스트들을 교묘하게 컷마다 배치한 누가 봐도 인공지능 티가 나는 그림의 연속체라고 평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판타지 세계에 딸깍으로 그림을 뽑아내는 문화가 있을 리는 없었으니. “도대체, 도대체…… 언제부터, 이걸 그리기 시작한 거지?” “일 년? 아니, 일 년도 모자랄 것 같은데…….” “고작 소설의 한 장면을 위해서 이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 것인가? 도대체, 도대체 이 작가는 도대체?” 나 손가락에 물감 좀 묻혀봤어요 하는 사람들은 그 압도적인 작업량에 전율을 금치 못했으며. “어떻게 이렇게 다 개성 있게 잘 생길 수가……!” “꺅, 나 반해버렸어……! 멋있어!” “조조 유비 케미 뭐야……! 나 뽀짝사!” 코■이 특유의 미화된 인물이 기본 베이스로 깔리다 보니, 여심마저 단숨에 사르르 녹여버렸다. 당연하게도, 기존 독자들 또한 정신을 놓고 말았다. - 명공이 근심하던 것이 이 여포인데, 이제 내가 항복했으니, 천하에 걱정할 게 없소이다! 청컨대, 부디 나를 사냥개로 쓰시오, 천하를 입에 물어다 명공에게 바치리다! “여포의 생에 대한 집념이 여기까지 느껴지는군…….” “온갖 조롱과 오욕을 뒤집어쓰더라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니, 살면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니. 누가 여포에게 욕을 하겠는가?” “안된다, 이건 살려두면 안 된다.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여포는 진짜 괴물이 될 것이야……!” 여포의 생에 대한 집착이 다른 만화의 레퍼런스를 빌려 그야말로 비장하고도 압도적인 분위기로 연출되었으며. 마지막. 인재를 사랑하고, 인재를 자신의 휘하에 두기를 즐겼던 조조의 망설임이 생생한 표정 묘사를 통해 드러났으며. 지금껏 존재감 없이 조조의 부하처럼 도열해 있던 유비에게 마침내 포커싱이 옮겨지고. - 명공께서는 여포가 섬기던 정건양과 동 태사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 저 귀 큰 놈이 가장, 가장 믿지 못할 놈이다! 애비 환승 전문가의 말을 믿느냐는 전직 뒤통수 피해자의 일침과. 그야말로 핵심을 찌르는 여포의 혜안이 대조적으로 한 컷에 담겼다. 그리고. 온통 먹칠만 묻어있는 암전된 페이지 속, 주인 잃고 쓸쓸하게 꽂혀 있는 방천화극의 녹슨 모습으로. “…….” “거, 여포, 갈 때도 예술적으로 가는구먼.” “소설도 좋지만, 이렇게 보니 만화도 좋군…….” 사람들은 여운을 만끽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겨. 마침내 ‘두 영웅’ 만화가 끝난 후 마지막, 막간 광고 페이지. [두 영웅을 기반으로 한 트레이딩 카드 게임, 출시 예정!] [화려한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즐기는 수집의 참 재미!]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을 내 손으로 모으자!] “……?” “트레이딩 카드 게임?” “그게 뭐지?” “보드게임 같은 건가?” TRPG와 유사하게,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는 류의 내용을 담아낸 보드게임은 이미 이 세계에 존재했다. 몹시 비싸지만, 드워프와 엘프를 형상화한 조각상을 활용해서 서로 땅따먹기하는 보드게임 또한 이미 이 세계에 존재했다. 하지만. 베르투스 공작이 적선한 후원금을 야금야금 흩뿌리면서 미식과 식도락의 세계에 어느덧 빠져든 김율과 히스토리에. 두 생태계 교란종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다시는 딱딱한 빵과 밍밍한 수프를 먹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강렬한 욕망은 곧 자신들이 보유한 IP와 더불어서, 고품질의 일러스트를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독점적 시장 지위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사고를 뻗친 결과. 아직 나름대로 클린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판타지 세계에. 카드 팩 가챠라는 사악한 문명의 전조가 꿈틀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