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아이사츠를 시도당했던 일로, 김율은 베르투스 공작에 대한 복수심이 꽤 쌓여 있었던 상태였다. 물론 이방인 겸 평민따리 김율이 어떻게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베르투스 공작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김율은 위정자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엿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의 핏줄에도 기인하였으니. 동글동글한 반골의 상을 타고났음뿐만 아니라. 임금이 직접 ‘이건 사초에 기록하지 마라’하고 꼽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목까지 사초에 기록해서 기어코 후대에 이어지게 만든 미친 사관의 민족. 기분 좆같을 때마다 노빠꾸로 상소문을 올리며, 모가지가 날아갈지언정 팩트를 지적해야 한다는 신념에 똘똘 뭉친 나머지.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를 박았다가 진짜 모가지가 날아가 버린 직언의 민족 출신이 바로 김율이었다. 그렇기에. 조조가 전위와 조앙, 조안민을 집어던지고 빤쓰런을 갈긴 연재회차가 수록된 그 날. [고발 르포: 공작의 음습한 사생활 전격 해부!] [집필자: 아스테릭] [B 공작은 제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특유의 여성 편력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사생아만 하더라도 벌써 스물이 넘어간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였으니, 그 하반신의 위대함은 가히 국가권력급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런 위대함을 단순히 평범한 여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휘두른 것이 아니라, 때로는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진리일보에는, 빠꾸 없는 상남자가 휘두른 노골적인 르포 한 편이 함께 실렸다. 누가 봐도 주어는 없지만 명백하게 저격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모양새의 글. 물론 일반적인 신문사였다면 이 미친 짓거리에 제동을 걸었어야 정상이겠지만. “그거 재밌겠사와요! 당장 진행시키는 데스와!” 불행하게도 김율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어야 할 깐프, 위스페라우드 공작가의 영애께서는 원래도 반쯤 대가리가 돌아있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정적 관계였으니, 아무런 부담 없이 베르투스 공작을 돌려버리고야 말았다. 물론 이 야만적인 세상의 최고 지성(자칭), 히스토리에는 처음에는 다소 우려를 표했다. “김율, 후폭풍이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암살자를 보낸 그쪽이 문제 아닐까?” “맞는 말씀입니다만, 음, 그래도 조금 걱정되는군요.” “그래도 깐프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평생 계속 눈치만 보면서 살 수는 없잖아.” “합당합니다. 뭐, 김율이 수립한 계획도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군요. 스킬을 그런 식으로 응용한다는 발상을 할 줄이야, 조금 김율답지 않았습니다.” “나다운 게 뭔데?” “음흉하고 비열한 미소를 케시싯 흘리는 미남자?” “……이 깡통이?” 당연하게도 김율은 미친놈이 맞긴 하지만, 빡친다는 이유로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범이 된 클로에를 꼬드겨서 안전 보장 장치를 마련했다. 먼저, 클로에의 귀를 잡고 뜯어낸 호위 기사. 물론 조금 운신의 제약은 생길 순 있었지만,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절대 안전을 보장받는 연구실. 원고를 전달하는 것도 호위 기사를 통해 전달한다면, 실질적으로 식량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이론적으로 연구실에 평생 칩거할 수도 있었다. 물론 김율은 그렇게 살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진짜, 진짜 괜찮겠어? 막 아프다고 휴재하면 안 돼? 그러면 진짜 레어로 납치해서 가둬둘 테야?” “음…… 괜찮을 겁니다. 제 가설이 맞았다면요.” “이얍!” “끄악!” 에스테아가 꼬리 채찍을 사용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괘, 괜찮아?!” “끄으윽…….” 언제까지 에스테아를 던지는 식으로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었으니,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않은 김율이었다. 또 날벼락처럼 균열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니면 격노한 공작이 암살자를 보낼 수도 있었으니까. 김율의 결론은 간단했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강해져서 하늘에 서겠다. 빙의 직후 용사 아카데미에 얼쩡거리던 호승심은 아직 그의 가슴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 * * 그러한 김율의 호승심은. “어머, 작가니이이임?” “헉.” 왜곡된 사랑에 대한 항의를 표출하기 위해 친히 자택을 방문하신 성녀님 앞에서 산산이 조각나버리고 말았다. 에스테아 호출권을 사용하기에도 애매한 상대이며. 김율의 멱살을 잡을지언정, 목을 졸라 죽이지는 않을 성녀였기에 호위 기사 또한 대응할 방법도 없었다. 오히려. “와…….” 로젤린에게 헤드락이 걸린 채, 가슴과 뺨이 맞닿아버린 김율을 바라보며 부러움의 시선을 던지는 호위 기사였다. . . .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찰나의 순간을 거친 후. 서쪽 광장의 야외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김율은 한동안 자신의 집필 의도를 로젤린에게 납득시켰다. “결국 문학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불륜이 부도덕한 것임은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때로는 어두운 현실을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지요.” “흐응.” 로젤린의 입이 샐쭉 튀어나왔지만. 고막을 관통해서 뇌에 직빵으로 때려 넣는 헤르메스의 가호가 그녀의 사고를 주무르며 김율의 말에 설득력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리고 튀어나온 무적의 논리!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이건 불륜이 아닙니다. 애초에 추 씨는 미망인이었으니까요. 추 씨가 진심으로 거절했으면 조조도 선을 넘진 않았을 겁니다.” “어머, 그래요?” 로젤린의 오해가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그 자리에 관대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를 확인한 김율이 한시름을 돌리며, 혓바닥으로 태극권을 시도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제가 죽을 뻔했는데 이 정도의 엿도 못 먹입니까? 제 멱살을 붙잡을 게 아니라, 베르투스 공작님의 그 난잡한 사생활에 항의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김율의 일침에. 로젤린은 그저 싱긋 웃었다. “성국에 계시는 분이었으면 이미 제가 터트렸을 거예요. 근데, 으음, 저 때문에 전쟁이 나는 건 좀 그렇잖아요? 명색이 성년데.” 동전 하나를 하늘로 핑그르르 던지더니, 이내 손아귀 힘만으로 동전을 구슬로 만들어버리는 묘기를 보며. 김율은 시선을 살짝 피했다. 애석하게도 아직 그가 정정당당하게 물리력으로 이길 수 있는 주변인은 허접 깐프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 “네놈이 율리시스, 맞지?”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김율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 순간. 철썩! 그의 뺨에 장갑이 하나 싸대기를 툭 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결투다.” * * * 베르투스 공작의 삼남. 레기오스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는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라왔으며, 아버지가 일구어낸 수많은 위대한 업적들에 경탄을 새겼다. 그리고. 사교계와 정치계를 오가는 자신의 형들에 비해서, 어렸을 적부터 계속해서 무예를 갈고닦은 자신이 후계자로 훨씬 어울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지금까지는 평화로웠지만. 앞으로 제국은 긴 혼란에 빠질 터. 그 혼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날카로운 펜이 아니라, 잘 벼려진 칼이 될 것이니까. 유능함을 입증한다면 자신 또한 아버지처럼 제국 전체를 오시할 수 있는 자리에 충분히 오를 수 있으리라. 그러한 생각으로, 그는 젊은 나이에 수도방위대에서 꽤 높은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수도방위대장이 이전 ‘단검의 밤’ 계획을 묵인한 것 또한 그의 입김이 컸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 이 찢어 죽일 천민 놈이, 미친 귀잽이 년들이!” 존경하는 아버지에게 모욕적 메시지를 담아낸 진리일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있었다. 국가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영웅이 사소하게 여인들을 취했다고 한들, 그게 무슨 흠결이 된단 말인가. 오히려 유부녀야말로 누군가의 선택을 받았다는 일종의 보증수표와 같은 것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사고방식을 쏙 빼닮은 아들은. 성녀가 속마음을 읽었다면 바로 대가리를 깼을 법한 생각을 머릿속에 가득 채운 채 씩씩대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가 모욕받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얼마 전에 남작 부인 하나와 뜨거운 밤을 보냈었던 적이 있었던 레기오스였던지라, 더 크게 와닿았던 것도 있었다. “후우, 후우…….” 하지만 분노는 일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심호흡하면서, 다시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 사안은 그들의 가문, 에스트리야스 공작가의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반박문을 낸다? 그게 더 자살행위다. 대중들은 가십거리가 진짜인지 아닌지에 관해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편하게 씹어댈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니까. 그래서 굳이 반박해서 불을 붙인 채, 진리일보를 보지 않는 더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퍼지게 하는 것보다. 아예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게 낫다.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했지만. “이런 모욕을 받고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그의 자존심은,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는 이 율리시스라는 작자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저택까지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이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으며, 그게 고작 평민 나부랭이라니. 게다가 저택에서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이래서 하찮은 평민들에게 자비를 베풀면 안 된다. 끝도 없이 기어오르니까.” 이빨을 뿌득 갈고. 그는 경장을 갖추어 입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에게 본때를 보여줄 시간이었다. . . . 잠시 후. 분기탱천한 채 거리를 누비던 레기오스는, 이내 율리시스라는 평민 작가 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애초에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인상이기도 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살짝 부스스한 머리. 잘생김과 야비함 사이 어딘가를 오가는 특출난 외모. 그리고 예의 괴물 성녀까지 함께 있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두 연놈이 짜고 에스트리야스 가문에 엿을 먹인 게 틀림없었다. 레기오스는 곧장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결투다. 네놈이 입만 산 놈팽이가 아니라면, 응당히 받아들여라. 아니면 비겁한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거나.” 오래전부터 이어진 귀족의 관습에 따라. 장갑을 벗어 그의 얼굴에 던졌다. * * * 겉으로는 몹시 당황한 표정을 드러내면서도. 김율은 속으로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가장 적절한 준비가 되어있을 때. 낚아낼 수 있는 가장 큰 월척이 걸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