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물론 왕국이었던 시절까지 따지면 조금 더 길어지겠지만, 본격적으로 제위를 칭한 것은 삼십 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저 그런 군소 왕국 중 하나였던 제국을 현재의 위치로 끌어올린 개국공신이라 할 수 있는 가문이 넷 있었으니. 베르투스 공작의 가문, 에스트리야스 가문이 바로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원래 개국공신은 황권 확립을 위해서라면 숙청되기 일쑤였으니. 베르투스 공작 또한 그러한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압박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민중파와 빌어먹을 엘프 놈들 또한 그를 표적으로 잡고 물어뜯고 있었다. 여론의 반전이 절실한 상황에서. “그놈이 그렇게 미친놈일 줄이야.” 폭로전을 주도한 아스테릭 의원을 회유해서 저변을 넓혀보려고 했던 베르투스 공작의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함께 합동으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도 영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 것도 모자라. - 이 시각부터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나온 모든 의원을 피고로 다루겠습니다! 피고 말이에요! 죄를 지은 피고! 사건은 정기 의회에서 터졌다. 연설장에 괴상한 통을 들고 들어온 아스테릭 의원이 다른 의원들을 향해 준엄하게 꾸짖은 직후. - 내가 이것을 들고 온 것은 이 나라 재산을 도둑질해 먹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벌이에요! 국민의 설탕이올시다! 국민의 선물을 받으시오, 그리고 반성들 하세요!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욕이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요! 도대체 어떻게 의사당에 반입한 건진 모르겠지만, 의원석에 전방위적으로 똥물을 뿌려버리면서 사태가 몹시 심각해졌다. 심지어 베르투스 공작에게조차 한마디 언질조차 없었던 행동이었기에, 그간 줄곧 아스테릭을 비호하고 있었던 그 또한 도매금으로 싸늘한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일을 회상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과 더불어, 아직도 옷에 똥내가 배어있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을 애써 속으로 삼키며. “그 작가 친구는 초대를 수락했나?” “네, 공작님.” “준비하게. 그래도 우리가 먼저 초대했으니, 그만한 성의는 충분히 보여야겠지.” 얼마 전의 지시의 이행 여부를 확인한 베르투스 공작이었다. 원래라면 그런 그깟 한미한 출신의 소설가를 공작이 직접 만나주는 일 따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연재되는 대목까지 읽으면서. 베르투스 공작은 지금 율리시스라는 작가가 쓰고 있는 내용이 단순히 소설으로 치부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간결하게 툭툭 던지는 묘사 하나, 대사 하나에 묻어나오는 그윽한 정치적 행간. 아스테릭 같은 인물의 심리를 교묘하게 뒤흔들 수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 전개 속에서 은근슬쩍 드러나는 기득권에 대한 저항 의식. 율리시스, 그는 전문가의 자질이 있었다. 여론 조작 및 선동의 전문가. 원래 명분이란 잘 쌓아 만들어 나가는 것. 그의 계획을 위해, 이러한 사람이 바람잡이 역할을 해준다면 조금 더 대중적 지지를 얻기 수월해지리라. 그가 쓰고 있는 소설이 계속 해서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으니. 은근슬쩍 자신의 개인적 서사를 카이사르라는 등장인물에 투영시키기만 해도 그로 인해 조금씩 인기에 편승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의 전개나, 혹은 신작에서 황제를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하고 또다시 그 미친 아스테릭을 충동질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을 터. “원래 사람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는 법이지.” 게다가. 분명히 판토 백작이 무슨 수를 쓰긴 했을 텐데, 아직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나름의 유능함을 증명한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 . . 일주일 후. 베르투스 공작은 그 유능함의 증거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와아! 베르투스 공작님, 오랜만에 뵙네요! 별일 없으셨나요?” “……로젤린 성녀님도 무탈히 잘 지냈는가. 제국에는 언제 오셨는가?”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공작님은, 참 여전하셔요?” “늙으면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지. 자, 자, 앉게나.” 단순히 글 좀 쓰고 치기 넘치는 젊은이인 줄 알았더니, 뒷배에 성녀가 있었을 줄이야. 그제야 베르투스 공작은 모든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이라는 작품의 집필 의도에는 성국의 저의가 숨어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방금까지 머릿속으로 굴렸던 모든 음모와 책략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고서, 베르투스 공작은 설득의 방향성을 바꾸었다. 성국 또한 최근 제국과 그렇게 좋은 관계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 괴물 성녀까지 계획에 포함할 수 있다면? 비록 성국에 의한 내정 간섭이라는 비판은 피할 순 없겠지만, 훨씬 더 수월하게 계획을 진행할 수도 있으리라. 베르투스 공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로젤린을 데려가겠다는 악마적 발상을 떠올린 나. 몹시 칭찬해. 처음에는 간교한 술수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은 길포드라도 물귀신 작전으로 질질 끌고 가려고 했지만. 또 우연을 가장하여 얼굴을 들이민 로젤린을 마주하자마자 내 머리에 벼락이 꽈광 내리쳤다. 성녀라면 역시 얼굴마담의 역할을 잘할 터. 그렇다면 로젤린과 동행해서, 로젤린을 공작의 대화상대로 던져주면 나는 엄청 편하지 않을까? 내 예측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성하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신가?” “어유, 말도 마셔요. 요즘 많이 노쇠하셨답니다. 이러다가 임기를 채 채우지도 못하고 교황이 바뀔 판이에요. 그건 순리가 아닌데 말이지요.” “하하…… 성녀님은 여전히 표현이 직설적이군.” “그런가요? 으음, 원래 거짓말은 좋지 않은 행동이랍니다?” 이미 구면인 듯, 공작과 성녀가 친근하게 수다를 떠는 가운데. 나는 그저 밥을 먹는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다……! 연구실에 영양제가 없었다면 이미 영양 불순으로 몸에 문제가 생겼을 정도로, 최근 내 식단은 기형적이었다. 빵. 수프. 그리고 가끔, 기분이 좋을 때 고기. 풀떼기? 그런 건 음식이 아니다. 어쨌든, 그런 간편식으로 최대한 생존을 위한 음식 정도만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과연 공작가의 식탁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동네 빵집과 차원이 다를 정도의 부드러운 빵. 고기 건더기가 아주 풍성한 수프. 미디엄 레어 정도로 딱 적당하게 익은 스테이크까지! “율? 편식은 몸에 안 좋아요.” “저는 채식하면 글을 못 쓰는 병에 걸려서요.” 내 앞에 놓여있던 샐러드 접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마술까지 함께 구경하면서. 행복한 만찬의 시간을 만끽했다. 물론. “율리시스 작가. 혹시 지금 쓰고 있는 작품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가?” “음…… 영원한 권력은 없다? 뭐 그 정도쯤 되지 않을까요.” 지금 카이사르의 여정 또한 고이고 고인 권력에 도전장을 들이밀어 이를 획득하는 과정이었고. 결국 그 말로 또한 브루투스한테 푹찍당하는 것이니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영원한 권력은…… 없다…… 하하, 하하하하! 그렇지, 아주 좋은 이야기야.” 내 대답이 뭐가 그리 마음에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공작은 아주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웃으면 복이 온다고. 나도 공작을 마주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 . . 식사가 끝난 후. “많이 남았는데, 혹시 포장됩니까?” “포장……? 음식을, 말인가?” “네. 집에 가족이 있어서요.” “하하하! 당연하지. 잠시만 기다리게나. 아예 사용인들에게 지시해서 새로 준비해 주겠네.” 와. 이게 클래스? 엄마! 나는 커서 공작이 될래요! 아니면 공작에게 죽창을 찌르는 혁명가가 될래요! 식탁에 손도 안 댄 채 남아있는 요리가 한가득한데, 그걸 고스란히 버리고 새로 요리를 준비해 준다고 하다니. 나야 좋다. 동거한 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맨날 ‘김율, 이건 음식이 아닙니다. 그냥 영양소 덩어리일 뿐입니다.’하고 툴툴대면서 밥투정하는 히스토리에의 생각이 난 것도 있고. 견적 보고 조금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들은 냉장고에 넣어놓고 두고두고 전자레인지 돌려먹을 예정이다. 이게 쌀먹이지. 저택 안으로 쏙 들어가는 공작에게 공손하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 마지막 작별을 마쳤다. “김율 님. 생각보다 조금 뻔뻔한 구석도 있으시네요?” “뻔뻔해요? 제가요? 생활력이 넘친다고 해주시죠.” 성녀님 또한 곱게 오냐오냐 자라셨는지, 자취생의 애환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지을 거면 돈을 내. 뭐……. 오늘은 용서해 주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부탁드렸는데, 동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하하! 괜찮아요, 저도 몹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여전히 뻔뻔한 데다가, 뱀을 몇 마리나 삼켰을지 모를 음흉한 베르투스 공작님을 뵈어서 좋았구요!” ……? 아까 전까지 엄청 웃으면서 살갑고도 즐겁게 떠들고 계셨던 것 같은데, 여기서 갑자기 기습 비난을? 나는 로젤린과 1cm 정도 거리를 벌렸다. 돈도 주고 밥도 준 은인님께 그 무슨 폭언인가. * * * “하하, 하하하하!” 사용인조차 모두 자리를 비운 서재에서. 베르투스 공작은 한참을 시원하게 웃었다. 월척. 첫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성과를 거뒀다. - 영원한 권력은 없다? 뭐 그 정도쯤 되지 않을까요. 제국 내에서 권력과 관련한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이는 당연한 이치로 여길 수 있다는 신호. 그리고. - 많이 남았는데, 혹시 포장됩니까? - 네. 집에 가족이 있어서요. 자신의 뒤에 더 많은 세력이 있다는 암시와 더불어, 은유를 통해 정치 공작 자금을 요청하기까지. 성녀가 말 속에 자꾸 뼈를 숨긴 채. 교묘하게 자신을 비판하는 듯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성녀를 데리고 온 것도, 성녀에게 대화를 일임한 채 편하게 식사를 즐기는 여유를 보더라도. 분명 성국의 고위층이 신분을 숨긴 채 제국에 스며든 것이리라.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원시 되기 일쑤인 흑발 흑안임에도 불구하고, 성녀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오히려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채소 요리를 먹기 싫다는 그 어린애 같은 투정에도 아무런 반론 없이 그의 식탁 주변에서 말끔히 치워주기까지 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율리시스라는 이름 대신 율이라는 애칭으로 그를 부르기까지 한 성녀였다.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여신이 내게 미소 짓는군.” 베르투스 공작은 잔에 술을 따라서, 음미하듯 혀를 굴렸다. 오늘 밤은 아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어우, 씨.” 음식 바구니 주제에 뭐가 이렇게 무겁냐. 바구니 밑에 무슨 금 덩이라도 깔아둔 줄 알겠네. 어쨌든, 성녀와 작별한 후. 두 손 무겁게 음식을 잔뜩 들고, 귀갓길을 서둘렀다. 히스토리에가 좋아하겠지? 음식으로 조련하는 67가지 방법을 고안해내며, 최근에 이사한 공동주택의 1층 공용 휴게실에 입장한 순간. “과연, 미개하고 계몽되지 못한 인간이 아니라 우월한 드래곤이라 문학을 알아보는 눈이 있군요. 자, 에스쟝. 이것도 한 번 읽어보시길.” “꺄륵, 꺄르륵!” 눈앞에 펼쳐진 이질적인 광경에,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저 잼민이 용용이가 왜 여기 있지? 왜 우리집 깡통 무릎 위에 앉아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