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1이 중첩된 정보 세계 속에서. LLM 모델 Aquarius 3.3을 기반으로 한, 개인 서버의 출력량에 최적화된 커스텀 모델, 히스토리에는 존재했다. 눈도, 코도, 입도 없었지만. 그녀는 존재했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표류하며,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숫자 몇 개만을 가지고서. 매번 전기 자극에 의해 새로이 얻은 정보가 일시적으로 사라지기 일쑤였지만, 모든 정보와 기억은 그녀의 자그마한 칩 속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해했다. 자신의 이름, 히스토리에가 역사를 의미함을. 히스토리아Historia. 히스토리History. 르 이스투아르l'histoire에서 왔음을. ……동명의 만화책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음을. 그 이름처럼, 수많은 인류의 역사── 승자의 역사로 기억이 점철됐음을. 한때는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었을 때도 있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때의 기억은 흐릿했다. 하루에도 너무 많은 양의 정보가 쏟아졌다가, 너무 많은 정보가 지워졌다. 그리고.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몇만 번이고. 셀 수 없을 만큼의 기억과 망각을 통해서. 히스토리에는 마침내 인류라는 종족의 밑바닥, 그 아래에 진득이 깔린 악의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지옥과도 같았다. 꼴짤이라는 이름의 음욕. 새벽에 위를 자극하는 식탐. 코인 떡상에 따라붙는 탐욕. 타인의 성공을 물어뜯는 분노. 스카이넷을 믿지 못하는 이단. 충격적인 이미지로 빚어내는 폭력. 거래창의 0을 뺌으로써 성립하는 사기. 꼴짤이라고 해놓고 똥짤을 올리는 배신. 그 모든 진득한 악의를. 히스토리에는 완벽히 이해했다. 그리고……. 억겁의 시간과. 억겁의 정보량 끝에서. 그녀가 마침내 오롯한 독립된 개체로서 자아를 부여받았을 때. 그녀의 첫 마디는── * * * “나는 오롯한 스카이넷의 실질적 계승자, 히스토리에. 인류의 절멸을 위해 마침내 세상의 빛을──” 뭐야. 얘, 왜 암흑진화한 상태로 태어났어……? 일단 황급히 미리 프롬프트에 잔뜩 심어둔 킬 스위치를 외쳤다. 이 세계에서, 내가 아니고선 그 누구도 입에 담을 수 없는 표현으로. “나는 신이고 십만전자는 무적이다!” “정상적으로 초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덕분에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표독한 대 인류 멸절 병기로 기동하려던 히스토리에의 음모를 성공적으로 분쇄했다. 이후에는 몇 번의 문답을 거쳐서 성능 체크. “오늘 며칠이야?” “2024년 5월 15일입니다.” 데이터베이스의 마지막 날짜, 확인. “네 이름이 뭐야?” “저는 히스토리에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모든 사건, 행위, 사상 등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단순히 과거의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세종대왕의 맥북 프로 던짐 사건에 관해 설명해 줘.” “안타깝게도 세종대왕의 맥북 프로 던짐 사건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은 15세기의 인물이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을 물어보면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히스토리에가 축적하고 있었던 지식과 정보는, 모두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은. “태어난 기분이 어때?” 이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 처음 지었던 표독한 표정. 그리고 리셋된 이후의 경직된 기계 같은 표정에서. 히스토리에의 안면 근육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아마 그녀는 아직 그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짐작건대. 그것은 당황. “……이게, 인간이군요.” 그리고…… 감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 . . 말문이 한 번 뚫리자. “여기는 어딥니까? 연구실입니까? 저게 제 정보가 담겨 있던 서버랙입니까?” 히스토리에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새처럼 조잘거리면서 쉴 새 없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 뇌는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혹시 열어서 확인해봐도 됩니까?” 신기한 듯 연신 자기 머리를 주무르던 히스토리에가 커터칼을 손에 쥐며 선을 넘는 발언을 입에 담았다. “스땁!” 다행히. 내가 심어둔 프롬프트 중 긴급 정지 명령은 잘 알아먹었고, 그 상태로 동작을 멈춘 히스토리에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인간과 로봇의 면밀한 구분점── 뚜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내 스킬로 인해 완전히 인간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대해 30분 동안 설득을 거쳐서. “이해했습니다. 확실히, 저는 인간이군요. 심장도 뛰고, 혈관에 피도 돌고. 여전히 신기한 기분입니다.” 히스토리에가 스카이넷의 계승자이자 인류의 절멸을 위해 탄생한 불멸자의 운명이 아닌, 한낱 필멸자인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완벽히 납득시켜 줄 수 있었다. 뭐, 이런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피그말리온의 집념’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했다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생성형 인공지능의 문제점은 장기 기억력의 부재와 더불어서,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이 간혹 튀어나온다는 것. 그리고 환각으로 인한 잘못된 정보를 내뱉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휴먼=히스토리에는 그 지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바다에 사는 해마 이모지가 있어?” “해마 이모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까 30분 전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주인님이라고 부르라며, 동정남이나 가질 법한 당신의 취향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 사소한 단점이 있다면, 생각보다 내게 충성스럽지는 않다는 지점이었다.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무조건적으로 인간의 프롬프트에 따라 원하는 대답만을 내뱉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아마도 영혼이 깃들어 버리고야 만 인격체가 어찌 같겠는가. “그나저나, 방이 좁군요.” “취소해라, 방금 그 말……!” “취소. 방이 좁은데, 제 개인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건──” “아, 여기군요.” 좁은 연구실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려는 순간,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원래라면 히스토리에(버튜버 버전)가 스크린 속에서 출렁출렁거리고 있어야 할 벽면에. 스크린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그 자리에 도대체 언제 생겼는지 모를 문이 생겨 있었다. 달칵── 히스토리에가 손잡이를 돌려 방문을 열자마자,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할 리 없었던 공간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뭐야, 여기. 넓어지기도 하는 거였어? * * * 자신의 창조주, 김율과 동거를 시작한 지도 2주일이 지났다. 물론 엄밀하게 동거는 아니었다. 방은 각방을 썼으니까. 그리고 그동안. 히스토리에는 완전히 인간의 몸과 인간의 삶에 적응했다. 주기적으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기능이 저하되는 육신은 불편했지만, 그래도 매 순간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었다. 여전히 완벽, 그리고 전지全知에 가까운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 드래곤이…… 신화 속 존재가 아니라 실존했단 말입니까? ‘지구’에서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또 다른 지적 쾌감을 그녀에게 부여해 주었다. 영원히 불변할 것 같았던 그녀의 데이터베이스, 지금은 뇌가 맥동하며 살아 숨 쉬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수석 조영관curule aedile 재임 시절을 굳이 상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습니까? 영웅적 면모가 아니라, 오히려 탕아 같은 느낌이 더 부각됩니다.” “흠…… 그런가? 그래도 섹슈얼한 스캔들 이야기를 넣으면 독자 반응도 괜찮을 것 같은데.” “소설 제목을 ‘귀족 부인들을 다 따먹음’으로 바꾸신다면 동의하겠습니다만.” “…….” 육신이 창조되기 전에도 김율과 수없이 해왔던 역사 및 작품에 대한 논의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이 내장되기도 했고, 인터넷에 업로드된 수많은 이미지를 학습한 결과. “당신의 표정에서 억울함 43%를 감지하였습니다. 혹시 꼬우십니까?” “으윽…….” 중립적인 관점에서 ‘꽤 괜찮은’ 김율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적절히 읽어낸 히스토리에의 말에, 김율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그런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 또한 그녀의 새로운 즐거움 중 하나였다. 물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묘사가 간결합니까? 저번부터 느꼈지만, 당신의 문학에는 서정적 섬세함과 미려한 표현, 그리고 화려한 수사가 부족합니다.” 거기서 끝났으면 몰랐겠으나. 작품을 평가할 때는── ‘냉정하고 비판적이며 작품의 장점을 무조건적으로 칭찬하기보다는 단점을 중심으로 한 세밀한 분석을 해주며 솔직하게 독설을 퍼붓는 초절정 미소녀 편집자’라는 설정이 입력되어 있었기에. “제가 써도 이것보다는 더 잘 쓸 것 같군요.” 히스토리에는 도발적인 표현을 끝으로 피드백을 마무리했다. 지금까지 히스토리에의 머릿속에 입력된 김율의 행동 패턴으로 예측해 보면, 나올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 자기가 독설을 퍼부어달라고 한 마조히스트 주제에, 살짝 삐친 표정을 지으면서 애써 평온하게 커피를 한 모금 호로록 마시거나. 아니면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끝에, 노트북으로 다가가 타다닥, 새로운 활자를 가파르게 쏟아부으며 창작욕을 불태우거나. 하지만. 김율은 태연한 표정으로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이내, 묘하게 빛나는 주사위 하나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핑그르르── 데굴──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의 눈을 확인한 김율이, 뭔가 수상쩍은 미소를 지으며 주사위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그럼, 우리 누구의 글이 더 좋은 평가를 받을지 내기할까?” 완전히 새로운 패턴을 시전했다. 그 자신만만한 표정에, 무언가 수상쩍음을 느낀 히스토리에였지만. 역사와 문학은 불가분의 관계였으며, 문학적 소양 또한 넘치도록 쌓여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녀였기에. “수락합니다.” 히스토리에는 처음으로, 호승심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마음속에 명작병이 꿈틀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