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옛날, 한 뛰어난 영술사가 혼자의 힘으로는 수많은 영술을 다 모으고 익히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천하를 돌며 비슷한 처지의 영술사들을 한데 모았고 그것이 바로 모산파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모산파로 들어온 신입이 있었다. "이 아이는 내 조카다. 모두 잘 대해주거라." 한 자리를 차지하는 진영주 장로 덕분에 쉽게 모산파에 적응한 진은선은 가장 막내였다. 막내답게 잡일도 도맡아 하고 여러 사형, 사저들에게 잘했다. 그들도 싹싹한 진은선을 귀여워했다. 그녀는 곧 모든 문도들에게 주목 받게 되었는데, 당연히 하루하루 상당한 폭으로 늘어가는 영력 때문이었다. "참 신기한 일이지. 왜 사매의 영력이 자꾸 늘어나는 거지? 정말 부러운 체질이야." "사저도 꾸준히 늘려나가시고 있잖아요." "나는 하루에 두시진씩 영력을 수련하니까. 난 사매처럼 대단한 영력을 타고나지 못했거든. 부지런히 수련해야 남들 만큼 영술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될 거야. 그런데 사매는 영력 수련 시간에도 영술만 붙잡고 있는데 매일 늘어나잖아." 진은선은 그녀를 가장 예뻐하는 사저의 고민을 듣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사저에게 유성님의 말대로 포교(?)를 해 보는 거야.' 유성의 부탁은 이러했다. 모산파 사람들과 두루두루, 그리고 최대한 친해질 것. 그리고 그들이 영력을 늘리고 싶어 하는 의지가 보이면 상황을 봐서 유성에게 올리는 축원을 가르쳐 줄 것. 대신 한 명 한 명 신중하게 포섭할 것! 이는 고지식한 누군가가 보고, 진은선이 유성에게 홀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여길까 봐 만전을 기한 것이다. 진은선은 생명의 은인이자 자꾸 부끄러운 생각을 유발하는 유성을 위해 무엇이든 할 마음이 있었다. '말을 잘 들으면 어쩌면...' 또다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 기색이 보이자 진은선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 떨쳐 버렸다. 이런 생각은 혼자 있을 때만 해야 한다. 진은선은 눈앞의 사저를 바라보았다.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시기, 질투의 감정은 보이지 않는다. 함께 지내오며 감정이 표정에 고스란이 드러나는 사람임을 잘 알게 되었지 않은가? 마침 같은 방을 쓰기도하고 자꾸 앵기는 진은선을 예뻐하기에 제일 적합한 상대가 아닐 수 없다. "사저, 그럼 혹시... 저만의 방법이 있는데 한번 따라 해 보실래요?" "응? 어떤 거?" "영력 늘려주는 방법이요." "사매만의 방법이 있단 말이야? 장로님들이 사매는 특이 체질이라 자연스럽게 영력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하시던데?" "저도 잘 될지는 몰라요. 그런데 만약 된다면, 따로 수련하시는 것보다 더 효과가 좋을지도 몰라요. 한번 해 보시겠어요?" 커다란 기대감을 품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저를 보며 진은선은 생각했다. '드디어 유성님께 편지 보낼 핑계가 생겼어! 이 기회를 틈타 계속 주고받아야지.' *** 해시 정각 무렵. 진은선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저를 무릎 꿇려 두고 여러 지적을 하고 있었다. "두 손을 모으고 진실된 마음을 담으셔야 해요, 사저." "진짜 이렇게 하는 거 맞아? 난 백유성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걸?" "이제 아셨잖아요. 이 귀엽고 깜직한 사매를 살려주신 고마운 분이라니까요?" "그건... 고마운 일인데..." "아무튼 간절하게, 최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도록 해요. 그러면 사저도 영력이 늘어나실지도 몰라요." 사저는 진은선의 말이 썩 믿음이 가지 않았다. '어찌 살아 있는 사람에게 축원을 하는 것으로 영력을 늘릴 수 있단 말이야? 은선이가 뭔가 착각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해시 정각 무렵에 항상 같은 자세로 누군가를 향해 축원하는 것이 백유성이라는 자를 향한 것이라는 내막을 알게 되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겉으로는 진은선에게 지적당하지 않을 정도로 경건한 자세를 취한 후. '누군지는 잘 모르시겠지만 백유성님, 정말 사매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복 받으실 거예요. 제 마음이 닿았으면 좋겠어요.' 축원을 올리자 이전부터 영력을 다뤄왔던 그녀의 상단전에 반응이 있었다. '정말... 늘었어?' 영력 수련 시간에 두시진 동안 최선을 다해 수련해서 늘어난 것이 고작 모래 알갱이 하나 정도라고 치면 방금의 축원으로 무려 다섯배 정도가 늘어난 것이다. 축원 올리는 시간도 매우 짧았는데 말이다. '하루에 한 번 정도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했던가? 백유성님에게 더 큰 마음을 가질수록 많이 늘어난다고 했고.' 그녀는 여전히 누군지 잘 모르지만 다음 축원 때는 자기 영력을 늘려 준 백유성에 대해 더 큰 진심과 감사함을 담을 준비가 되었다. "사매, 정말 내 영력이..." 사저는 신이 나서 옆을 돌아보았다. 돌아본 곳에는 진은선이 정말 경건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본같은 자세로 눈을 감고 축원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진은선의 영력이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지가 중요하다면서. 넌 대체 얼마나 큰 마음을 품고 있는 거니?' 잠시 후. 진은선이 눈을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어때요, 사저? 제 말이 맞았죠?" "응!" 그날을 시작으로, 모산파 내에서 영력을 늘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지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 그간 있었던 일들이 빼곡히 담긴 편지를 흐뭇하게 읽은 유성은 의문을 하나 풀었다. '요즘 해시 정각 무렵 신성력이 더 많이 늘어난다 싶더라니 은선이가 잘해주고 있었구나.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더 늘어날 거라고 하니 기대되네.' 최근 유성에게는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그의 거취다. 그동안 낙양 의방에서 일해온 기간이 짧아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였다고 해야 하나. 낙양의방을 찾는 자들. 그중에서 무림인이 아닌 자들을 통해 늘릴 수 있는 신성력이 썩 크지 않았다. 진은선과 같은 특수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아주 약간의 신성력만 늘려줄 뿐이다. '평균적으로 무림인이 가장 많이 늘려주고, 그다음이 빈민가의 환자들, 그다음이 낙양 의방을 찾는 일반인들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는 법. 낙양 의방을 찾을 정도로 여유 있는 자들은 위중한 병이 아니고서야 신성력을 많이 올려주지 않았다. 정당한 돈을 내고 치료받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 감사함의 크기가 작은 것이다. 반대로 무림인들은 몸이 재산인 사람들이고 좋은 의원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자들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문제는 낙양 의방을 그만두고 빈민가만 돌 수는 없다는 것. 돈도 돈이지만 무림맹과 같은 기관과 연관된 일하지 않는 자는 병역 대상이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야 병역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지금의 유성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징병당하는 불상사는 절대 사양이다. 게다가 새로운 무림맹 무사들과 인연을 이어 나가기에 낙양 의방만큼 좋은 환경이 없는 점도 무시하지 못하고. 유성은 고민을 끝냈다. 더 생각해 보아도 뚜렷한 방법이 없으니 하던 대로 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뭐, 나름대로 보람도 있으니까. 불평하지 말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자. 은선이도 힘 내주고 있고. 난 오늘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늦은 시각. 유성은 진료가 끝나가는 시각에 맞춰 신성력을 싹싹 긁어 알뜰하게 써먹었다. 기적처럼 병이 나은 환자들이 유성을 칭송했기에 꽤 보람찬 하루를 마무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진료실 바깥이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모두 비키십시오! 응급 환자입니다!" 익숙한 흙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이 유성의 진료실로 실려왔다. 장시간 바깥 활동에 타서 시커먼 얼굴, 순박한 눈매. "초산!" 약초꾼 초산은 다섯 번째 방문 때,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린 채로 실려 들어온 것이다. "산에서 실족했답니다. 머리를 크게 다쳐서 왔습니다." 유성이 황급히 초산을 살폈다. 그리고 몸 상태를 살펴보고 깨달았다. '이건 절대 못살린다. 신성력이 온전했으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해.' 모든 의원이 환자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유성은 초산을 꼭 살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불가능했다. 더 풍부한 신성력과 상위 스킬들이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초산은 누가 와도 살리지 못한다. 지금까지는 그가 손대서 살리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각오하고 있었으나 그게 친분이 생긴 초산에게 닥칠 줄이야. 유성은 들 것을 들고 온 하인들에게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늦었습니다." 그때. "끙..." 초산이 눈을 떴다. 기절해 있던 것인지 깨어 있었으나 통증 때문에 눈만 감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실핏줄이 다 터져 있었다. "역시 안 되는 거군요. 혹시나 해서 제가 고집을 부려 꼭 백의원님께 데려달라고 했거든요." "...미안합니다." "미안하긴요. 의원님이 산 좀 조심히 타라고 하셨는데 제가 말을 안 들은 탓이지요. 사실 절벽에서 떨어진 직후 살기 힘들다는 걸 알았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여기까지 숨이 붙은 채로 데려다준 것만 해도 기적이지요." 곧 죽는다는 사실에 두렵고 통증도 있을 텐데 초산의 어조는 평이하고 담담했다. 회광반조라는 것일까? "혹시 가족이 있습니까?" 유성은 그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전해 줄 생각으로 물었다. "그런 건 없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말씀해주십시오." "제 망태기 안에 화령초가 하나 있습니다. 꽤 많이 자란 놈인데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한 확인은 못 했습니다." "보여드릴까요?" "이미 앞이 보이지 않는군요. 얼추 50년이 다 되어 보였는데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 "절벽에 피어 있는 것을 캐려다가 사고가 난겁니다. 그걸 제 목숨을 구해주신 스님께 가져다주고 싶습니다. 대신 좀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초산은 무리해서 소림사에 전해 줄 약초를 캐려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그깟 화령초가 뭐라고 이 사람이 목숨까지 걸어야 했을까. 절벽에 난 약초를 캐는 것이 위험하다는 걸 몰랐을 리가 없는데. "아마 절 한심하게 보고 계시겠지요? 저도 제가 바보처럼 보일 거라는 건 압니다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루고 싶은 게 있지 않겠습니까? 전 그냥 제 목숨을 구해주셨던 스님께 빚을 갚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차피 삶에 미련도 크지 않구요." 미련한 자다. 어느 누가 삶에 미련이 없을까. 그러나 초산 덕분에 소림사는 30년간 공들였다는 대환단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올바른 곳에 쓰여 초산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휴, 전해드리겠습니다. 그 스님이 누구입니까?" "감사합니다. 주위에 믿고 부탁드릴 분이 백의원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정해 대사님입니다." 정해 대사. 유성은 그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소림사가 유성이 사는 도시 낙양의 숭산 소실봉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백가장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만큼 유명한 승려였다. "과거에 그대를 구해주셨다는 분이 소림사 방장님이셨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어차피 그분이 아니었으면 그때 죽었습니다. 뭔가 그분께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이제 좀 후련합니다. 느낌이 매우 좋거든요." "정해 대사님...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초산의 표정이 편안해보였다. "또 다른 건 없습니까?" 유성은 잠시 후 초산의 숨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히 눈 감으십시오." 유성은 망태기 안에서 조심스럽게 화령초를 꺼내보았다. 푸른 잎사귀에 붉은 기운을 띠고 있는 특이한 풀. 그리고 성인 손바닥만 한 크기. '이게 정말 50년 된 화령초가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