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유린은 검왕의 손녀로 많은 사람의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검왕의 핏줄은 하나같이 무재가 뛰어나니 분명 손녀도 대단한 무재를 가지고 있을 거야." 아버지와 오라버니 남궁유현 역시 뛰어난 무재를 자랑했으니 당연히 그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도 초절정 고수였으나 남궁유현은 정말 대단했다. 어릴 때부터 그에게 퍼부어진 지원에 힘입어 스물 둘의 나이에 절정 고수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후기지수로 인정받은 것이다. 반면. 남궁유린은 훌륭한 무인이 되기에는 성격이 너무 유약했다. "아무리 대련이라지만 수비하는데 급급해서 어찌 승리하기를 바라겠느냐? 우리 남궁의 검은 패검이다. 공세를 취하는 것이 최선임을 어찌 모르느냐?" "..." "유린아. 네 의지가 전혀 담기지 않으니 확신할 수는 없으나 너 역시 상당한 무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이렇게 유약해서야 어찌 대성을 이룰 수 있겠느냐?" 할아버지인 검왕이 어르고 달래도 남궁유린의 성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을 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직계로서 무공을 배워야 하기에 배웠을 뿐이다. 무림학관도 으레 이름난 무가와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거쳐 가는 곳이라 들어간 것이다. 빨리 학관 생활을 마치고 가문으로 돌아가 남궁유현의 뒤에 묻어가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그러나. 남궁유현이 살수의 암습에 당해 폐인이 된 후. 그녀는 원치 않았으나 가문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유현이의 일은 안타깝지만 네 무재가 평범하지 않으니 천만다행이구나. 지금이라도 무공에 정진하도록 하여라." 존경하는 오라버니를 이제 쓸모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도, 무공에 뜻이 없는 자신에게 과한 기대를 하는 것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녀는 속으로만 끙끙 앓아왔다. 그때, 그녀는 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일침신의! 아직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만 장난스레 불리는 별호였으나 침 하나로 모든 병을 고친다는 신의의 등장이었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된다고 일축했다. "의선이 지금의 별호를 얻게 된 것도 쉰살이 넘으신 후네. 듣기로 스무 살이라던데 그런 자에게 신의라는 별호가 가당키나 한 소린가?" "하지만 그동안 굵직한 환자들을 치료해왔지 않은가? 듣기로 척마대주님도 잘 치료받고 있다고 하고." 아직 척마대주가 화경에 도달하기 전의 이야기다. "흥,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 척마대주님이 속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만약 정말 그분이 화경에 올라 환골탈태를 이루신다고 해도 어차피 병이 자연 치유될 테니 치료가 효과가 있었는지 진실은 모르는 거고." 이제 약관의 청년을 쉽게 신의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항상 천재들의 뒤에서 지냈던 남궁유린은 세상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천재가 있다고 믿었다. '장난으로라도 신의라는 별호는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게 아니야. 분명 백유성 의원님은 대단한 실력일 거야. 오라버니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것이 남궁유린이 백유성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이유다. 그리고. "아직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고 기다려주십시오, 소저. 제가 더 실력을 키워 소저의 오라버니를 한번 치료해 보겠습니다." 백유성은 남궁유린이 꼭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흑..." 모두가, 심지어 의선조차 고칠 수 없다고 단언했던 오라버니의 눈이다. 유일하게 가능성을 언급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동안 남몰래 쌓아왔던 부담감과 마음고생이 터져 나오며, 간신히 참아왔던 남궁유린의 울음보가 터져 버렸다. "..." 다른 상점에 비해 훨씬 조용한 편인 서점에서 다 큰 처녀가 울음을 터트리니 주위의 이목이 쏠렸다. 서러운 듯 흐느끼고 있는 십 대 후반의 미녀, 그리고 그 앞에 선 잘생긴 남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저 쓰레기 같은-" "하여간 얼굴 값-" "아마 남자가 바람을 핀 것이 분명-" 거기까지만 듣고 유성은 재빨리 판단했다.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하수다. 유성의 얼굴을 아는 자들도 분명히 있을 테니 괜한 오해만 키우게 된다. 남궁유린을 달래서 사람들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명을 시켜야 한다. "저, 소저-" "이놈! 유린을 울리다니!" 커다란 외침에 돌아본 곳에는 서점의 문밖에서 팽지산이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성큼성큼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답게 생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어 꼭 성난 멧돼지 같았다. "팽 소협이시군요. 오해입니다. 일단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오해는 무슨,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백호단주님만 아니었다면-" "그만두세요, 팽 소협!" 시기 적절하게 남궁유린이 울음을 멈추고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또 마공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며 유성을 곤란하게 했을지 모른다. "유린! 괜찮으냐? 우연히 지나가다가 내가 널 발견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느냐." 팽지산은 그의 추종자들을 통해 남궁유린이 낙양 상점가에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열심히 찾아다니던 중이다. 우연한 만남. 좋지 않은가? 서로 마음이 있는(오해다) 두 남녀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서점 문 사이로 남궁유린을 발견하고 반가워 하던 것도 잠시, 그녀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열불이 났다. 상대는 공교롭게도 그에게 약간의 체면을 상하게 한 의원 나부랭이였다. 팽지산은 가문 어른들로부터 거침없는 성격이 참 하북팽가의 남자답다는 칭찬을 받고 자랐기에 그는 자기 행동에 항상 당당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유린을 울렸으니 저놈은 나쁜 놈이다. 저놈을 혼내준다면 유린도 내게 더 반하겠지.' 하북팽가의 남자들은 무식하고 경솔하다는 것이 정확한 세간의 인식이었으나 팽가의 남자들은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저는 백 의원님께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살짝 났을 뿐이에요. 괜히 죄 없는 백 의원님을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살짝 눈물이 났다는 주장 치고는 남궁유린의 몰골이 말이 아니긴 했다.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가냘픈 턱에 맺혀 지금도 눈물방울로 변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발치에 후두둑 떨어져 있는 눈물들이 그 증거다. "아니다. 애써 이 자를 변호할 필요 없다. 분명 널 기만하여 울린 것이 분명하다." "정말 아니라니까요?" "유린, 가만있어라. 내가 다 해결해 주마." 남궁유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자기만의 주장을 펼치던 팽지산이 유성을 향해 주먹을 쥐며 호기롭게 외쳤다. "내가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상대해 줄 테니 너도 남자라면 나와 대련을 하자! 이기는 사람이 유린을- 흠흠, 내가 이기면 넌 유린에게 엎드려 사과해야 할 것이다!" 정당한 대련이라면 아무리 백호단주라도 별다른 질책하지 못하리라는 나름의 계산이었다. "..." 하북팽가의 권이라. 절정 초입의 도객이 주먹을 말아쥐며 호기롭게 외쳤으나 유성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에서 소림의 사대금강 혜강마저 이겨 낸 것이 그였다. 유성은 그때보다 더 발전했다. 소림 절예들의 묘리를 흡수했고, 절정 고수마저 내공 없이는 할 만하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유성은 이 대련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도 주루에서 쌓인 앙금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대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팽 소협은 왜 제 말을 안 들으시는 거죠? 제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나요?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고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어쩔 줄 몰라 하던 남궁유린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유, 유린. 난-" "그동안 팽 소협이 아무렇게나 말해도 선을 넘지 않아 참아왔는데 저는 팽 소협의 이런 모습이 정말 싫어요! 사과는 팽 소협이 백 의원님께 하셔야해요!" "이익...!" 없는 말로 남을 비난하는 데는 거침이 없어도 스스로 비난받는 것은 참지 못하는 사람인 듯하다. 남궁유린이 소리 지르자 팽지산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게졌다. "..."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잘근잘끈 씹더니 유성을 노려보다가 뒤돌아섰다. -유, 유린이 한번 편들어줬다고 기, 기고만장하지 마라. 원래 마, 마음이 여려 도, 동정한 것뿐이다. 그리고 다, 다시 내 눈에 띄면 주, 죽여 버릴 테니 처신 자, 잘해라. 한줄기 전음이 유성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기에 음성을 담아 상대의 귓가로 전달하는, 절정 고수만이 펼칠 수 있는 기예.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절정 고수가 된 지 얼마 안 된 팽지산은 전음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여 음성이 뚝뚝 끊겼다. '좀 모자란 녀석이었네.' 혼자 오해하고 혼자 상처 입고. 팽지산은 그렇게 추하게 떠나버렸다. "죄송해요, 의원님. 많이 놀라셨죠? 팽 소협이 제가 우는 모습을 보고 큰 오해를 했나 봐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언제 팽지산에게 쏘아 붙였냐는 듯 그녀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했다. "아닙니다. 남궁 소저가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아무튼 이야기는 끝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일이 있어서요." "아, 제가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꼭 그날만을 기다릴게요." "알겠습니다." 백 년 기재로 소문난 남궁유현. 남궁세가가 최종 보스가 아닌 한 그는 분명 도움이 될 사람이다. 유성도 꼭 치료하고 싶었다. 그렇게 남궁유린과 함께 서점을 나서는 유성 앞에 경신법을 펼쳐 달려온 한 여자가 멈춰 섰다. 즐겨입는 하얀 학사복이 흙먼지로 약간 더러워진 그녀는. "총군사님?" 유성의 무사함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수소문하고 다니던 제갈영영이었다. 제갈영영의 시선은 제일 먼저 유성의 온몸을 훑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간밤에 큰일이 있으셨다고 들었는데요."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총군사님께 배운 진법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휴, 다행이에요. 혹시 큰 충격을 받아 푹 쉬셔야 하거나 그런 상태신가요?" "전혀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건재한 유성을 보고 마음의 여유를 찾은 제갈영영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분은..." 얼굴은 모르지만 명가 출신으로 보이는 미녀. 그리고 사연있어 보이는 눈물 자국. "총군사님, 처음 인사드려요. 저는 남궁유린이라고 해요." 약간 앳되어 보이는 얼굴처럼 목소리마저 곱고 부드럽다. 무림맹 총군사가 되어 두통에 시달리던 그녀는 목소리가 약간 날카롭게 변했다는 평을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동안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나 왠지 모르게 오늘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거슬렸다.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움을 담아보았다. "그렇군요. 두 분은 함께 무슨 일이신가요?" 제갈영영의 시선이 남궁유린에게 향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약간 시선이 따갑다고 느낀 남궁유린은 남궁유현을 치료하기 전까지 남들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유성의 당부를 기억했다. "비밀 이야기라 총군사님께 말씀드릴 수 없는 점을 용서하세요." "..." 제갈영영의 시선이 이번에는 유성에게 향했다. '한서불침 특성이 고장 났나? 왜 오한이 드는 것 같지?' 유성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