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학관의 후기지수들은 3층으로 올라올 때부터 인원이 많았다. 유성은 처음 몇 명만 확인하고 곧 관심을 끊었기에 모두를 알 수 없었고, 차의원이 설명하던 중에도 절반은 등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을 알아보았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낙양 의방의 백의원이 아니라 백가장의 둘째로. 유성을 알아본 남자는 꽤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백가장에 있는 동안 스치듯 봤던 자이지만 곧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혹시 진가장의 자제분이십니까?" "맞다. 진영호다. 네 이름이 백... 이름이 뭐라고 했느냐?" "백유성입니다." "그래, 백유성. 네놈의 낯짝은 어째 여전하구나." 신경 써서 커스터마이징 한 덕에 빛나는 유성의 얼굴에 관한 언급이다. 그러나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빛에 재수 없다는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고, 입가에는 비웃음마저 보였다. 쓰게 웃은 유성이 대꾸할 말을 찾고 있을 때, 팽형이라 불렸던 자가 끼어들었다. 눈썹이 굵고 각진 턱으로 꽤 남자답게 생긴 자였다. "진형, 아는 사람이오?" 진영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유성에 대해 줄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기분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이었다. "아, 팽형. 저놈은 호남 백가장이라는 곳의 둘째였소. 물론 지금은 아니오. 전해 듣기로 가문에서 쫓겨났다더군요." 심기가 불편해 물었던 팽지산으로서 진영호의 말은 혹하는 것이었다. 가문에서 쫓겨났다니, 얼마나 자극적인가? 아마 자신이 무언가 사고를 치고 하북팽가에서 쫓겨났다면 아마 수치스러움에 죽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가문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호오, 어지간해서 가문에서 쫓겨날 일이 있나? 무슨 큰 죄라도 지었는지 궁금하군." 말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무림학관의 여자 동기들에게 향했다. 그녀들은 유성의 얼굴을 보고 연신 감탄하다가 유성이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소리를 듣고 의아해했다. '흥, 얼굴이 밥 먹여 주는 줄 아느냐.' 오늘은 팽지산이 절정 고수가 된 날이다. 이제 정파의 후기지수들 중에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경쟁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보다 일 년 빠르게 절정 고수가 된 후기지수가 있었다. 스물 둘에 절정 고수가 되어 팽지산의 질시를 받았던 녀석은 멍청하게 자객에게 암습당하고 말았다. '백 년기재라는 녀석이 그런 꼴이 되다니, 이제 당대의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이다.' 즉, 앞으로 자기 세상이라는 소리다. 서서히 영향력이 약해지더라도 적어도 오늘만큼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날. 그런데 그런 날 여자 동기들이 유성에게 관심을 쏟았으니 심사가 뒤틀렸다. 와중, 유성이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듣자 기분이 살짝 풀렸다. 진영호가 팽지산의 질문에 답했다. "내가 백가장의 후계자와 친우사이인데 글쎄 저놈이 형을 제치고 자기가 후계자가 될 욕심을 부렸고, 무리하게 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에 빠졌다지 뭐요? 무공을 잃고 나서 몇 년 전에 가문을 떠났다고 들었소." "백가장이라면 그래도 호남에서는 들어 본 적 있는 정파로 알고 있는데 안정적인 정파의 내공심법을 익히고 주화입마에 빠지다니 얼마나 형편없다는 말이오?" "뱁새가 황새 쫓아 가려다 가랑이 찣어진 격이지요." 별 볼일 없는 녀석이 아닌가? 팽지산의 기분이 완전히 풀렸다. 무공을 잃었다는 말 때문인지, 무림학관의 여자 동기들이 급격히 흥미를 잃는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팽지산의 시선이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향했다. 당연히 그녀도 마찬가지 일 거로 생각하며. '아니? 네가 왜...' 그런데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 유성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여자 동기들이 흥미를 잃은 것과는 달랐고, 팽지산은 다시 질투심이 타올랐다. 저 형편없는 녀석에게 완전히 관심을 끊게 만들고 싶어졌다. 경멸의 눈빛을 보내면 더 흡족할 것 같았다. "그런데 궁금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정파의 내공심법을 익혀 주화입마에 빠지려면 백에 한, 둘을 제외하고 최소한 절정 고수는 되어야 할 텐데, 혹시 저자가 욕심에 눈이 멀어 마공이라도 구해 익힌 것은 아니겠지?" 진영호가 멈칫했다. '마공이 갑자기 왜 나와? 나는 당연히 백에 한, 둘의 경우라고 생각했는데.' 진영호는 처음에 백유성을 조롱할 생각으로 이름을 모르는 척한 것이다. 의원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으나 호남 백가장의 백유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왜 아니겠나? 호남은 장강 이남에 위치하여 무림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는 곳이다. 절세 고수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중앙 무림의 관심을 받기 어려운 지역이고 수많은 중소문파들이 치고받고 다투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있는 작은 무가 백가장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무재가 튀어나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백가장주가 적자를 제치고 사생아인 유성에 대한 총애를 드러냈을 정도였다. 거기까지는 백가장주의 팔불출로 이해할 수 있으나 백유성은 성과로 보여 주었다. 거의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유성이 제대로 무공을 수련한지 고작 1년. 진영호는 친우이자 백유성의 형이 되는 백진성의 한탄을 듣고 유성의 무재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놈은 벌써 절정의 벽에 도달했다. 몇 년만 흘러도 얼마나 고수가 될지 모르는 일이지."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익힌 자신이 막 일류 무사가 되었거늘 벌써 절정의 벽에 도달했다니? 절정 고수로 향하는 벽에서 5년을 허비하더라도 유성의 나이는 스물 한 살이다. 전설로 내려오는 장삼봉 진인과 같은 나이에 절정 고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무재라면 5년이 걸릴 것 같지도 않았고. 백가장에 잘된 일이 아니냐는 말은 건네지 못했다. 백진성이 얼마나 유성을 싫어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진영호는 그런 무재를 가진 유성이 무리하여 마공을 익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팽지산이 원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어야 한다. 앞으로 무림의 대세로 떠오를 후기지수가 바로 그가 아닌가? "이런, 팽형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왜 마공을 고려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보자, 저 녀석은 이제 고작 스무 살이고 가문에서 쫓겨난 지도 몇 해 되었으니 당시에 절대 절정 고수였을리가 없소. 이는 과거 달마대사나 초대 천마, 장삼봉 진인도 이루지 못했을 거요.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과연 마공도 가능성이 높군. 팽형의 통찰력에 항상 감탄만 하게 되오." 비록 무림맹이 수많은 흑도 무림인들을 모두 통제하기 어렵다 해도, 마공을 익힌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손속을 보여준다. 만약 무림맹에 마공을 익힌 자가 있다고 신고한다면 무려 척마대가 출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림맹 최고의 무력집단 척마대.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로 화경의 고수가 될지도 모르는 척마대주 정립! 팽지산에 이어 진영호마저 마공의 가능성을 언급하자 대부분의 무림학관 후기지수들도 안색이 변했다. 서서히 유성을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크흠." 어느새 차의원은 유성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가차 없이 버리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하는 모습을 보며, 유성은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마공을 익히면 흔적이 남는다. 확인해 보면 금방 드러날 일. 어차피 난 거리낄 것 없지만 아무 인연도 없던 자들이 함부로 말하는 건 좀 짜증 나는구나. 차의원이야 어차피 오해였다는 걸 알면 다시 달라붙을 사람이고. 참 한결같구나.' 자신을 조롱할 목적인 진영호도 짜증 났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적의를 드러내는 팽지산 때문에 자존심도 상했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절정 고수가 된 시기로 따지면 한참 후배인 녀석이 기세등등한 모습이란. '날 곤란하게 할 작정이라면 어느 정도 성공하긴 했네.' 까딱 잘못하면 맥문을 내주어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확인이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그때, 유성의 눈에 어느새 3층으로 올라온 남자가 보였다. 그는 일행들과 함께였는데 유성이 잘 아는 자들도 몇 명 섞여 있었다. 바로 자신에게 진료를 받았던 환자들이다. 그가 다가오자 인기척을 느낀 후기지수들이 뒤를 돌아보다가 황급히 인사했다. 팽지산과 진영호도 예외가 아니었다. "헉,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남자는 그들에게 고개만 까딱여 대충 인사를 받았다. 마치 그들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성큼성큼 후기지수들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그가 유성 앞에 서서 팔을 활짝 벌렸다. "하하! 주루에서 백의원을 만나다니! 안 그래도 언제 꼭 한번 한잔 대접하고 싶었는데 잘 됐소! 나와 한잔 하시겠소?" 그의 커다란 손은 이제 유성의 양손을 덥썩 붙잡고 크게 흔들었다. 유성은 그의 과한 호들갑에서 자신을 도와주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자신과 친하다는 모습을 보여 유성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백호단주님, 감사합니다만 무림학관의 후기지수분들께서 제게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해서요. 이야기가 아직 안 끝난 듯 하여..." "어허, 그랬군." 백호단주가 몸을 돌렸다. 무리보다 한 발자국 앞에 나와 있던 팽지산과 진영호를 훑어보았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백호단주의 등장에 놀랐는지 몸이 살짝 굳어 있었다. "그래, 우리 백의원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번 말해 보게들." 팽지산은 형들이 여럿 있어 가문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다. 그의 꿈은 무림맹에 입맹하는 것이었고 백호단주는 미래의 상관이 될 수도 있는 자였다. 그런 자가 '한번 말해 보게들'이라고 하문했고, 팽지산에게는 꼭 '한번 지껄여 보아라'라고 들렸다. 팽지산은 얼른 진영호를 가리켰다. 백호단주가 3층으로 올라오면서 이전 대화의 일부를 들었을 것이다.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친구가 이야기 전달 과정에서 오해 살 발언을 하여 잠시 가능성을 따져 보았을 뿐입니다. 진형, 아무래도 마공일 리는 없지 않겠소? 다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데." "마, 마공이라뇨. 당연히 아니겠지요. 단지 여러 가능성들을 검토했을 뿐입니다. 제 생각에는 백에 한, 둘의 경우가 아닌가 하는데... 당연히 그렇겠지요. 아무튼 백...의원에게 더 이상 볼일이 없으니 편히 즐기십시오, 백호단주님." "흠, 그런가. 알겠네. 백의원, 이제 괜찮겠소?" 유성은 팽지산에게 팽당한 진영호가 당황하는 꼴이 우스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괜히 적으로 만들어 좋은 일은 없으니. "좋습니다. 한잔 하시지요." "하하, 오늘은 왠지 이 주루로 오고 싶더라니 내가 운이 참 좋소. 잠시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올 테니 기다려주시오." 백호단주는 그와 함께 온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려보냈다. "흠흠, 잘 해결되어 다행이네. 유성은 상황이 일단락 되자 어느새 바짝 옆에 붙어 있는 차의원을 흘겨보았다. 차의원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이다. 무림학관의 후기지수들은 백호단주에게 인사하고 황급히 주루를 빠져나갔다. 그들의 탁자에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음식들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