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마대주 정립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몸 상태가 완전히 낫기 전에는 아무에게나 몸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오직 그의 직속 상관 무림맹주에게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치료에 전념하라 당부했다. '몸 상태가 나날이 좋아지고 있고 백의원님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머지 않아 치료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목숨을 빚지게 된다. 그 은혜는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것이다. 아니, 지금도 이미 상당한 수명을 회복했으니 커다란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러던 와중, 치료를 위해 유성을 찾아간 날 정립은 유성의 진료실 안에 선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다. 우연히 예민한 청력으로 듣게 된 대화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솔직히 말해주게. 척마대주님의 치료가 잘되고 있는 게 맞는가? 물론 나는 자네를 믿지만 아까 조의원님이 다른 의원들에게 자네가 대주님을 치료할 수 있다고 속여 뭔가를 얻어내려는 속셈이라고 했단 말이네." "치료는 잘되고 있습니다. 두 달 안에 완치 가능합니다. 그리고 조의원님의 말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저와 척마대주님의 일인데요." "어허, 자네는 걸핏하면 자네 흉을 보고 다니는 조의원이 밉지도 않은가? 하인들도 자네와 조의원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다 알 정도인데." "저도 사람인지라 답답합니다만 저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무림맹 사람들과 친분이 깊은 조의원님과 드잡이질을 할 것도 아니고 별다른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러네만..." 정립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발걸음을 되돌렸다. "어, 어디 가십니까?" 하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향한 곳은 조의원의 진료실 앞이었다. 그는 원래 신중한 성격으로 남들의 말만 듣고 판단하는 것을 조심히 여겨 왔으나 유성이 직접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지 않은가? 그것으로 충분 했다. 조의원이 그의 은인 백유성을 음해한다는 소리를 듣고 참지 않을 이유로는. '백의원님은 이 의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당연히 오래전 여기서 일해온 조의원과 맞서기 쉽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충분한 힘이 있다.' 조의원의 진료실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하인이 기별을 했고, 놀란 조의원이 뛰어나왔다. "아니, 척마대주님이 웬일이십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안까지 들어갈 필요 없소. 나는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오." "그럼요. 편히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무슨 기대를 하는지 조의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아마 백유성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 그에게 돌아왔으리라 기대라도 한 것일까? 안 그래도 엄중한 경고를 하려 했던 정립은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유성에게 자신을 보낸 조의원의 가증스러움이 떠올랐다. 물론 그 덕분에 유성을 알게 되어 몸이 치료되고 있지만, 의도 자체가 불순했기에 조의원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조의원, 그대는 내가 그렇게 우습던가!" 초절정 고수가 서릿발 같은 기세를 흘려보내자 무공이 부실한 조의원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 그게 무슨 마, 말씀이십니까?"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소란에 놀라 그들을 보고 웅성거렸다. 평소의 정립이었다면 체면이 상할까 싶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은인의 근심거리를 해소해주고 싶었다. "그대의 정치질에 날 이용해 먹은 것을 그냥 넘어가 주었더니 이제는 백유성 의원님을 음해하고 다닌다지? 내가 그분께 속아 몸을 치료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품고 다닌다고?" "그, 그것이... 아,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조의원이 초절정 고수가 쏘아붙이는 기세에 큰 공포를 느끼면서도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당황한 상태로는 평생 흑도 무리들의 간교함을 상대해 온 정립에게 거짓을 숨길 수 없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거짓된 몸짓이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로 조의원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자 일말의 거리낌도 사라졌다. "또 그 간사한 혀로 거짓말을 늘어놓는구나. 날 치료할 실력이 없어 차도 살인을 하기 위해 백유성 의원님께 날 보내놓고 다른 의원들에게 내가 그분께 속아 멍청하게 치료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품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흐억...!" 그 정도로 과격한 언사를 한 적은 없으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립이 기세를 더 끌어올리자 조의원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옅은 회색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정립은 뒤를 돌아보았다. 일련의 상황으로 사람들은 척마대주와 조의원을 보고 수군거렸다. 조의원이 그럴 줄 몰랐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일부는 정립이 너무하다는 반응이었다. 은인을 위해 일반인과 드잡이질을 하는 것으로 약간의 체면이 깎였겠지만 그는 한 치의 후회도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나는 이런 별것도 아닌 상황을 여태 피해왔구나. 그깟 체면이 뭐라고 그리 중시했던지.' 저지르고 보니 은인의 곤란에 비할 바 없는 하찮은 일이었지 않은가? 그 순간 단전 어림이 꿈틀거렸다. 무언가 변화가 생기려 하는 것이다. '이럴 수가... 그렇게 노력해도 얻지 못했던 실마리가...!' 무인의 깨달음은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생사결에서 얻을 수도 있고 사소한 것에서 얻을 수도 있다. 천한 출신이었던 정립은 기연을 얻어 높은 성취를 얻은 후 척마대주라는 높은 자리까지 올랐다. 사람들이 그의 천한 출신을 흉볼까 우려되어 고수가 된 후로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체면을 중시해왔던 태도가 그의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었다. 은인의 답답함을 대신 해결해 줄 생각으로 나선 것이 애타게 찾아왔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다니 인생은 알 수 없다. 그는 곧 폐관에 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깨달음의 실마리가 선명할 때 잡아야 한다. 지금 시기를 놓치면 흐릿해져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번에는 경고로 넘어가지만 한 번만 더 그 간사한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면 다음에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게!"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죄송하다 사과하는 조의원을 싸늘하게 내려다본 후 정립은 황급히 유성을 찾아갔다. 그리고 치료 중단을 선언했다. 아직 조의원의 진료실 앞에서 일어난 일을 전달받지 못한 유성이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치료가 잘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지금 중단하면 서서히 다시 악화할 것입니다." "제가 너무 본론만 말했군요. 그런 뜻이 아니라 실마리를 얻은 듯 하여 폐관에 들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실마리라면... 깨달음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런 이유로 폐관에 들고자 합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성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조금 전에 엄청난 신성력 상승이 있어 어리둥절했는데 이런 경사가 있나. 만약 그가 화경의 고수가 된다면...!' "물론 그러셔야지요. 혹시라도 시간이 늦어진다면 다시 치료해 드릴 테니 얼마든지 도전하십시오!" 정립은 눈가가 촉촉해으나 내공을 통제해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는 감추지 못했다. "그대는 이미 내 은인입니다. 대성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주저 없이 의방을 떠난 정립은 다시 무림맹주에게 보고하고 폐관에 들었다. *** 유성은 뒤늦게 조의원과 척마대주의 일을 전해 들었다. '척마대주님이 나를 위해 나서 주었구나. 당분간 조의원은 자중하겠지. 그 일로 환자들이 많이 이탈했다고 하고 사람들 앞에서 오줌을 지리는 추태까지 보였다고 하니.' 사실 고소했다. 자신이 대단한 성인군자도 아니고 사사건건 성과를 시기하고 견제하던 조의원이 큰 망신을 당했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다만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것을 꾹 참은 것은 이럴 때일수록 자중해야 더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성의 생각은 이제 척마대주의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무엇이 그를 깨달음으로 이끌었는지 모르겠으나 부럽다. 난 언제쯤 단전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의 신성력이 버츄얼 판타지의 사제 시절보다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 단전을 회복할 수 있는 스킬까지는 멀었다. 게다가 무공을 익히는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 정론. 아무리 그가 무극지체라는 전설 속 신체를 타고났다 해도 너무 늦게 단전을 회복하면 근골이 다 굳어 고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고생은 최종 보스를 잡을 때 할지 모르는 고생이다. '내가 만든 캐릭터로 살아가고 있으니 게임 속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분명 최종 보스도 있을 테고 그를 물리쳐야 하겠지. 현실로 돌아가든, 아니면 이곳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든 모든 것은 최종 보스를 이겨 내야 얻어낼 수 있으니까.'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다. 하루하루 신성력을 쌓아 나가는 수밖에. "내일도 많은 사람이 모였으면 좋겠네." *** 낙양의방의 의원들은 돌아가면서 휴무일을 가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루어지는 진료는 꽤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고, 적절한 휴식을 취해주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수 없다. 체력을 타고났고 의료 행위가 곧 신성력으로 이어지는 유성은 쉬는 날마저 아까웠고, 휴무일도 쉬지 않았다. 유성의 휴무일. 그는 낙양의 빈민가로 향했다. 빈민가 사람들은 돈이 없다. 진료는커녕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일반인들 중에서는 많은 신성력을 올려주는 자들이다. '열악한 처지에 놓인 환자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다니는 의사들이 더 큰 존경과 감사함을 받는 법이지.' 처음에는 계산적인 이유로 시작했으나 요즘 유성은 그에게 치료받은 환자들이 전하는 감사함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백의원님, 이번에도 와주셨군요! 의방일 하시고 쉬시지도 못하고 매번 죄송해서 어떡한답니까?" 허름한 옷차림이지만 덩치가 좋은 사내가 백유성을 발견하고 얼른 다가와 옆에 섰다. 나름대로 호위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무공을 잃었어도 이류 무사 몇 명쯤은 가뿐한 유성이지만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사람들은 많이 모였습니까?" "아이고, 물론이지요, 의원님이 곧 오실거라고 다들 기대하고 있습니다." "얼른 갑시다." 사내의 안내받아 도착한 공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유성을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벌써 몇 차례 치료받은 환자도 있고 빈민가에 알음알음 퍼지는 소문을 듣고 처음 온 사람들도 있었다. 유성이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치료하던 중, 뒤에서 소란이 일더니 사람들이 한쪽으로 갈라섰다. 한 소년을 안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백 의원님! 여기 사람 좀 살려주십시오!" 유성이 보니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열 예닐곱 정도로 보이는 소년의 가슴에는 부러진 검이 박혀 있었고 옷은 피범벅이었다. 볼 것도 없이 심각한 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