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지산이 도왕의 상태를 전해 들은 것은 소식에 밝은 진영호로부터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팽지산보다 사교성이 좋아 여러 경로로 정보를 접한다. ‘어차피 진영호가 날 따르니 상관없겠지.’ 이미 부하 취급이다. 그가 전한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도왕이 습격을 당해 상태가 좋지 못하다! 무림맹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몸을 치료하러 의각으로 향했다더라! 천하에 누가 감히 도왕을 습격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상태가 좋지 못하다니? 팽지산은 마침 외부 임무가 없었다. 교육을 받던 중, 교관에게 양해를 구하고 의각으로 달려갔다. 의각주 백유성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더 중요한 건 아버지의 안위다. 그가 든든히 버티고 있기에 무림학관의 후기지수들도 자기 눈치를 봤지 않나? 지금은 자신도 절정 고수가 되었으나 도왕이라는 이름값에는 한참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물론,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도 크다. 의각에 도착한 그를 하인이 제지했다. 안으로 쳐들어가 직접 아버지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으나, 안에 경계 임무 수행 중인 남궁유린도 있는 걸 보고 점잖게 이야기만 전했다. 잠시 후. 아버지가 치료받고 편안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팽지산은 안도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실력은 좋나보군.’ 처음 전해 들은 것보다 아버지의 상태가 좋아 보인다. 약간의 허풍이 섞여 있더라도 유성의 의술이 못 봐줄 정도는 아닌 듯하다. “아버지! 몸은 괜찮으십니까?” “호들갑 떨거 없다. 치료는 잘되었으니 며칠 쉬면 잘 회복될 거다. 그나저나…” 도왕은 팽지산을 살폈다. 전에 봤을 때보다 기세가 날카로워졌고 자세가 바로잡혀 있다. “과연 절정의 벽을 넘었구나. 훌륭하다.” “소자 죽을힘을 다 했을 뿐입니다.” 팽지산은 흡족한 표정으로 절정 고수가 된 그를 치하하는 아버지 뒤로, 한 인영을 발견했다. 못마땅한 표정을 한 백유성이 멀뚱히 서 있다. 자신의 연적! (오해다.) 남궁유린을 두고 삼각관계에 있는 그를 보자 기분이 나빠졌다. 애써 시선을 돌렸다. 어린 시절, 한번 무언가에 꽂히면 분노를 참기 힘든 적이 많았으나 자기 나이도 이제 스물셋. 스스로 느끼기에 참을성도 늘었고 성숙해졌다. 지금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자신했다. 아버지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지산아, 여기는 나를 치료해준 백유성 의원이다. 앞으로 알아두면 큰 도움이 될 테니 인사하거라. 마침 서로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으니 친우처럼 지내면 좋겠구나.” 불쑥 반항심이 솟아오른 팽지산과 달리, 유성은 오늘 처음 본 도왕에게 팽지산과의 갈등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앞에서 아들을 욕하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여기서 팽지산과 데면데면하게라도 인사만 나누면 무난히 넘어갈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못합니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팽지산이 기어이 초를 쳤다. “뭐라?” 심기 불편한 도왕의 목소리. 평소 팽지산이라면 몸이 기억하는 공포에 움츠러들었겠지만, 남궁유린이 의각 안쪽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그녀를 두고 다투는 녀석에게 숙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그녀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흉볼게 아닌가? “저 자식이 유린을 울렸단 말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아무튼 전 못합니다!” 백유성 때문에 유린이 자신을 봐주지 않는 것 같다, 라는 말은 쉽게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그 행동이야말로 남자답지 못하다. 그냥 이대로 자신이 빠르게 초절정 고수가 되면 해결될 문제다. 그럼 남궁유린도 자기를 다른 눈으로 봐줄 거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조금 꾸지람 들을지라도 숙이지 않을 거다, 라고 팽지산은 생각했다. 다만. 팽지산이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녀가 눈물 흘린 일이 사람들 앞에서 폭로되자 속으로 팽지산을 욕하며 한숨을 내쉰 남궁유린의 마음을 고려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고. 도왕의 체면도 고려하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들이 도왕의 말을 거역한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유성에게 아들을 소개해 주려던 도왕은 오랜만에 주먹이 울었다. 허구한 날 사고 치던 아들놈에 대해 수년간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기에, 조금 성숙해진 줄 알았더니 아직도 철부지였다. 아무리 무력 부서에 비하면 손색이 큰 지원 부서라지만, 무림맹 입맹을 희망한다는 아들이 무림맹 각주중 하나와 공개적으로 대립각을 세울줄이야. ‘몇 년 전, 진주언가의 차녀와 혼인시키려 했을 때 면전에 대고 추녀라서 싫다고 떼쓰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심각한 일이 아닌가?’ 진주언가의 차녀도 하북에서 꽤 예쁘다고 소문 난 여자였다. 절대 추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 용봉지회에서 남궁유린을 보고 온 팽지산은 그때부터 눈이 한껏 높아졌다. 도왕이 만약 천하에 이름 높은 화경의 고수가 아니었고, 그 자리에서 팽지산을 따끔하게 혼내지 않았다면. 하북에 함께 연고를 두고 있는 팽가와 언가의 오랜 관계가 금 갔을지도 모른다. 진주언가의 차녀와 팽지산의 혼인 건은 금 간 수준이 아니라 산산조각 나긴 했으나 가문 사이의 유대가 깨지지는 않았다. 잠깐 남궁유린이라는 아이에게 흥미가 생겼지만, 일단 아들을 의각주에게 사과 시켜야 한다. 진료를 보기 위해 줄 서 있던 무사들이 많은 곳에서 사고를 쳤으니 수습이 필요하다. “이놈! 잔말 말고 의각주에게 사과하거라. 한낱 무림학관 생도 신분으로 어딜 무림맹 의각주에게 함부로 말하느냐?!” 대부분은 이렇게 호통 치면 아들은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팽지산은 유독 남궁유린 앞에서는 이성적인 판단하지 못하는 편이다. “어찌 사내 대장부가 되어 연적에게 숙이라는 말입니까? 저는 절대 못합니다!” 연적이라니! ‘내가 모르는 게 있나?’ 도왕의 시선이 백유성을 훑었다. 헛웃음 치고 있다. 이번에는 남궁유린에게 시선이 향했다.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오직 팽지산 혼자 씩씩대고 있다. ‘이 녀석이 혼자 오해한 게 아닌가?’ 아들의 성취를 칭찬하고 독려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사람을 만드는 게 우선인 듯하다. 오랜만에 매라도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무슨 일입니까, 도왕.” 등 뒤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도왕이 돌아본 곳에는 강렬한 안광이 인상적인, 호리호리한 체구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리단우. 백리세가라는 작은 무가에서 태어나 무림맹주의 자리까지 오른 화경의 고수다. 하지만 그 한미한 출신 때문에, 척마대에 대한 명령권 외에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물론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출신이 대단했다면 맹주로 선출될 일은 없었을 테지만. 그리고 실권이 없다는 것이지, 권위가 없다는 게 절대 아니다. 최소한 무림맹 내에서는 도왕보다 맹주의 끗발이 훨씬 센 법이다. 도왕은 얼른 포권했다. “맹주, 오랜만입니다.” “다쳐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와 보았는데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소란이 있군요.” 도왕은 얼른 손사래 쳤다. “아닙니다. 소란이라니요. 오랜만에 아들놈을 교육시키는 중입니다. 안 그래도 맹주님께 인사드리러 가려 했는데 여기까지 찾아오셨군요.” 맹주의 시선이 팽지산을 한번 훑었다. 백유성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다. “그랬군요. 도왕을 습격했다는 무리에 대해 묻고 싶은 것도 있어 겸사겸사 찾아왔습니다만, 아드님이 의각주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건…” 뭔가 곤란한 사정이 있는 모양. 맹주는 정립이 비공식 휴가를 떠나기 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유성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무림맹 내에서 자신에게 강력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정립의 부탁.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유성이 엮인 일이니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맹주가 은근히 압박하자 도왕의 얼굴이 붉어졌다. 팽지산은 여전히 유성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들놈 때문에 대신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자식을 잘못 키운 죄로 어쩔 수 없다. “아들놈이 의각주에게 뭔가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백의원도 미안하네.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너그럽게 용서해주게.” 팽지산은 언제나처럼 쥐어 패면 된다. 이제 백유성만 사과받아주면 잘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유성은 팽지산이 자신에게 혼자 오해하고 적대하는 꼴을 더 이상 봐주고 싶지 않았다. 바뀔 기회는 계속 있었으나 그는 한결같았다. 마침 판을 깔기 좋은 환경이다. “도왕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지요. 팽 소협과 제가 서로 합의하에 풀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오, 그래 주겠나? 둘이 원만하게 풀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지. 그럼 난 빠져 있겠네.” 유성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도왕이 밝게 웃으며 물러섰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을 테고.’ 유성은 팽지산을 똑바로 응시했다. “팽소협, 저번에 서점에서 제안하신 거, 아직 유효합니까?” 서점에서 제안한 것. 유성이 언급한 것이 뭔지 알아차린 팽지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공 없이 맨몸으로 겨뤄 지는 쪽이 유린을 깨끗이 포기하자는 거 말입니까?” 맹주 앞이라고 말투가 바뀌어있다. “...제 기억으로는 남궁소저에게 사과하라는 조건이었습니다만. 뭐, 어차피 서로 조건을 하나씩 걸어야 하니 그걸 원하시면 따르겠습니다. 사과하라고 하면 팽 소협이 시키는대로 사과도 하지요. 대신 제가 이기면 팽 소협이 제게 지금까지 한 무례들을 사과하고 팽가로 돌아가십시오. 그게 제 조건입니다. 응하시겠습니까?” 어차피 무림맹의 일부 사람들이 자기 출신과 과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이런 결정을 내리도록 도왔다. 적을 만들고 싶지 않은 유성이지만, 이미 적이 된 자는 제거하거나 멀리 치워 버려야 한다. 도왕을 겪어본 바, 생긴 것과 다르게 사리 분별 할 줄 아는 사람이니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다. 공평한, 아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성이 말도 안 되게 불리한 대결이니까. 유성은 이제 지켜줄 사람도 많고. “뭐라고요? 사과? 팽가로 돌아가?” 팽지산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콧김이 뿜어져 나온다. 유성은 한쪽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렸다. “왜, 자신 없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