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태로 제갈영영은 무림맹의 내부가 생각보다 허술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림맹, 그것도 군사부에서 군사 하나가 칼을 맞아 쓰러지다니. 충격적인 사건인 것이다. 태정헌의 말처럼 부군사가 간자일 확률이 있고, 정말 자객이 군사부까지 침투했을 확률도 있다. 억울해하던 태정헌의 눈빛을 떠올리면 부군사가 의심스러웠으나, 함부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법. 대신. 부군사의 품에서 발견된 보고서 두장을 보고 제갈영영은 군사부에 지시를 내렸다. 지금까지 부군사가 올린 보고서와 평군사들이 정리한 보고서를 대조해 보라고. 하루에도 수많은 보고서가 오가기에 군사부의 업무가 한동안 마비될 것도 각오했다. 하루가 지나도 자객이 발견되지 않아 부군사를 떠보러 방문했을 때, 일부러 태정헌이 깨어났다는 거짓 소식을 흘려보았다. 제갈영영은 부군사를 힐끗 살폈다. ‘저렇게 기뻐하다니, 정말 아닌가?’ 그러나 장단을 맞추기 위해 밖으로 나온 제갈영영에게 부하가 재차 말했다. “저, 말씀 하신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깨어나셨답니다.” “네? 진짜였다구요?” '백의원님이 당장 보유한 약은 더 없다고 하셨는데... 위중한 상처라 시간이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역시 대단해.' 그날, 부군사는 조사실에서 심문실로 이동되었다. 태정헌의 증언으로 붓으로 위장한 칼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엿새 전 바꿔치기 한 보고서까지 들통이 난 것이다. “아이고, 왜 그런 짓을…” 선임 고문 기술자 부량이 싱글벙글 웃으며 부군사를 맞이했다. 부군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고문에 버티는 훈련 따위는 받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의각주님 솜씨가 아주 좋으시지. 걸레짝을 만들어 놔도 그분만 다녀가시면 쌩쌩하게 살아난다니까? 이제 정식으로 무림맹 식구가 되셨으니 업무 협조 받기도 쉽고.” 태정헌을 살린 실력을 보면 정말 그럴 것 같다. 눈 앞이 깜깜해졌다. ‘지금이라도 다 털어놔야 하나? 그럼 내 가족들은 어쩌지?’ *** 태정헌은 퇴원하면서 유성이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허리를 넙죽넙죽 숙였다. “의각주님, 전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부모보다 먼저 가는 불효를 저지를 뻔했다. 목이 베인 순간에는 그 누구가 와도 자신을 살리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데 새로 온 의각주가 해낸 것이다. ‘처음 총군사님이 의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을 때 바쁜데 괜히 일거리만 늘어나겠다고 불평했던 내 자신이 원망스럽구나.’ 만약 그때 의각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의각주가 그날부터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너무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게 제 일인데요.” “아닙니다. 원래 업무도 다음날부터 였지 않습니까? 의각주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백호단주님이 항상 백의원님을 칭송하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비록 높은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전력으로 돕겠습니다!” 죽음까지 생각했던 환자를 치료해 주고 얻는 신성력은 짜릿했다. 유성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며칠 후. 태정헌은 사마세가에서 심은 간자의 수상함을 눈치챈 공을 인정받아 여러 선임들을 모두 제치고 공석이 된 부군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업무를 배정 받자마자 곧바로 의각으로 달려갔다. “의각주님. 제가 앞으로 의각의 지원을 맡게 되었으니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이 태정헌을 불러 주십시오!” “부군사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그건 원래 다른 분이 도와주시던 업무였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그런데 제가 직접 하겠다고 지원했습니다.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 안 그래도 신경 쓴다고 썼으나 의각은 처음 세워진 곳이다. 첫날 진료를 하며 낙양 의방의 체계에 비해 미진한 부분이 조금씩 눈에 띄고 있었는데 잘 됐다. 든든한 인맥이 생겼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전 부군사는 왜 그런 짓을 했던 겁니까? “크흑!” 태정헌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라도 아픈 듯이.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기밀이라 그건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 별생각 없이 물었던 유성은 당황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사마세가가 증발했다는 소문과 함께 부군사를 사주한 자들의 정체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 사마세가는 한때 황실에서 높은 관직까지 지낸 명문 가문이다. 그러나 약 백여 년 전, 모종의 일로 관직에서 쫓겨나 무림세가로 변신을 꾀했다. 그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사마세가에서 제갈세가를 밀어내고 무림맹의 총군사 자리까지 차지한 것이다. 약 백 년이 흐르고, 역사가 짧아 전통적인 무림세가인 오대세가에는 끼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사마세가를 여섯 번째로 두었다. 머지 않아 오대세가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아마 사마천이 아버지 사마병의 뒤를 이어 무림맹 총군사가 되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거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대로 제갈영영이 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고. 사마세가는 제갈영영을 끌어내리기 위해 무리해서 수작을 부렸다… “라고 청운 장로님이 의견을 내주셨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용림 장로님은?” “...” 모용림이 말없이 제갈영영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사돈인 사마세가에서 무림맹에 수작을 부리다가 걸렸으니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사마천, 그놈도 사라졌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사위가 아내와 자식도 팽개치고 사라졌다. 사마세가도 증발하듯 사라졌으니 이제 사돈과의 인연도 끝나버렸다. 제갈영영은 꼴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 자리에서 그를 더 몰아세우지는 않았다. 아직 논의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네요. 사마세가의 식솔만 해도 수백명인데, 그들이 모두 사라지기 까지 아무도 몰랐다니요.” 부군사가 사마병이 시킨 일이라고 자백한 후, 은퇴한 그를 데리러 무림맹 무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무사들이 하남의 북쪽에 있는 사마세가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텅 빈 장원과 당장 현금화가 불가능한 재산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개방과 하오문에서도 아무 낌새를 채지 못했기에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천하에 누가 있어 그 정도 되는 인원을 아무 흔적없이 증발 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한참을 논의 해 봐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안건은 개방과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 더 알아보는 것으로 넘기고. “다음은 무림맹에 더 있을지 모르는 간자에 대한 대책이에요.” 부군사는 며칠간은 고문에 버텼으나,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사마세가에서 그의 가족을 데리고 있으며 무림맹 군사부에 혼선을 주라고 지시한 점을 밝힌 것은 물론. 추가로 정체는 모르지만 무림맹에 간자들이 더 숨어 있다는 정보를 털어놓은 것이다. “아무래도 경계를 더 강화해야겠어요. 그리고 이번에 의각의 중요성도 확인되었죠. 예상보다 훨씬 이르지만 의각의 규모를 키웠으면 해요.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신가요?” “...” 반대를 일삼던 모용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고. “의각주의 신묘한 의술이 아니었더라면 이번에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했을 거요. 의각을 만들자고 했던 총군사의 혜안이 맞았소. 나는 의각의 규모를 늘리는 일도 찬성이오. 미리 늘려놓아야 제때 도움받을 수 있지 않겠소?” 제갈영영은 청운 장로에게 고마운 눈길을 보냈다. 다른 장로들도 저마다 의견을 냈다. 한때 모용림의 편을 들었던 장로들도 이번에는 제갈영영의 손을 들어 주었다. ‘사마세가의 일로 당분간은 조용하겠네.’ 모용림 장로는 이번 혐의를 벗어났으나 한때 사마세가를 열심히 밀었던 죄로 회의 내내 침묵만 지켰다. *** “하하핫! 반갑네, 백의원. 이제 의각주라 불러드려야겠지?” “백호단주님이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백호단주가 유성을 찾아왔다. 그와도 꽤 가까워져 말을 편하게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인사나 하러 들렀네. 이번에 무림맹의 경계를 강화하면서 의각에 내 부하들도 배치할 예정이지. 다들 괜찮은 애들이지만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귀띔해주게.” 의각 뿐 아니라 다른 곳들에도 무림맹 무사들이 추가로 배치될 예정이다. “듣긴 했지만 안 그래도 외부 임무가 많을 텐데 경계까지 늘릴 인원이 됩니까?” 유성은 의각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다 주는 장칠 덕분에 무림맹 돌아가는 사정을 좀 알게 되었다. 주요 문파나 세가의 정예들은 만만치 않은 세를 보유한 흑도 무리로부터 본거지를 지키는데 큰 힘을 쏟고 있다. 그래서 무림맹 경계 인원들을 늘리는 것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고 알고 있는데. 그 부분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나 봤더니. “그 부분은 신분이 확실한 무림학관 후기지수들의 지원을 받아 해결할 생각일세. 나중에 무림맹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후기지수들 일부를 임무에 투입시키는 식이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무림학관은 후기지수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곳이 아닙니까?” “이것도 일종의 교육이네. 어차피 그들도 무인이고, 미리 경험 쌓는다고 봐야지. 어디까지나 지원자만 받아서 간단한 임무부터 대동하여 서서히 경험을 쌓게 하겠다는 총군사님의 의견이라더군. 나는 개인적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네.” 백호단주가 요즘 애들은 너무 귀하게 자랐다느니, 어쩌고 꼰대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유성은 제갈영영이 의견 냈다는 무림학관 후기지수 지원자 이야기를 듣고 인턴쉽 제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의각주가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이번에 정헌도 살려주었다면서. 전에는 내가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듣던 친구가 어제 술자리에서 자네 이야기만 해대는 통에 서운할 지경이었네.” 백호단주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빼앗겼다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래도 제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크게 다치면 소용없으니 항상 몸조심 하십시오.” “물론이지. 그 정도는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아, 자네 남궁유린과 개인적인 친분이라도 있나?" “네?” "무림맹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였는데, 이번에 의각 경계 임무에 혼자 지원했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