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서 곧바로 정연이 깨어나 주지 않았다면 조금 귀찮게 될 뻔했다. 며칠 후에 깨어난다면 방혁이 그 사이 어떤 수작을 부렸을지. 다행히 치료 직후 정연이 깨어나 주었다. 정체불명의 독과 치매 증상이 무언가 작용을 하고 있었나보다. ‘하오문주가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치매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손상된 건 아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지켜보자. 몸 상태부터 살피고.’ 정연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사부님!!” 방혁이 쏜살같이 정연에게 달려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저는 사부님이 잘못되시는 줄 알고…!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백의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방혁은 사부를 극진히 모시는 제자라고 생각할 거다. “….”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유성이 할 말을 잃었다. 그의 간사한 행동이 꼭 누군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차의원님이 저 정도는 아니야.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니까.’ 차의원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사부를 독살하려는 사람과 그저 작은 성공을 위해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비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새 정연은 장로들과 방혁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정연은 장로들과 방혁이 던지는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성은 장로들 사이를 지나 정연에게 다가 갔다. “잠시 문주님을 살펴야하니 비켜 주십시오.” “어, 어, 그렇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백의원님!” 끝까지 연기를 지속하는 방혁을 차갑게 내려다본 후 정연을 진맥했다. 마비되어 있을 때와 달리 맥이 활발하게 뛰고 있다. 해독 스킬을 발동시켜도 아무 변화가 없다. ‘독도 다 해결되었고 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다.’ 그때. 맥을 짚고 있는 유성의 손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이 있었다. 정연이다. 그녀의 눈빛에 고마움이 한가득 담겨 있다. “혹시 말을 하기 힘드신 상황이십니까?” 부드럽게 가로저어지는 고개. “아니요.” “아, 다행이네요. 말씀을 안하셔서 걱정했습니다. 다른 불편하신 점은 없으시고요?” “전혀요. 머릿속에 안개가 걷힌 기분이에요. 중독되기 전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역시 백의원님의 명성은 듣던 대로네요. 제가 참 복이 많아요.” 유성은 대화 중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중독? 그녀가 몸 상태를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신을 잃으시기 전에 누가 독을 썼는지 보신 겁니까?” 정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방안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 정립의 얼굴을 발견하고 잠시 놀라는 듯했으나 이내 장로들과 방혁, 그리고 방문 앞에 서 있는 하인에게도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방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가 중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어제였어요.” “네? 어제라면….” 유성이 알기로 정연은 며칠 전 그가 방문했을 때 쓰러진 이후로 정신을 차린 적이 없다. 그 의미는. 몇몇 사람들의 의아하다는 시선과 무언가를 눈치챈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정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지만 듣는 건 가능했어요. 어제 진실을 알고 얼마나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는지 몰라요.” 유성은 옆에 주저앉아 있던 방혁의 수상함을 눈치챘다. 그가 전력으로 뒤로 몸을 날린 것이다. 하지만. 유성이 눈치챈 움직임을 정립이 놓칠 리 없다. 척— 정립이 가볍게 손을 뻗자 방혁은 몸을 날리던 그대로 뒤로 나뒹굴었다. 방문을 지키던 하인도 문밖으로 도망을 시도했으나 다른 장로에게 제압되어 끌려왔다. 정연이 깨어나 기쁨에 가득 차 있던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제 모두 알아차렸다. 방혁이 바로 이 일을 꾸몄다는 사실을. 정연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한때 널 아들처럼 예뻐했는데 네가 나에게 악독한 수까지 쓸 줄은 몰랐구나.” 방혁은 이 독을 얻고 이미 몇 명의 사람들에게 시험해 보았다. 그들은 모두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이 몸이 마비된 채로 다 듣고 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는 의미다.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더니 그냥 죽기 전까지 정신은 차리고 있는 독이라고?’ 어제 이 방에 몰래 들러 하인과 독 이야기한 것이 떠올랐다. 정연은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다. ‘어제 내가 정확히 뭐라고 했더라…?’ 필사적으로 하인과 나눈 대화를 떠올린 방혁은 도망칠 수 없게 되자 정연에게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다만 그 와중에서도 살기 위해 거짓을 섞었다. “사부님! 저는…, 용서해주십시오! 별로 위험한 독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푹 주무시게 만들고 그 사이 문주가 되고 싶은 욕심에 그만…!” “그래? 네 하인은 다른 소리를 하던데?” 방혁의 고개가 제압되어 있던 하인에게 휙— 돌아갔다. 하인의 눈이 더할 나위없이 커진 것을 본 그의 선택은 꼬리 자르기였다. “아닙니다! 저놈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였는지 모르겠지만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저, 저는 그냥 방혁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하인 역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조사해 보면 알겠지.” 정연이 장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방혁과 하인을 심문실로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 방혁은 하오문에 대해 거의 모든 부분을 알았고, 심문실이 어떤 곳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무림맹의 악명만큼은 아니지만 심문실에 끌려간 자들의 대부분은 멀쩡하게 걸어나오지 못한다. “사부님!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저를 아들처럼 여기셨다면서요!” 정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어찌 계속 진짜 아들처럼 여길 수 있겠느냐. 다만 내가 모질지 못해 하마터면 소옥까지 잘못될 뻔했구나. 내 잘못이다.” 정에 호소하는 것도 먹히지 않자, 방혁은 사람들에게 끌려가며 유성을 노려보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아니었다면 억울한 피해자들이 생겼겠지. 넌 억울한 사람이 아니니 다행이다.” “뭐?” “잘 가라.” 끌려가는 방혁의 뒷모습을 정연이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명령을 거두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그녀 역시 정사지간 문파인 하오문을 이끄는 수장인 것이다. 이미 이를 드러낸 상대를 용서하지 않았다. ‘앞으로 다시 볼일 없겠네.’ 그리 생각하는 유성을 정연이 부드럽게 불렀다. “백의원님,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릴게요. 덕분에 저와 소옥이 무사할 수 있었어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어요.” “아닙니다. 기녀들을 생각하시는 문주님의 마음씨 덕분입니다. 그 일로 인연이 생기지 않았다면 저는 정연님을 알지도 못했을 겁니다.” “기녀들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한 건 사실 소옥이 낸 의견이었어요. 저는 얼굴만 빌려 주었지요.” “아, 그랬군요. 참, 그리고 소옥님의 마부가 찾아와 알려주지 않았다면 문주님과 소옥님께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분에게도 상을 주셔야 할 겁니다.” “물론이에요. 잠시 처리할 중요한 일이 있으니 기다려주시겠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유성과 정립은 하오문도의 안내받아 다른 곳에서 정연을 기다렸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립님이 없었다면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낭인은 맡은 의뢰에 최선을 다하는 법입니다.” “아 참, 고용비를 드려야지요. 제가 모아 놓은 돈이 꽤 있습니다만 화경의 고수를 고용할 만큼 넉넉하진 않으니 조금 깎아주시지요.” “필요 없습니다. 그냥 저랑 한잔 하시지요. 그거면 족합니다.” 한 잔 하자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유성도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유성이 살수 오자성의 현상금을 받았어도 화경의 고수 몸값을 감당하기 힘들다. 파산을 피하려면 할 수 없는 법. 잠시 후. 두 사람이 나타났다. “백의원님!” 정연이 활짝 웃는 소옥을 대동한 채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별일 없었어요. 다 백의원님 덕분이에요. 그런데 며칠 안 봤다고 너무 반갑네요.” 진심이다. 소옥은 조금 전까지 절망에 물들어 있었다. 사형의 경쟁자인 자신은 물론 어머니와 같은 정연의 목숨마저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 마혈이 짚혀 제압당했으니 누군가 구해주기 전에는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 좋은 생각만 자꾸 들었다. 머지 않아 사부를 죽인 죄로 심문실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최악의 경우마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데 극적으로 상황이 반전되었다. ‘백의원님이 우리를 구해주러 오셨다고? 의원분이 어떻게?’ 소옥도 당연히 무림맹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정연을 만나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유성의 능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척마대주님을 탈맹시키고 호위로 고용해 정당하게 치료 기회를 요구하시다니, 그 인맥과 판단력이 정말 대단해. 그리고 사부님의 독을 알아보고 해독하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 없었을 텐데 의술마저 뛰어나시구나.’ 유성과 대화하다가 소옥은 한 번 더 놀랐다. “그 사이에 치매라는 병까지 치료하셨단 말입니까?” “안타깝게도 문주님의 일부 기억이 소실 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제 실력이 더 늘어나면 나머지 부분도 치료해 보겠습니다.” “백의원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정말…,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하오문을 찾아주세요.” 소옥이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신성력이 차오른다. 그리고 소옥의 심복이 한 말에 의하면 하오문도들이 전하는 마음도 남아 있을 테니 끝이 아니다.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유성이 흐뭇하게 웃는데, 정연이 소옥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백의원님, 소옥의 말은 빈말이 아니에요. 일문의 문주가 빈말을 뱉어서야 되겠습니까?” “일문의 문주라니요?” 하오문이 하위 문파라도 세웠단 말인가? 정연의 말에 곧 의문이 풀렸다. “저는 진작 방혁의 성정을 눈치챘음에도 정 때문에 그 녀석을 방치하다가 위험을 자초했어요. 판단력이 많이 흐트러졌어요. 안 그래도 소옥에게 문파를 물려주려 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문주 자리에서 물려나신단 말입니까?" "사실 아까 자리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몇 가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요. 백의원님께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요양을 해야겠어요." “그럼….” “이제 취임식만 치르면 소옥이 하오문의 문주랍니다.”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라는 게 문주 자리를 넘겨주는 거였어? 이제 하오문의 새로운 문주가 될 소옥이 언제든지 찾아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