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험은 무림맹에서 처음으로 치러지는 회차로, 기출 문제가 없다. 낙양 의방 시험에서는 흐름이라도 유추해 볼 수 있던 것에 반해 완전 백지상태. 유성은 시험지를 받아들고 빠르게 흝어보았다. 먼저 훑어보면서 난이도를 파악해 적절히 시간을 분배하는 기술은 나름 유효한 전략이다. '문제의 대부분이 무림인들의 내, 외상의 치료에 치중되어 있어.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아. 그런데 평생 한, 두 번 보기 힘든 희귀병들에 대해 묻는 문제들도 섞여 있다. 이게 변별력 확보용 문제인가? 전혀 실용적이지 않아 보이는데 도대체 누가 이런 식으로 낸 거지?' 유성은 그 문항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는 질병도 있었으나 치료법을 전혀 모르는 질병이 몇 개 섞여 있다. 문제로 출제된 것을 보면 당연히 중원 의술에 존재하는 것들일 텐데, 아마 역사 깊은 의가들에 문의하여 얻은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럼 당연히 양의원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겠는데?' 유성은 눈만 살짝 옆으로 돌려 양의원의 기색을 살폈다. 칸막이가 잘 쳐져 있기에 어차피 옆 사람의 시험지를 훔쳐볼 수 없는 구조. 유성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한숨을 내쉬며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많았다. 양의원이 자신만만하게 문제를 풀고 있으리라 생각한 유성은. "..." 괴상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머리를 쥐어뜯는 양의원을 발견했다. '이상하네. 왜 괴로워하는 거지? 어려운 문제가 많나?' 비슷한 조건이라면 해볼 만 하다. 유성은 시험지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문제들을 확실하게 풀어둔 후 모르는 질병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 명칭은 다르지만 현실 세계에 있는 질병과 유사한 것도 있으니 치료법을 유추해낼 수 있기를 바라며. 필기와 실기의 비중이 반반씩 매겨져 있어서 문제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유성은 곧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 흔히 양의원으로 불리는 양지헌은 스승님인 의선을 존경했다. 의선은 어릴 적 마을에 돈 전염병으로 고아가 된 그를 거둬주었고 약간의 무공과 함께 의술도 전수해 주었다. 그의 목표는 스승님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명성을 얻는 것. 감히 하늘 같은 스승님을 뛰어넘겠다는 포부는 없었다. 나중에 스승님이 일선에서 물러나시면 의선문의 문주가 되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그런 목표를 가지고, 스승님의 품을 떠나 낙양 의방에서 생활할 때도 가급적 다른 곳에 관심 가지지 않고 의술에만 정진했다. 그런데. 의방에 들어온 젊은 의원 백유성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진료 첫날부터 놀라운 활약을 하더니 그는 무서운 기세로 단골 환자들을 늘려 나갔다. 양의원도 치료할 수 없는 환자 몇을 훌륭하게 치료해내기도 했다. 의술이란 워낙 방대하고 유성만의 비법이 있을 수 있기에 애써 수긍하고 넘어갔는데. 조의원과 얽힌 일이 끝났을 때, 유성은 어느새 자기 명성까지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주변의 평가가 심상치 않아 양의원도 내심 백유성의 실력이 궁금하던 차였다. 마침 무림맹 의각 의원을 뽑는 시험이 열렸다. 가장 뛰어난 의원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 양의원이 원하던 명예로운 자리였고 백유성도 시험에 참가했다. '의술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쉽지 않다지만 이렇게 시험의 형식으로라도 누가 더 뛰어난 의원인지 가려볼 수 있겠다.' 이제 정정당당히 실력만 겨루면 된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양의원도 시험지를 받자마자 끝까지 한번 훑어보았다. 유성과 같은 전략이다. 그리고 난이도 높은 희귀병에 관한 문제들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며칠 전, 한 환자가 우연히 구했다고 양의원에게 건네준 책자가 있었다. 스승님도 병명만 알고 있거나 병명도 모르는 질병들에 대한 치료법이 적혀 있으니 귀한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여러 의가에서 가진 비법들을 모아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수준 높은 치료법들. 의술의 길을 걷는 자로서 새로운 의학 지식을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기뻤다. 그는 책자를 보고 열심히 연구했고 나름의 성과도 얻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 문제들이 토씨만 조금씩 바꿔 무림맹 의각 의원을 뽑는 시험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 이대로 시험을 치렀다가는 부정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꼴이다. 반면 그 문제들을 애써 무시한다면 스승님의 명예를 드높이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최근 평판에 의하면 백의원에 비해 내가 더 강점을 가지는 부분은 필기 뿐이다. 저 문제들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문제 난이도는 낙양 의방 시험과 비슷한 수준이라 백의원도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거다.' 그 말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초대 무림맹 의각주의 자리가 결정될지 모른다는 의미. 양의원은 깊은 번뇌에 빠졌다. *** 제갈영영은 익숙하게 보고서들을 처리하면서 창밖 멀리 시선을 던졌다. 지금 한참 의각 의원을 뽑는 시험이 치러지는 장소로. 뛰어난 시력으로도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여 분위기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백 의원님은 잘하고 계시겠지?' 그녀는 내심 유성이 걱정되었다. 그의 실력을 믿으면서도 불안 요소가 있었다. 무림맹 의각 시험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모용림 장로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무림맹의 무사들을 위한 의원을 뽑는 자리요. 최고의 의원을 선발해야 마땅하니 최대한 어려운 난이도로 출제 해야 하오." 이치에 맞는 말이다. "실기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 뽑히는 의원은 나중에 의각의 각주가 될지도 모르는 자요. 밑에 여러 의원들을 거느리게 될 텐데 실기도 중요하지만 의술에 넓고 깊은 지식이 필요한 자리기도 하오. 필기 비중도 절대 무시할 수 없으니 필기와 실기 비율을 반반으로 합시다." 역시 이치에 어긋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제갈영영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는 논리. 그런데. '하필 그 의견을 낸 사람이 모용림 장로라는 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공교롭게도 문제 출제를 맡게 된 자도 평소 모용림 장로와 친분이 깊다. 사실, 선출직인 무림맹주를 제외하면 모용림은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모용림 장로가 치졸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걱정 안 할 텐데, 괜히 사람 의심하게 만들고 있어.' 툴툴거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무림맹 내를 거닐면서 심난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발걸음이 여러 전각을 지나 암각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서둘러!" 암각에서 갑자기 세 무사가 뛰쳐나왔다. 한 명은 등에 축 늘어진 사람을 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길을 열 생각인지 앞장서서 달려가는 중이다. 업힌 사람의 팔다리가 축 늘어져 있고 얼굴이 시커먼 것이 언뜻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제갈영영이 얼른 경공을 펼쳐 세 사람을 따라잡았다. "무슨 일인가요?" "총군사님! 제 동료가 중독됐습니다! 낙양 의방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암각은 여러 첩보 활동을 펼치는 곳으로, 첩자들의 정체가 발각되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많았다. 이번에도 무언가 일이 생긴 듯한데, 제갈영영이 생각하기에 낙양 의방으로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금 그곳은 거리도 조금 떨어져 있고 대단한 실력자도 없다. "그쪽은 가도 소용없어요! 의각쪽으로 가야 해요. 따라오세요!" 제갈영영이 아는 한 낙양 의방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의원과 두 번째로 실력이 좋은 의원은 의각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다. "자, 잠시-" 무언가 말하려던 암각의 무사들이 제갈영영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그들이 의각에 도달했을 때는 마침 필기에 이어 실기 시험까지 끝난 후였다. "자 모두 수고하셨소. 채점이 마무리되면 곧바로 결과를 발표할 테니 잠시만 대기해주시오!" 실기 시험이 모두 끝난 후. 유성은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유성이 기대한 실기 시험은 환자를 데려다가 실제로 치료하는 것. 그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다. 그러나 실제로 진행된 실기 시험 방식은 전혀 달랐다. '모의로 환자의 질병을 설정하고 문진을 통해 진단하고 치료과정을 설명하는 시험이라니?' 그런 상황에서 치유 스킬로 후유증 없이 환자를 치료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아쉽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진단법과 치료법을 적용할 수밖에. '이거 보통이 아닌데.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누가 나를 저격이라도 한 것 같다. 내 강점을 하나도 발휘할 수 없는 구조였어. 다행히 실기에서 틀린 건 없지만 필기에서 승부가 나겠다.' 양의원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밝았기에 유성은 더 불안했다. 다음 시험을 노린다는 차선책도 있지만 제갈영영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실망했어요'라고 하면... '마음 아플 거 같은데.' *** 암각의 무사는 제갈영영이 이쪽으로 오자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동료의 상태가 심각해 모든 상황을 살피지 못했다. 평소처럼 의방 쪽으로 동료를 데려갔다면 그의 목표인 양의원을 만나지 못할 뻔했다. "양의원님! 여기 계셨군요! 제 동료를 좀 봐주십시오! 독에 중독되어 의식이 없습니다!" 등에 업힌 사람을 포함해 총 네 사람이 등장하자 가만히 앉아서 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의원들이 모두 웅성거렸다. 호명된 양의원이 얼른 뛰어나갔다. "그대들은! 일단 봅시다!" 양의원은 평소 자신을 자주 찾아왔던 무사의 등에 업힌 사람을 바닥에 눕혔다. 얼굴이 시커멓고 굵은 핏줄이 여기저기 징그럽게 튀어나온 모습이 영락없이 독에 중독된 모습이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들은 게 있소?" "모릅니다. 이 친구가 맹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을 잃어 아무것도 듣지 못한 상태입니다. 얼른 데려와 가지고 있던 범용 해독제를 먹였으나 효과가 없었습니다. 꼭 좀 살려주십시오!" "일단 좀 보겠소." 양의원이 항상 들고 다니던 보따리를 풀어 무언가 주섬주섬 꺼냈다. "나도 좀 봅시다! 독은 내 전문 분야요!" 수많은 의원이 모인 곳. 독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서서 환자를 둘러쌌다. 그러나 그들도 중독된 무사의 상태를 보고 뚜렷한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 원래 독이라는 것이 중독시키기는 쉬워도 어떤 종류의 독에 중독되었는지 알지 못하면 해독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혹시 해독법을 알아 내도 그에 맞는 약재가 없다면 손 쓸 방법도 없고. "난 짐을 다 두고 와서... 내 비장의 해독약만 있었어도 이까짓 독 쯤은..." "자네는 그 허세 좀 고치게." 유성도 가까이 다가가서 살피려 했으나 둥글게 둘러싼 인파에 가로막혔다. "무슨 일인가?!" 무림맹 장로들이 달려왔다. 제갈영영과 암각의 무사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무림맹 내부를 휘젓고 달려왔기에 높은 사람들에게도 보고가 올라갔다. 암각의 무사 하나가 얼른 달려가서 보고했다. "제 동료가 독에 당했습니다. 마침 이곳에 의원님들이 많아 도움을 부탁드리던 중입니다." "아니, 무림맹 무사가 맹 인근에서 독에 당했단 말인가? 대체 어떤 놈들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어떤가, 해독할 수 있겠나?" 암각의 무사가 장로들과 이야기하는 사이. 제갈영영은 혼란한 상황에서도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의원을 찾았다. "백의원님, 도와주세요." "네, 저도 좀 보겠습니다." "모두 비켜 주세요! 백의원님 지나가실게요!" 앞장서서 길을 뚫어 주었다. "백의원이라면..." "요즘 제일 유명한 의원이 아닌가? 자신 없으면 얼른 비키게!" 인파가 갈라지고 백유성이 그 사이로 걸어갔다. 양의원이 이 약물, 저 약물을 무사에게 먹여 보고 있었으나 특별한 차도가 없다. '전에 살수가 독단을 깨물었을 때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