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의 심문실은 악명이 자자하다. 흉악한 마두도 그 안에 들어갔다가 며칠만 지나면 제발 살려달라고 빌면서 아는 바를 모조리 털어놓는다. 동료 고문 기술자가 먼저 살수를 심문하러 들어간 후, 다른 고문 기술자 부령은 나중에 동료와 교대를 해야 하니 의자에 기대어 푹 쉬고 있었다. 기술자끼리 교대하며 대상을 한숨도 재우지 않고 고문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하면 미칠 듯 괴롭기 때문이다. 안에 있는 자는 살수로 의심되는 바, 고문에 대비한 훈련도 받았을 수 있다. 꽤 장기전이 될 수 있어 휴식을 취하던 중. 누군가 다급하게 그를 찾아왔다. '또 누군가 잡혀 왔나?' 문을 열어 준 부량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평소와 달리 옷이 살짝 흐트러진 미녀가 질문을 쏟아 낸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난밤에 백유성 의원님 댁을 침입한 살수가 안에 있다고요?!" 아침에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제갈영영이었다. "엇, 총군사님이 여기까지 어떻게... 네, 개방에서 넘겨준 자입니다. 지금 심문중에 있습니다." "백의원님은, 무사하신가요?!" 제갈영영이 초조함이 깃든 표정으로 물어오자 부량은 아는 대로 이야기했다. "살행에 실패한 놈이라고 넘겨받았으니 암살 대상의 목숨에는 지장 없는 모양입니다." "다친 곳은요?!" "그것까지는 저도 잘... 뭐 조금 놀라셨을 수 있지만 며칠 푹 쉬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 안 돼...!" 제갈영영은 오늘 유성의 휴무로 그의 무사함을 확인하지 못했다. '정말 살수였다니! 내가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설마 많이 다치신 건 아니겠지?' 오자성이 살행을 위해 담을 넘은 시각은 새벽. 미리 살행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평범한 사이로는 옆에 있기 힘든 시간이었다. 다시 경신법을 펼쳐 뒤돌아 달려가는 그녀를 부량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 심문실을 찾아온 다음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헉,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과거 살문이 멸문하며 살수들이 대거 잡혀 왔을 때조차 얼굴 한번 비추지 않은 자였다. 너무 많은 일거리에 그의 부대에서 심문을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전혀 관심조차 가지지 않던, 이제는 화경의 경지에 오른 척마대주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이 살수놈이 도대체 누구 목숨을 노린 거란 말인가!' 부량은 바짝 긴장했다. 마두가 척마대로 끌려가면 심문실보다 더 심하게 훼손된 형체로 죽어 나온다고 들었다. 흠 잡힐 수는 없었다. "수고가 많네. 살행에 실패한 살수를 심문중이라지? 배후는 알아냈나?" "아, 아직 입니다. 조금 전에 인도 받아 막 시작한 참입니다." "그렇군. 배후가 나오면 꼭 내게 알려주게. 그리고 살수놈은 가급적 숨을 붙여 척마대로 넘겨주면 좋겠군." 척마대주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살기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부량은 오금이 저려왔다. "반드시 숨을 붙여 놓겠습니다!" 정립이 돌아간 후 부량이 잠시 숨을 돌렸다. '척마대주님이 살수에게 원한이 깊으신가 보군. 심문하여 정보만 캐낸 후 목숨을 붙여 인도해야겠다.' 쿵쾅대는 소리에 부량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또 누가 찾아온단 말인가? 심문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온 적이 거의 드물거늘...' 다음으로 찾아온 자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나타난 중년인이었다. "이런 찢어 죽일 놈이 있나!" 그는 몹시 흥분한 모양이었는데 막 심문실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단주님도 오셨군요." "내 이놈을 그냥!" 칼을 뽑아 들고 심문실의 문을 잡아당기려는 그를 부량이 필사적으로 막았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백호단주님! 지금 배후를 밝히는 중입니다!" 다행히 부량의 만류에 그는 이성을 되찾았다. "요즘 의원님 덕에 좀 살 만해졌더니 어디서 이런 살수 나부랭이가 나타나서는!" 씩씩거리던 백호단주가 흥분을 살짝 가라앉히고 말했다. "배후가 밝혀지면 내게 꼭 말하게. 혹시 맹에서 나서지 않는다면 내 친구들이라도 불러 가만두지 않을 테니.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일단은 돌아가시지요, 단주님." "에잇, 오늘은 기분도 별론데 술이나 한잔 해야겠군." 참고로 백호단주는 어제도 술친구들과 거나하게 술판을 벌였다. 그 후로도 부량은 숨 돌릴 틈 없이 찾아오는 여러 무림맹 인사들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모두 유성에게 신세를 진 적 있는 자들이었다. '그 의원 인맥이 보통이 아니구나!' *** 같은 시각, 유성은 휴무일을 맞이하여 낙양에서 제일 큰 서점으로 향했다. 천하의 대도시 중 하나인 낙양은 기본적인 서책부터 진귀한 서책들이 거쳐 가는 곳이다. 많은 사람이 서점에 와서 원하는 책을 사가고는 했다. 유성도 같은 의도였다. 빈민가에 가서 환자들을 치료해주기 전, 새로운 의서가 나왔는지 보고 구입할 생각이다. 며칠 전, 무림맹에서 '의각'의 의원을 한 명 뽑겠다고 공표했다. 직위는 임시 각주. 상황을 봐서 아래에 의원들을 더 뽑으면 정식 각주가 될 수도 있다. 명성을 얻고 싶거나 큰돈을 벌고 싶은 의원들이 앞다투어 관심을 보이는 자리다. 대단한 명성을 얻은 의선이 굳이 찾아오지는 않겠으나 다른 의원들은 얼마든지 명성을 노리고 그 자리를 노릴 수 있다. 당장 낙양 의방만 해도 양의원이 의각 시험을 본다고 선언한 상태. 유성도 시험에 대비해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모든 시험이 실기로만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낙양 의방에 들어올 때도 그랬고 필기와 실기 점수를 함께 매긴다. 유성은 이론만큼은 양의원에게 절대 앞선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기본 의서들을 통해 의술을 익혔기에 의가에 내려오는 더 좋은 처방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새로운 의서 없으려나...' 가지런히 꽂힌 책도 있고 누군가 보고 대충 쌓아둔 책도 있었다. 그곳들을 샅샅이 뒤진 끝에 유성은 마침 본 적 없는 제목의 의서를 발견했다. 기쁜 마음으로 훑어보았으나 돌아온 것은 실망감 뿐이었다. '이건 다른 의서들에 나온 처방들을 짜깁기 해서 책의 이름만 바꾼 거네. 얌체같네.' 대부분의 의서들이 그랬다. 간혹 몇 가지 새로운 처방을 발견하기도 했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마침 점원이 돌아다니길래 유성이 물었다. "혹시 의서들은 이쪽에 있는 것이 다입니까?" "그렇습니다. 찾으시는 게 없다면 나중에 다시 방문해주십시오. 하루에도 몇 번씩 책들이 오가기에 그때는 찾으시는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볼일을 마친 유성이 슬슬 빈민가로 떠나려는 찰나. "백유성 의원님 맞으시죠? 꼭 뵙고 싶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되네요." 옥구슬이 굴러가듯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성이 돌아보았다. '전에 본 여자인데...?' 차의원과 머리를 식히러 간 주루에서 무림학관 후기지수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무리에 끼어 있던 여자가 유성을 보고 반가워하고 있었다. 열여덟 정도 되었을까? 팽지산과 진영호의 말해 일희일비 하던 다른 후기지수들과 다르게 줄곧 유성에게 눈을 반짝거리고 있어 인상 깊었던 여자다. 지적이고 얼핏 차가운 듯 보이는 제갈영영의 눈빛과 달리, 초롱초롱한 큰 눈이 인상적인 미녀로 푸른 무복이 잘 어울렸다. "전에 주루에서 본 적이 있는 분이시군요. 무림학관 후기지수 분들과 함께 계셨던 것 같은데..."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저는 남궁유린이라고 해요." 여자의 이름을 듣자 유성은 문득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게임에서는 특별한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주요 등장인물은 미녀인 것이 국룰이다. '예쁜 여자들은 대부분 이름있는 사람들일 거라는 가설이 맞았다. 그런데 검왕의 손녀였을 줄은 몰랐는데.' 배경도 남궁세가다. 생각보다 더 거물이다. "남궁 소저시군요. 혹시 저에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그녀가 살짝 미소 지었다. 호감을 사기 위한 미소로 보였다. "사실 전에 몇 번 낙양 의방을 찾아간 적이 있으나 그때마다 시간이 맞지 않아 뵙지 못했지요. 여쭤볼 것이 있어서 조만간 다시 찾아갈 생각이었답니다." "그러셨군요. 혹시 어떤 것입니까?" 남궁유린이 물어볼 것으로는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긴 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혹시 백 의원님은 제 오라버니에 대한 소문을 들으신 적 있나요?" 백유성의 스타트 포인트이자 고향 호남은 변방으로 취급받는 곳이다. 중앙 무림에서는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기 일쑤였고 누가 무척 뛰어나다더라, 하는 소문 정도는 헛소문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호남에서 아무리 뛰어나다고 소문 나 봤자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명성이 중앙까지 뻗어나가기 힘들었다. 반면 중앙 무림의 소문은 상행을 하는 상인들을 통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왔다. 그중 백 년 기재라는 남궁유현에 대한 소문도 당연히 있었다. 대단한 무재를 가지고 있어 검왕의 뒤를 이을 것이 확실시 되는 남궁세가의 미래! 그러나 유성이 낙양에서 생활하는 동안 추가로 들은 소문은 달랐다. 추가된 소문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혹시... 크게 다치신 일을 말하는 겁니까?" 다른 소문을 말하는 거라면 실례를 범하는 꼴이 된다.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남궁유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라버니는 살수의 암습으로 시력을 잃었어요. 제가 여쭤보고 싶은 말은, 혹시 백의원님이 오라버니를 치료해주실 수 있는지예요." "..." 남궁유현은 절정 고수임에도 어릴 적부터 믿어왔던 하인이 살수로 돌변하자 암습을 피하지 못했다. 손에 무기도 없고 방심한 틈을 제대로 찔렸다고 들었다. 다친 와중에도 남궁유현이 살수를 해치우는 데 성공했으나 그 암습에서 눈에 검상을 입었고. 절대 단련할 수 없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눈에 검상을 입었으니 어떻게 되었을까? '한순간의 방심으로 시력을 잃고 몰락한 천재 검사.' 그것이 남궁유현에 관한 가장 최근의 소문이다. 눈의 상태에 대해 전해 듣기만 해도 지금의 유성으로서는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기본 치유 스킬 수준으로는 곧바로 치료하지 않는 한 장애가 남은 상처를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자기 단전처럼. 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제 실력으로는 무리입니다, 소저." "아... 그런가요..." 설마 유성이 남궁유현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걸까? 완전히 기대를 배신당한 것처럼 남궁유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시, 실례했어요." 고개를 숙인 채 인사하는 남궁유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숙였음에도 얼핏 보이는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미녀의 눈물에 괜히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게다가. '이 빌어먹을 게임이 버츄얼 판타지와 같다면 이 남궁유린이라는 여자도 뭔가 한 가닥 할 가능성이 높단 말이지.' 제갈영영과 비슷하게, 머리든, 무공이든, 금전적으로든 그녀는 원작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도움을 줘서 나쁠 것은 없었다. 여지라도 남겨두기로 했다. 상세한 방법만 비밀로 하면 된다. 이곳 사람들은 의술에 대한 지식이 뜻밖에 얕았고 영술과 같은 신비한 힘도 존재하는 곳이다. "물론 지금의 제 실력을 기준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홱! 스쳐 지나가려던 남궁유린이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역시 눈가가 촉촉했다. 그녀는 유성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왔다. "혹시... 나중에는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분명 가능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