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립은 흔들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았거늘, 다시 한번 헛된 희망이 피어나려 한다.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려냈다라... 그게 정말이라면 한번 걸어볼 만 하겠지.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정립은 그 길로 하인 하나를 불러 백의원의 진료실로 안내를 부탁했다. 하인은 그를 백유성의 진료실 앞으로 안내했다. "안에 무림맹 무사분이 진료중이시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겠네." 정립을 안내해 준 하인이 돌아가려는 것을 백의원의 담당 하인 장칠이 붙잡았다. 장칠은 새로 생긴 화제거리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속삭였다. "저분은 조금 전에 오셨다는 척마대주님이 아니신가? 혹시 저분이 직접 여기로 오고 싶다고 하셨나?" "물론이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조의원님 환자를 백의원님께 모셔왔겠나. 조의원님이 백의원님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걸 뻔히 아는데. 척마대주님께서 조의원님 진료실을 나오셔서 내게 여기로 안내해 달라 부탁하시지 뭔가." "아, 거기서 나오셨나? 난 또 다른 분들처럼 알아보고 오신 줄 알고 설렜지 뭔가." "설레다니?" "그랬다면 조의원님이 길길이 날뛸 게 뻔하지 않은가. '백유성 이놈이 또 내 환자를 가로채! 가만두지 않을 테다!' 이렇게 외치면서 말일세." "큭큭, 이 사람도." 남이 들을까 조심하며 먼 거리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훔쳐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초인이라 불리는 사람이나 훔쳐듣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마침 이 자리에는 화경을 목전에 두고 있는 초절정 고수가 있었다. 초절정의 경지는 능히 초인이라 불릴 만 하다. '그렇게 된 일이었군. 천하의 척마대주가 의원들의 정치질에 이용당하는 신세가 될 줄이야.' 조의원의 깍듯한 태도에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지더라니 그가 무언가 목적을 이룰 속셈으로 자신을 백의원이라는 자에게 보낸 것이다. 정립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조의원에게 죄를 물을 생각은 없었다. 다른 의원을 추천하는 권유 자체는 문제가 없으니 일을 키워 봤자 마지막에 추한 모습만 남길 뿐이다. 회의감을 느낀 정립은 발걸음을 돌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기다렸다. 강력한 진통제만 처방 받고 미련 없이 돌아갈 생각이었다. 진료실 너머로 살짝 보이는 백유성의 얼굴이 무척 젊어 그런 생각은 더 커졌다.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려냈다니, 그것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겠구나. 역시 나는 정치와 맞지 않는다. 아무 생각할 필요 없이 마를 멸하는 척마대주의 자리가 제일 어울리는 자리였지.' 자기 삶을 돌아보던 정립은 곧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대기 중인 환자들이 대화하는 소리였다. "자네가 귀에 피딱지가 생길 정도로 칭찬해서 왔는데 정말 믿어도 되는 거겠지?"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내가 직접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이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어찌 사람이 죽은 사람을 살려낸단 말인가?" 남자 중 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는 백의원님께 치료 받고 나서 날 형님으로 모실 준비나 하게." 혼자 온 환자들도 있지만 지인과 함께인 환자들은 저마다 백유성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짓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립의 가슴에 파문이 일 무렵, 안에서 치료받던 환자가 나왔다. 그는 가슴 어림을 어루만지며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정립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뺨에 긴 검상이 남아 있는 상대가 먼저 깜짝 놀라 인사했다. "엇! 대주님, 이게 얼마만이십니까!" 제일 먼저 진통제를 확보하기 위해 의방으로 먼저 왔기에 척마대 부하도 그가 폐관을 끝낸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대련중 내상을 입어 방문했습니다. 한 달은 족히 걸릴 내상이 거의 다 나았습니다. 사나흘만 다스리면 완치될 것 같습니다." 정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정도의 내상이 벌써?" 내상은 요상단이 없다면 아무리 가벼워도 족히 일주일은 정양해야 한다. 그러나 외상에 효과적인 금창약이 구하기 쉬운 것과 달리 좋은 요상단은 극히 드문 편이다. "백호단주가 이 의원이 용하다고 다치면 꼭 가보라고 신신당부 하던 통에 한번 와봤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안 그래도 한번 대주님께도 진료를 권해볼까 하던 중이었는데, 벌써 백의원님의 소문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자신이 믿는 부하 역시 극찬을 하니 백유성에 대한 정립의 신뢰도가 조금 올라갔다. '어쩌면 완치는 힘들더라도 얼마간 생명 연장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만약 1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전력으로 화경의 벽에 부딪혀 볼 만 하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 되자 앞에서 대기하던 하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들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아, 내가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군. 미안하네." 유성은 방금 치료를 마치고 나간 환자가 진료실 앞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또 무림맹 무사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진료실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록 내공을 잃어 기세를 읽어낼 수는 없으나, 남자의 자세나 몸을 단련한 흔적들이 대단한 무인임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가 빙의하고 나서 본 사람들 중 제일가는 고수로 추정되었다. '여러 절정 고수들을 봤지만 저자는 그보다 윗줄의 고수로 보인다. 분명히 이름 높은 자일 거다.' "정립이오." 대단한 무인이라는 정보에 정립이라는 이름을 듣자 유성은 그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척마대주님이셨군요." "그렇소. 잡설은 치우고 본론만 말하겠소." 성격이 급한 사람이거나 아주 바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시지요." "나는 몇 년 전에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악성종양이 온몸에 퍼져 있다는 진단을 받았소. 다른 의원들은 모두 나를 치료할 수 없다고 했소. 지금도 극심한 통증이 내 몸을 갉아 먹고 있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성을 보며 잠시 뜸을 들인 정립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대가 심장이 멎은 사람도 살려낼 정도의 명의라고 들었소만, 내 병도 치료할 수 있겠소?" 유성의 머릿속은 이미 팽팽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몸 안에 생긴 악성종양은 현대의 병명으로는 '암'이다. 이미 온몸의 장기로 전이가 된 상태로 수년이 지났다면 척마대주는 아마 한계에 달해 있을 것이다. 최근 많은 환자들을 받는 유성도 암을 치료해 본 경험은 없었으나 자신은 있었다. 신의 힘으로 행해지는 치유는 질병에 한해서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온몸에 전이 되었다면 신성력의 양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지. 지금도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완치보다는 자연 치유가 가능한 수준으로 아껴쓰고 있는 상황이니.' 차분한 듯 보이나 일말의 초조함이 깃든 정립을 보며 유성은 그를 기필코 치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무림인들을 고쳐주었을 때 신성력이 크게 상승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면 치료에 성공하면 큰 폭의 신성력 상승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치료 방법까지 구상해 본 유성이 생각을 마치고 말했다. "진맥을 하고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진심이시오?" "먼저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순순히 손목을 내준 정립의 맥을 짚은 유성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희미하고 난잡한 맥 상태에 심각해졌다. '마치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하구나. 아마 이자는 지금도 강력한 내공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티고 있음에 틀림없다. 치료에 필요한 신성력 소모도 대단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소모값은 더 커지겠지.' 정립은 유성의 표정이 굳자 희미하게 타올랐던 희망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역시 무리군.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소. 강력한 진통제를 처방해주시오. 며칠만 버티면 되니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소." 이것으로 되었다. 소중한 시간을 얼마간 허비한 셈이 되었지만 진통제를 받을 수 있다면 마지막 소임을 마무리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유성은 진통제를 처방해주지 않았다. "척마대주님, 살고 싶으시면 제 말에 철저히 따라주셔야겠습니다. 시침을 할 터이니 저쪽에 누워주십시오." "...!" "어서 누우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 초절정 고수가 되어 척마대주가 된 후로 자신을 향해 이 정도로 강력한 명령조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직속 상관인 무림맹주 또한 부탁조로 명령을 하달하거늘. 하지만 정립은 유성의 눈빛에서 확신을 엿보았다. 무엇에 대한 확신인지는 곧 알게 되리라. 유성은 정립이 한동안 자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 눕는 것을 보고 안도했으나 고비는 아직 남아 있었다. 유성이 몸 내부까지 찔러 넣을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젓가락만한 장침을 집어 들었다. "설마 그것으로 침을 놓는 것이오? 침은 혈자리에 놓는 것이 아니오?" "악성종양은 너무 많이 퍼져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저만의 비법이니 믿어 주시지요." "...알겠소." 모든 것을 내맡긴 정립의 눈이 감기는 것을 보고 유성은 젓가락만한 장침을 가슴 한가운데에 찔러넣었다. 피부, 피하조직, 근막, 늑간근, 흉막 순으로 뚫고 들어간 침을 통해 유성이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신성력을 통제하자 내부 장기의 형태가 마치 CT라도 찍은 듯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른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찔렀을 때와 비교해 보면 척마대주의 장기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이 암 조직이 전이 되어 있었다. '역시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 치유 스킬이 발현되었다. *** "아니, 그게 정말인가?" "차의원님, 이미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분명 치료를 시작했다고요." 차의원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납득이 안 되어 그러네. 정말 척마대주님의 병을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자네는 모르겠지만 몇 년 전에 척마대주님이 다녀가신 후 낙양 의방의 의원들이 모두 모여 척마대주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논의했었네. 양의원님은 의선께 서신까지 보냈었지. 그러나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척마대주님이 대성을 이루길 응원해주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었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연거푸 유성에게 척마대주의 치료 가능성에 대해 물은 차의원은 슬그머니 본심을 꺼냈다. "그럼 혹시... 어떤 방식으로 치료하는지 들을 수 있겠나? 자네는 이미 심장 압박 비법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에게 알려 준 적이 있지 않은가?" 유성은 양심 없는 차의원에게 눈을 흘겼다. 심폐소생술에 대해 알려 준 적이 있지만 이번 치료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 외에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고. 그러나 나중에,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