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 이남은 무림맹의 입김이 세지 않은 곳이다. 흑도 무리가 제대로 터전을 꾸린 광동, 광서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다른 지방도 흑도 문파들이 많아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다만 호남은 좀 덜한 편이다. 형산파라는 나름대로 규모가 큰 정파가 있기 때문이다. 구심점 형산파에 기대어 여러 중소문파들이 힘을 모으면 흑도 무리가 함부로 활개치지 못한다. 그런 호남 지역의 작은 무가 백가장에 경사가 났다. 가문의 무사들과 하인들이 모두 지켜보는 중에 백가장의 가주는 아들을 크게 치하했다. “장하다, 진성아! 네가 무림학관에 입관하게 되다니!” “고생 많았다, 내 아들!” 아버지, 어머니의 말에 백진성은 당당하게 말했다. “이게 다 아버지, 어머니 덕분입니다. 제가 꼭 무림맹에 입맹하여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겠습니다.” “그래. 듣자 하니 무림학관 생도 중 무림맹에 입맹하는 비율이 크게 늘었다고 하더구나. 지금처럼 정진하면 너도 꼭 할 수 있을 거다.” “물론입니다. 거기 가서도 열심히 해서 백가장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꼭 입맹하여 보이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무림맹에 입맹하여 활동하다가 복귀하기만 해도 호남 지방에서는 어깨에 힘 깨나 줄 수 있게 된다. “그나저나 정말 이 어미가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니?” “어머니, 걱정 하지 마십시오. 무림학관에 제 친우도 있으니 도움받으면 됩니다.” “아, 진가장의 진영호 말이냐? 그래, 요즘도 연락 자주 하고?”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백진성은 부모님께 진영호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는 사실을 굳이 털어놓지 않았다. 진영호가 무림학관으로 떠나는 날, 거기 가서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거라는 이야기를 나눈 적 있기에, 바쁘게 지내고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 참, 무림맹에 일침신의라는 분이 계시다는 소문은 너도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나이도 젊은데 침 하나로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오가는 상인들은 여러 이야기를 전하고는 한다. 누가 초절정 고수가 되었다더라, 어느 지역에 마두가 나타났다더라, 요즘은 어떤 의원이 잘 나간다더라. 얼마 전까지는 사람들은 의원들 중에는 의선을 최고로 쳐 주었다. 그러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선으로 불리는 그는 요즘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그 사이, 역시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침신의라는 의원이 떠오르고 있다. “그래, 그분께 드릴 귀한 선물도 싸드릴 테니 한번 찾아뵙고 친분을 다져 놓거라. 너도 그 녀석의 일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그런 대단한 의원과 친분을 다져두어 절대 손해 볼일은 없을 거다.” 백진성은 아버지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백유성. 무재 하나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배다른 형제가 주화입마를 입어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다. 자기 처지에서는 천운이었다. 가문의 적자로 태어났음에도 사생아에게 밀려날 뻔했으니까. 하지만. -참고 기다리면 꼭 기회가 올 테니 절대 포기하지 말거라. 어머니의 말씀대로 그 녀석은 혼자 추락해 버렸다. 백진성은 절대 그런 멍청한 녀석처럼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수련을 해 나갔고 얼마 전 일류 무인이 되었다. 덕분에 무림학관에도 입관할 수 있게 되었다. ‘낙양의방 출신이라지? 젊은 나이에 무림맹 의각주가 될 정도면 정말 대단한 의술을 지니고 있나 보군. 아버지의 말이 아니더라도 꼭 친분을 다져두어야 할 자다. 최근 무림학관 생도들도 다치는 일이 많다니 친해지면 큰 도움이 될 거다.’ 무림학관에 입관 통보만 받았을 뿐, 정식으로 입관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백가장과 백진성은 무림학관에 가서 성공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시작했다. 가산의 일부를 정리하여 인맥을 다지기 위한 선물들을 준비하는 일도 그중 하나다. 실력만으로 경쟁하기에는 다른 후기지수들이 너무 쟁쟁하니까. *** 검왕은 무림학관에 머물며 손녀와 대련하면 할수록 아쉬움을 느꼈다. 무공 수련을 잘 따라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대련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혼자 수련할 땐 공격 초식도 잘 펼치면서 왜 대련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냐?”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가졌어도 공격하지 못하면, 대단히 큰 실력 차이가 나지 않는 한 상대를 제압하기 힘들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실전에서는 큰 화가 닥칠 수 있는 것이다. “...” 남궁유린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도 시녀와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털어놓았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진실을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공격 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그날의 사고가 떠오르며 몸이 굳어 버린다. 도저히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을 리 없다. ‘의각주님이 보고 싶어…’ 유일하게 자기 말을 믿어 준 사람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면 그는 항상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 오라버니의 치료를 부탁했을 때도 흔쾌히 치료를 약속했고, 귀찮게 하는 팽지산과 엮였을 때는 그를 퇴치해 주었고, 자기 일과 시녀의 일을 털어놓자 역시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유성을 생각하자 대련 중인 것도 잊고 자꾸 다른 생각이 났다. ‘손수건 돌려드리러 언제 가지? 이걸 돌려드리면 다음 임무까지 만나러 갈 핑계도 없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한눈팔지 말거라!” 손녀가 딴생각 하는 걸 눈치챈 검왕은 다시 검을 들어 공격했다. 챙- 채앵-! 배운 대로 방어 초식을 펼치며 차분히 검왕의 공격을 막아가는 남궁유린. 직접 검왕에게 지도받으며 크게 실력이 늘어났지만 방어만 해서는 반쪽짜리일 뿐이다. 검왕은 결국 검을 거두었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그 시녀와 결판을 내야겠구나. 며칠 후에 할애비와 가문으로 돌아 가자꾸나.” 남궁세가의 미래를 위해서다. 이런 검재를 가진 손녀가 더 이상 반쪽짜리 무인으로 지내게 둘 수 없었다. 정신을 단단히 차리면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다. ‘나 역시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 유린이도 할 수 있을 거다.’ 검왕은 자기 경험에 빗대어 그렇게 판단했고, 이번에도 그의 판단을 신뢰했다. 손녀에게 약속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할 이야기는 있다. “그건…! 약속이 틀리잖아요!” 돌아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무공 수련 중인데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인가? 펄쩍 뛰는 남궁유린에게 검왕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를 공격하지 못하는데 그게 어떻게 최선을 다하는 거냐?” “...” “네가 빨리 극복하면 다시 무림학관으로 돌려보내줄 테니 긴말하지 말거라.” “싫어요. 저는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번에는 소용없다. 이미 나는 결정 했으니 내 말대로 해라.” 이번에는 강력히 주장해도 아무 소용 없었다. 그녀가 알던 엄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다. 그러나 그날 밤. 검왕은 한 가지 소식을 듣고 남궁유린에게 통보했다. “잠깐 일이 있어 다녀오마. 곧 돌아올 테니 미리 돌아갈 준비해 두거라.” “무슨 일이신데요?” “다녀와서 말해 주마.” 검왕은 배웅 나온 남궁유린을 돌아보았다. 남궁유린이 불만스럽게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할애비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다녀오면 할애비가 도와줄 테니 빨리 극복하고 다시 돌아오자.” “...” *** 검왕이 떠난 이튿날 저녁. 유성이 의각의 당직을 서는 날이다. 깨끗이 빨아 놓은 유성의 손수건을 들고, 남궁유린은 의각으로 향했다. 의각 하인들이 입구를 막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구를 통과해야 한다. 남궁유린은 그들에게 인기척을 냈다. 하인 무리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 놀랐다. 장칠이다. “아, 남궁유린님! 의각주님 찾아오셨습니까? 방금 무림맹 회의에 참석하셨는데요.” 유성이 무림맹 회의에 참석할 일이 있던가? “무슨 일이신데요?” “청성파에서 의각주님을 찾아왔거든요. 저희도 거기까지만 들어서 그 이상은 모릅니다.” “그렇군요.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모르나요?” “네, 그것까진 못 들었습니다. 혹시 의각주님 돌아오시면 왔다 가셨다고 말씀드릴까요?” “아니에요. 내일 다시 올게요.” *** 이튿날. 무림학관 교관이 임무 수행 중이지 않은 생도들을 불러 모았다. “무림맹에서 할당된 새 임무들을 배정하겠다.” 여러 임무들이 나열되었다. 생도들이 저마다 원하는 임무에 지원했다. “다음은 의각 경계 임무!” 여러 생도들이 손을 들었다. 그들 중에는 유성과 친해지기 원하는 후기지수들도 있다. ‘나도 지원하고 싶은데…’ 남궁유린은 지원하지 못했다. 곧 할아버지와 함께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하지만. “다음은 장기 임무다. 혹시…” 교관이 말을 흐리는 동안 남궁유린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장기 임무? 섬서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도 장기 임무라고 하신 적 없는데?’ “오늘 오후에 사천으로 향하는 무림맹 인원들 호위 임무가 하나 있다. 혹시 지원할 생도 있나?”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사천이면 너무 먼데? 넌 지원 할 거냐?” “미쳤냐? 그동안 여기서 여러 임무 수행하며 높은 분들과 두루두로 안면 익혀두는 게 훨씬 낫겠다.” “그렇지? 시간도 촉박해. 오늘 당장 출발인데 누가 갑자기 사천까지 가고 싶겠어?” 사천까지는 왕복 이동 시간만 해도 최소 두 달이 걸린다. 특별한 임무라도 수행하고 오면 세, 네달은 훌쩍 지나버릴 게 분명했다. 누구를 호위 하는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가고 싶은 생도가 얼마나 있겠나? 교관도 임무가 할당되었기에 생도들의 의견을 물어봤을 뿐 누군가 지원할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번쩍 든 생도가 한 명 있었다. “응? 남궁유린, 정말 지원할 생각이냐?” “네, 교관님. 제가 가겠습니다.” 남궁유린은 충동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 절반, 어쩌면 유성이 일행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절반이다. *** 시간을 거슬러 남궁유린이 유성을 찾아왔다가 허탕 친 날 저녁. 유성은 청성파에서 찾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무림맹 회의에 불려 갔다. 청성파에서 파견된 장로가 말했다. “의각주, 청성파를 도우러 와줄 수 있겠소? 의각주의 의견만 남았소.” 이미 무림맹 사람들과는 이야기가 된 눈치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전에 의각주가 도왕의 독을 해독해 준 일이 있었지 않소? 우리 청성파의 장문인께서도 습격 당해 정체불명의 독에 중독되었는데, 그 증상이 도왕과 비슷하다고 하오.” “장문인께서… 중독 정도는 어떻습니까?”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오. 그래서 여기까지 모셔오지 못했소.” 청성파는 무림맹의 우방이고, 청성파의 장문인 유천진인은 화경의 고수다. 그것만으로 도우러 가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청성파의 장로가 말을 이었다. “사천당가에서도 사람이 다녀갔으나 해독하지 못했소. 이제 믿을 사람은 의각주 뿐이오. 제발 부탁하오.” 사천에는 당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