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이 어머니의 눈에 대해 물은 후 고민에 빠지자 장칠은 불안했다. “의각주님, 혹시 무슨 문제 있습니까? 호, 혹시 머지 않아 어머님이…”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한 말. ‘눈이 완전히 멀어 버리게 되시는 건가요?’ 어머니의 시력이 완전히 멀어 버리면 장칠은 의각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모셔야 할지도 모른다. 모시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고 각오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안 된다. 종학진이 내기판을 제안 해도 장칠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온갖 유혹을 이겨 내고 열심히 돈을 모았지만. ‘아직 모자라. 몇 년밖에 못 버텨.’ 하지만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온 세상이 어둠에 물들어 혼자 방 밖도 나가기 힘든 홀어머니는 도대체 누가 모신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동안 함부로 입을 놀려 하늘의 노여움을 산 걸까?’ 선뜻 달려와 어머니의 목숨까지 구해주신 의각주님에 대해 함부로 헛소문을 퍼뜨렸던 과거가 미치도록 후회되었다. 그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속이 시꺼멓게 죽어갈 무렵. 드디어 생각을 끝낸 유성의 입이 열렸다.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성을 봐서 그렇습니다.” “가능성이요?” 유성은 불안한지 장칠의 팔을 붙들고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님, 제가 눈을 조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제 눈을요?” 장칠은 불안한지 유성의 침통을 힐끗 바라보았다. 시침 한 번으로 거의 모든 병을 치료한다고 일침신의라는 명성까지 얻은 유성이다. 그런데 시침도 시침 나름이지, 괜히 상태를 살핀다고 눈을 찔러 악화시켜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의각주님, 혹시 어머니 눈에도 침을 놓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침 놓으려는 건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렇다면야…” “그럼 좀 보겠습니다.” 장칠이 물러서고, 유성은 그의 어머니의 눈에 조용히 손을 덮었다. ‘갑자기 눈은 왜 살펴보신다는 걸까?’ 장칠의 어머니는 평소 아들로부터 의각주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모시는 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어왔음에도 그녀는 유성이 눈 치료를 시도 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의선의 제자라는 양의원에게 어렵사리 진료 받았을 때, 늙은 사람들 중 종종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들었고, 여태 그렇게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편히 계시면 됩니다.” 유성의 손에 덮여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작은 등불이 새어 들어왔다. 새어 들어온 빛이 번져 마치 안개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 흐릿한 안개가 점차 걷히기 시작한다. 유성의 손과 눈 사이의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선명해진다. ‘착각은 아닐까?’ 눈이 손에 뒤덮여 있어 착각한 걸 거다. 어떻게 멀어 버린 눈을 고친단 말인가? “...” 그러나 유성이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내고, 어둠에 잠식된 시야가 서서히 돌아왔을 때. “아아…!”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년 사이 이마에 주름이 늘어난 아들의 얼굴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던 탓이다. 아들은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시력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 써 왔고, 만약 완전히 눈이 멀어 버리게 된다면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기 위한 결심까지 서 있었는데… “어머니?” 멀쩡해진 눈으로 다시 한번 아들의 얼굴을 생생히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장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 때문에 정말 고생 많았다…”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유성을 향해 몇 번이고 고개 숙였다. “아이고, 의각주님! 이 노인네의 눈을 고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일인지 잘 파악 되지 않던 장칠은 그제야 눈치챘다. 비록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만, 어머니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또렷하게 초점이 잡혀 있다는 걸. “의, 의각주님, 저, 정말 저희 어머니의 눈이 고쳐진겁니까?” “이놈아! 아주 잘 보인다, 잘 보여! 아이고, 의각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빙그레 웃는 유성을 향해 장칠은 다시 큰절을 올렸다. 수차례나. 장칠의 어머니 역시 늙은 몸으로 아들과 같이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유성과 남궁유린이 황급히 그만하시라고 말려야 할 정도로 두 모자는 계속 감사함을 표했다. *** 한바탕 큰절 세례가 끝난 후. 장칠과 어머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원래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 그리고 남궁유린 역시 커다란 눈에 한가득 물기를 머금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얼마나 찍어 댔는지, 파란 소매 한쪽이 흥건히 젖어 있다. “...” 괜히 혼자 냉혈한이 된 것 같아 머쓱한 유성의 오른손을 장칠의 어머니가 끌어 잡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고마운가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다른 손으로 남궁유린의 왼손도 끌어 잡았다. “대단한 가문의 무사님이시라고요?” “남궁유린이에요, 어머님.” “이름도 참 예뻐요. 듣던 대로 얼굴도 정말 곱고.” “감사해요.” 예쁘다는 칭찬은 어떤 여자라도 기분 좋을 거다. 남궁유린이 슬쩍 웃었다. 이제 장칠 어머니의 시선이 유성에게 향했다. “의각주님도 이렇게 미남이신지 몰랐어요.” “큼.” 민망해 헛기침 하면서도 유성은 슬쩍 장칠을 째려보았다. 남궁유린의 미모는 칭찬했으면서 유성에 대해서는 별말 안한 모양이다. 나름 열심히 깎은 얼굴인데 서운하게. 그런데 장칠의 표정이 이상하다. 왠지 안절부절못 하는 것 같다. “어, 어머니—” “두 분, 굴하지 말고 예쁜 사랑 하세요. 의각주님 실력이 이렇게 출중하신데, 무사님이 열심히 가문 설득하시면 두 분 꼭 혼인 할 수 있을 거예요.” 유성과 남궁유린의 손을 겹쳐주며, 어머니가 한 말에 장칠이 양 팔을 휘적이며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 죄송합니다아아아!!” 장칠이 어머니에게 뭔가 또 헛소리를 해 놓은 모양이다. 유성이 어처구니없어 남궁유린에게 고개 돌렸다. 그녀도 마찬가지 일 테니까. 그런데. 남궁유린과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건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설마 장칠, 너…?” 당황한 장칠의 어머니가 손을 놓길래 유성도 남궁유린과 강제로 포개져 있는 손을 빼냈다. 유성의 손을 놓친 남궁유린이 무의식에 허공을 움켜쥐다가 슬며시 손을 거둬들였다. *** 막 회복하여 쉬어야 하는 장칠의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유성과 남궁유린은 밖으로 나섰다. 장칠이 쪼르르 따라와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의각주님! 남궁유린님!” 미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연신 사과하는 그를 보며 유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그러지 마십시오. 남궁 소저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어머님이 적적해 하셔서 이것저것 이야기해드린다는 게 그만… 저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맹세까지야… 아무튼 믿어보겠습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 치료해주신 것도요. 아 참, 그리고 이거…” 장칠이 품에서 전낭을 하나 꺼냈다. “이걸 왜…?” “치료비 받으셔야지요.” 억지로 장칠이 쥐어 준 주머니가 살짝 열려 있었는데, 안에는 은자들이 꽤 많았다. 비록 유성이 해준 일에 비하면 많지 않을지라도 장칠에게는 분명 큰돈일 텐데. “너무 많습니다. 같은 식구 어머님인데요.” “아닙니다. 일 그만두고 어머니 모셔야 하면 쓰려고 모아둔 돈입니다. 다 드려도 아깝지 않지만 생활비만 제했습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실랑이 끝에 유성은 약간만 챙기고 장칠에게 모두 돌려주었다. 가볍게만 봤던 장칠이 건실한 사람이어서 의외였을 뿐. 무림맹으로 복귀하는데, 남궁유린의 표정이 밝아 보인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 생기가 돌아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아진다. ‘지금 진료 이야기 꺼내기는 적합하지 않겠네. 진짜 그쪽이면 당장 치료해주지도 못 하는데.’ 다시 기회를 보기로 한 유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원래 눈물이 많으십니까?” “아… 조금요. 그리고 아까 제 오라버니 생각도 나서요.” “...” 남궁유현도 눈을 다쳤다. 장난 좀 치려다 괜히 남궁유린의 기분만 망쳐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는데. “그래서, 지금 기분 좋아요. 의각주님이 오라버니 눈 치료해주실 거라 믿으니까요.” 보는 사람조차 기분 좋아지는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이튿날. 장칠은 여러 군것질거리를 바리바리 싸와서 유성에게 건넸다. “저희 어머니가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잘 먹겠다고 전해드리십시오.” “네, 의각주님!” 장칠은 뒷걸음질 쳐서 공손하게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친한 하인 하나가 손짓해 그를 불렀다. “장칠, 잠깐 이리 와봐.” “왜?” 구석진 곳에서 하인이 장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제 누가 너 무림학관에서 봤다던데 의각주님이랑 남궁유린이랑 같이 있었다며? 둘이 분위기 어떻든? 진짜 막 분홍빛이었어?” 친한 하인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장칠이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리라. “뭔 개소리야? 그런 거 하나도 없었으니까 헛소리 할 거면 가서 약재나 들여놔!” “아니, 갑자기 왜… 어제까지만 해도 너도—” “쓰읍! 한 번만 그딴소리 하면 너라도 가만 안둔다?” 장칠이 정색하며 가 버리자 하인은 벙쪘다. ‘이런 이야기는 지가 제일 신나 했으면서 왜 저래? 뭘 잘못 처먹었나?’ 장칠은 새롭게 태어났다. 그는 의각의 소식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속하고, 외부 소식들을 유성에게 가감 없이 전하는 충실한 하인이 되었다. *** 어느 날, 장칠이 유성에게 소식을 하나 전했다. "의각주님, 검왕이 남궁유린님을 찾아와 가문으로 데려가려고 한답니다." "그래요?" "네, 왠지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