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은 태상문주 자리로 물러나 요양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유성 덕분에 치매를 치료했으나, 과거에 그녀는 치매를 노망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무림인들은 기를 쓰고 피했는데, 유성을 비롯한 일부 일반인들만 가끔 일 때문에 만나고는 했다. 부끄러웠으니까. 정연은 노망 증상이 나타났을 때부터 소옥과 방혁을 두고 후계 문제로 계속 지켜보았다. 방혁의 추측과 달리 소옥이 제자가 된 후에도 그에게는 기회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소옥이 하오문을 더 밝은 곳으로 이끌어 주겠구나.’ 정연은 그녀와 더 닮은 소옥에게 점차 마음이 기울었다. 단순히 아들과 꼭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능력 없는 방혁이 문주가 되면, 하오문은 지금처럼 정사지간으로도 남지 못할 것 같았다. 돈만 많이 주면 강호의 안위 따위는 상관없이 아무에게나 정보를 팔아먹는 사파로 전락할 것 같았다. 내심 소옥에게 문파를 물려주겠다고 마음을 굳힌 후에도 정연은 쉽게 방혁을 내치지 못했다. ‘방혁이 내 아들의 외모와 꼭 닮아 너무 미련을 가졌구나. 나도 이제 늙었다.’ 그 잘못된 판단이 하오문에 큰 위기를 초래할 뻔했다. 장로들 몇 명도 수상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유성의 도움이 없었다면 필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태상문주로 물러나기 전 마지막으로 처리할 일은 방혁과 결탁한 자들을 모두 밝혀내는 거다. 하오문을 깨끗한 상태로 소옥에게 물려줘야겠다.’ 처음에 말을 꺼냈을 때 소옥이 그럴 수 없다고 펄쩍 뛰었으나. “병은 치료되었는데 몇몇 중요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태로는 힘들단다. 내가 도와줄 테니 한번 잘 이끌어보거라.” 그렇게 최연소 하오문주가 탄생했다. 물론 하오문주의 역사상 최연소로, 소옥은 유성보다는 열 두 살이 많았다. 띠동갑녀가 온화하게 웃었다. “오늘 저희를 도와주신다고 아까운 휴무일을 그대로 날리셔서 어떡해요? 마침 이제 낙양 의방의 주인도 제가 되었으니 며칠 푹 쉴 수 있도록 휴무를 드릴게요. 어떠세요?” 휴무일에는 빈민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다. 빈민가 사람들은 많은 신성력을 올려 준다. 많은 신성력은…. 꼬리를 이어지던 생각은 한 얼굴이 떠오르며 중단되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돼요. 보수는 그대로 지급할게요.” “아닙니다.” 많은 일이 있었고 이미 밤이 되었다. 제갈영영에게 아무 말도 없이 휴무를 가진다면…. ‘난리 날지도.’ 의방 휴무처럼 편의를 봐주는 것뿐만 아니라 소옥은 계속 사례를 하고 싶어 했다. 유성은 마침 그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떠올랐다. “그럼 천운석을 구하는데 도움받을 수 있을까요?” “천운석이요? 그런 것도 모으시나요?” “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개인이 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요.” “맡겨 주세요. 저희도 보유한 천운석은 없지만 전국에 수배 해볼게요.” “아, 혹시 천운석을 제련할 만한 솜씨 좋은 대장장이도 알고 계시면 부탁드립니다.” *** 하오문에서 일을 모두 마친 후. 유성은 정립과 함께 달밤 아래를 걸었다. “잠은 어디서 주무십니까?”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객잔에서 자고 날이 밝으면 무림맹으로 가 짐을 챙기려고 합니다.” 유성은 정립의 의리에 감사하면서도 미안했다. 생각해 보니 그를 도와준다고 무림맹을 그만두며 검 하나만 달랑 들고 나왔지 않은가. 척마대주 정도면 무림맹에서도 좋은 거처에 머물 텐데 그런 곳을 놔두고 무소속으로 객잔에 머물러야 한다니. 심심하지 않도록 술친구라도 해 줘야겠다. “한 잔 하자고 하신 거, 오늘 하시겠습니까?” “전 좋습니다만 날이 너무 늦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내일 예정대로 진료도 이어 하신다면서요.” “이 정도는 끄덕 없습니다.” 정립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유성이 아는 주루는 객잔과 주루를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공자님, 또 와주셨군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느새 유성의 얼굴을 외운 점소이가 자연스럽게 3층으로 이끌었다. “자주 오시나 봅니다.” “아닙니다. 이제 세 번째인데 점소이가 기억력이 좋네요.” “백의원님이 워낙 인물이 훤하셔서 그런가 보군요.”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오늘 정립의 색다른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유성은 자리를 잡고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립님은 그럼 무림맹에 복귀하시기 전까지 뭘 하실지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십니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하오문의 일이 해결 되었으나 무림맹은 여전히 고리타분 한 곳. 눈 가리기 식으로 정립이 그만두는 척, 하오문의 일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을 거다. 그는 몇 달간 무림맹에 복귀하지 않을 생각이다. “혹시 그동안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요, 무림맹 의각으로 들어갈 테니 딱히 도움 요청드릴 건 없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하고 싶은 걸 하시지요. 휴가 가보신 적도 없으시다면서요.” “그럼 생각해 둔 게 있기는 합니다.” “그게 뭡니까?” 유성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정립이 하고 싶은 게 뭘까 궁금했다. ‘정말 낭인 생활을 할 건 아닐 테고.’ 정립이 밝힌 계획은 역시 그 다웠다. “비무행을 떠날까 합니다. 정파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면서 말입니다.” 정파의 고수란 화경의 고수들을 뜻한다. 그동안 무림맹주에게 무공 지도를 받은 것 외에 정립은 화경의 고수와 겨뤄본 적이 없다. 마침 무림맹에 묶여 있을 이유도 없으니, 경지를 더 높이기 위해 화경의 고수들을 찾아다닐 좋은 기회였다. “강호인들이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만 정립님은 무공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시군요.” 그는 술을 한잔 들이켰다.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유성은 타인의 과거사를 캐묻는 편은 아니다. 먼저 털어놓지 않으면 묻지 않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상대가 원해서 들려준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화경의 고수는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을까?’ 그만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던 유성은. “…그렇게 마교인들에게 가족을 모두 잃었습니다.” “….” “낭인이 되어서도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어떻게든 실력을 키워서 복수하자. 척마대에 지원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정립이 마교에 대해 큰 원한을 가진 이유. 그리고 화경이라는, 모든 강호인들이 꿈꾸는 경지에 도달하고도 끝없이 발전하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응원하겠습니다.”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빌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가 가라앉았군요. 백의원님은 요즘 어떻습니까. 만나시는 여자분은 있습니까?” 이야기가 끝난 후 그는 화제를 돌렸다. ‘갑자기 만나는 여자는 왜?’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돌리기에 적절한 화제는 아닌 것 같지만. “딱히 만나는 분은 없습니다.” 정립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 뭘 이해했다는지 모르겠으나 유성은 새벽까지 정립과 술을 마시고 귀가했다. 내공으로 주독을 배출하지 않은 정립마저 꽤 취할 정도로 많이 마셨지만, 유성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 무림맹 의각이 곧 정식으로 운영될 때가 다가온다. 유성의 낙양 의방 생활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소리다. 앞으로 그에게 진료 받지 못하게 된다는 소리에 사람들의 줄은 그 어느 때보다 길었다. “이제 그만두신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백의원님 덕분에 그동안 아무 걱정 없었는데요.” 누군가는 유성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 했고. “좋은 곳으로 가신다니 너무 잘됐습니다. 의원님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누군가는 유성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아이고, 우리 백의원. 이제 마지막 날인데 한잔 해야지? 물론 내가 사겠네. 혹시 기루도 좋아하나? 저기 매화루에 아주 미색이 뛰어난 예기가 새로 왔다는데.” 누군가는 여전히 유성에게 줄을 대기 바빴다. 손을 싹싹 비비는 사람은 물론 차의원이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양의원님께 초대를 받아서요.” “양의원님이? 혹시 나도 가도 되겠나?” “그건 좀 힘들겠습니다.” “아, 왜? 전에는 우리 셋이 오붓하게 마셨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양의원님께 한번 말씀드려보겠네. 아마 거절하지 않으실걸세.” “…그러십시오.” 유성은 진지한 표정으로 오늘 꼭 시간을 내주길 바라던 양의원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기를 원치 않는 기색이었다. 확실하지 않아 차의원의 일은 양의원에게 맡겼다. 잠시 후, 양의원에게 다녀온다던 차의원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대신 손에 쟁반을 하나 든 채였다.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안 된다는군. 그럼 이거라도 한잔 하게.” 유성은 약재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탕약을 받아들였다. “이게 뭡니까?” “해주탕이네. 전에 나 혼자 먼저 취해서 자네를 못 챙긴 게 마음에 걸려서 준비했네. 오늘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셔도 될걸세.” “이런 것까지 준비하셨습니까?” “당연히 내가 챙겨야지. 아 참, 내 급여에서 부담하는 거니 참고하게.” 차의원이 생색을 내며 숙취 해소용 탕약을 챙겨 주었다. 취하지 않는 유성은 딱히 필요는 없으나 마음만은 고마워 감사히 받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게. 무림맹에 갔다고 날 잊으면 절대 안 되네. 자주 보세나.” 유성은 그렇게 낙양 의방에서 생활을 마무리했다. 미리 대부분의 짐을 옮겨두었기에 챙겨 갈 짐은 침통과 작은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양의원이 이미 나와서 유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유성은 양의원과 함께 커다란 객잔의 별채에서 노인 한 명과 젊은 여자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노인은 눈빛이 맑았으나 얼굴이 꽤 수척했다. 최근에 잠을 잘 자지 못한 듯했다. 젊은 여자는 특이하게 붉은 천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제외한 부분만 봐도 대단한 미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반갑소. 내가 지헌이의 스승 되는 사람이오. 여기는 내 손녀라오.” 의선이 유성 앞에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