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국에서 돌아온 뒤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안은 그동안 공방과 집을 오가며 평범하게 시간을 보냈다. 의뢰는 딱히 해결하지 않았다. 당분간 휴가를 취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으니, 최소한 설날이 지나기 전까지는 이 생활을 지속할 예정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귀성길에 오를 필요는 없었다. 만나러 갈 부모나 친척도 없는데 무슨 귀성이란 말인가. 이서아 같은 프리미엄 고아랑은 상황 자체가 다르다. 일단 태어났을 땐 부모가 있었던 그녀와 달리, 이안은 1살부터 천애 고아였다. 부모의 사랑을 받기는커녕 얼굴이랑 친척들의 유무조차 모른다. 당시에는 그걸 참 부끄러워했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렴, 고아로 20년 넘게 살면 뭐든 통달하는 법이다. “음.” 늦은 점심시간. 이안은 대충 배달 어플로 밥을 주문한 뒤, 휴대폰을 침대에 던지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벽으로 시선을 옮기니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는 수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 많은 수의 물고기들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색을 지닌 열대어들이 거대한 수조 속을 자유롭게 누비고 있다. 이제 와서 새삼 수조 가꾸기에 취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심해아귀, 그러니까 ‘김율’이 해줬던 조언을 따라 공방의 환경을 한번 바꿔본 것이다. ‘외우주의 바다라도 일단은 물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니까. 최소한의 도움이 되어주겠지.’ 심해견문록에 적힌 마법은 대부분이 소환이고, 나머지는 공격 마법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굳이 공방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세밀한 작업은 딱히 없었다. 그럼에도 공방에 수조를 들인 건 큰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이왕 맞추는 김에 같이 맞추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 이안이 공방을 만든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재창조의 손길이다. 격이 높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방의 존재가 무조건 필요했으니, 공방의 유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래서 공방을 만들었고, 성공했다. 다만 아직 완전한 완성이라고 보기엔 부족함이 남아있었다. 마법의 성격에 맞는 도구들을 채워 넣어야 비로소 실력 있는 마법사의 공방이 된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 제법 다양한 물건들을 적재적소에 비치해 두었다. 사용할 예정 따위 하나도 없는 양조기를 테이블 구석에 놔뒀고, 연금술과 관련된 책들을 보기 좋게 꽂아두었다. 금 몇 조각도 서랍에 놔뒀다. 이안이 사용하는 연금술이 평범한 연금술이 아니라는 거야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다. 어쨌든 연금술로 구분되는 마법이니, 이걸로 충분할 것이다. 아니면 뭐, 다시 돈을 써서 공방을 새로 꾸며야지. 돈은 충분히 있으니 굳이 아낄 필요 없었다. 필요할 때 쓰기 위해서 버는 만큼, 이런 일에는 씀씀이를 크게 가져가는 게 옳은 일이었다. 이안은 그리 생각을 정리하고, 안경을 착용하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마도서를 쥐었다. 재창조의 손길. 새하얀 표지 위로 은빛 자수처럼 새겨진 글씨. 한국어가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한국어로 읽히는 그 글자를 손가락으로 한 차례 훑은 뒤, 천천히 표지를 펼쳐서 안에 적힌 내용을 읽는다. 재창조의 손길이 그의 의지를 따라 저절로 페이지를 넘긴다. ‘슬슬 새로운 연금술을 시도할 때가 됐지.’ 이안이 마지막으로 만든 물건은 ‘지식 먹는 종이’다. 반드시 공방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연금술 물품으로, 효과는 지금까지 만든 물건 중에서도 상당히 좋은 편에 속했다. 공방이라는 조건이 붙은 이상 다른 물건들도 아마 종이와 비슷한 위력을 지니고 있을 터. 재료가 너무 복잡하지만 않다면 바로 시도해도 나쁠 건 없을 것이다. 이안은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공방을 거치지 않는 물건도 괜찮은 게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았다. 그렇게 열 번 정도 페이지를 넘겼을까. 이안이 시선을 사로잡는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영혼을 담는 잔]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에서 영혼을 추출하는 잔이다. 추출한 영혼은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고, 기억을 일부 열람할 수도 있다. 해당 잔에 담을 수 있는 영혼은 총 3개로, 섞어서 마시면 자아가 늘어난다.] [재료: 금속 잔 1개, 소금 300g, 말의 피 50ml, 뼛가루 20g, 성수 50ml, 소유주의 혈액 100ml.] 제법 나쁘지 않은 물품이었다. 재료가 좀 복잡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효과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무엇보다 기억의 열람이라는 게 흥미를 끌었다. ‘크루즈에 이게 있었으면 선장을 죽이고 놈의 기억을 뒤져볼 수 있었겠지. 굳이 심문할 필요가 없어지니, 손속에 자비를 둘 이유도 없을 거고.’ 입이 무거운 적은 언제나 어디서나 골치 아픈 편이었다. 알아낼 정보가 많으면 심문이나 고문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소모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고통을 증폭시키는 마법이 있기는 하다. 가볍게 칼로 긋는 것만으로 입에 거품을 물게 만드는 건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다만 그렇게 고문하기 전, 붙잡는 과정이 여러모로 불편했다. 죽지 않게 조절해야 하는데, 그럼 재창조 마법은 사실상 봉인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환술도 마찬가지다. 주력 마법 2개가 봉인된 이상 전투를 유리하게 이끄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대방의 생사를 굳이 고려할 필요 없게 만들어주는 잔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일단 시험 삼아 하나만 만들어보자.’ 이안은 그리 생각하며 ‘영혼을 담는 잔’을 체크해 두고, 계속해서 마도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밥이 오기 직전까지 탐독한 결과, 영혼을 담는 잔을 포함해서 대충 3개 정도의 물건을 추릴 수 있었다. 각각 [피를 쫓는 나침반]과 [인세의 장막]이라는 이름의 물건들. 피를 쫓는 나침반은 말 그대로 나침반이었다. 특정 대상의 피를 묻히면 피의 주인이 죽을 때까지 그 위치를 보여주며, 다른 신비들이 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다. 굳이 피를 묻히지 않아도 일정 반경 안에 피 냄새가 나면 나침반은 반응한다. 부작용으로 나침반을 사용하는 동안 소유주 또한 괴이들의 눈길을 끌게 되지만, 딱히 큰 단점은 아니었다. 아무렴, 괴이들을 상대할 방법이야 제법 많았다. 인세의 장막은 일종의 망토였다. 두르면 일정 시간 동안 현실과 이면 세계의 틈으로 이동하여 양쪽 모두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했다. 쉽게 말해 투명 망토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속 시간이 5분인 데다가 일회용이라서 효율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성능은 제법 훌륭했다. 당장 이성이 없는 이들의 시야에서만 벗어날 수 있는 코트의 마법보다 상위 호환이었다. 셋 중 가장 먼저 만드는 건 나침반으로 정했다. 재료가 평범한 나침반 하나와 피, 그리고 거머리 몇 마리, 괴이의 살점 몇 개가 전부라서 만드는 것 자체가 쉽기도 하고, 마땅한 추적 수단이 없는 지금 미리 하나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침반은 대충 적당히 좋은 걸로 하나 사고, 거머리는 카르텔에서 사면 되겠군.’ 평범하지 않은 물건? 대충 카르텔을 뒤지면 나온다. 비싸기는 하지만 지속적인 벌이가 있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달마다 500만 원 이상 사용해야 한다. 연금술 자체가 돈 먹는 금쪽이라서 이쪽도 뭐 크게 강박처럼 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끄으으…….”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기지개를 켠 뒤, 문 앞에 도착한 도시락을 챙겨 가볍게 한 끼 식사를 해결했다. 가능하면 직접 만들어 먹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시켜 먹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식사를 해결한 뒤에는 곧바로 연금술 제작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했다. 나침반을 제외한 다른 2개도 결국에는 만들어야 하니 거기에 필요한 것들도 미리 사들였다. 평범한 쇼핑 업체로 구매한 재료들은 당장 내일이나 모레가 되어야 도착할 거고, 카르텔에서 결제한 것들은 12시간 후에 집으로 날아갈 것이다. 그전까진 딱히 할 게 없어서, 이안은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휴대폰을 꺼내 든다. 그대로 커뮤니티에 접속하여 익숙하게 개념글들을 훑어보았다. 그중에는 이안이 언급된 글도 하나 존재했다. [오늘 뉴비 봤어.] [심해아귀] 생각보다 되게 멀쩡하게 생겼더라. 근데 실제 말투랑 커뮤니티 말투랑 너무 달라서 좀 그랬어. 아, 어디서 만났는지는 비밀이야. [추천 15][비추천0] [댓글] -왜 너만 만나. ㄴ심해아귀: 너 같은 쉰내 나는 남자는 보기 싫대. ㄴ시발아. -테이밍마스터: 코자였음? ㄴ심해아귀: 좋은 냄새 나는 남자였어. ㄴ테이밍마스터: (마법사 펀치 콘) ㄴ심해아귀: 열등감 추해. ㄴ테이밍마스터: 뭔 열등감이야. 난 아내가 셋이라고. ㄴ네귀에벌레: 아내 셋(팔척 귀신이랑 콩콩 귀신, 벤시를 사지 절단 인형으로 만들며) -유니콘사랑개: 동정이었음? ㄴ심해아귀: 꺼져. ㄴ유니콘사랑개: ㅋㅋ 며칠 전에 작성된 게시글이었다. 이안은 댓글을 남길까 고민하다가, 그냥 그대로 넘어갔다. 관리국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진 않았으니 딱히 거슬리는 내용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따로 연락처를 교환하지도 않았군.’ 뭐, 다음 기회가 있을 테니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다. 이안은 나머지 개념글을 쭉 정독하고, 뻐근한 손목을 풀었다. 그때였다. 돌연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짧게 진동하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수신자는 한유나였다. 번호를 교환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전화를 걸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 흔한 메시지도 나누지 않았었는데, 좀 뜬금없었다. ‘무슨 일이지.’ 이안은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아 스피커를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ㅡ” “신이안 씨!”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유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귀가 울리는 듯한 큰소리에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가 곧바로 말을 이어 붙였다. “잠깐 남친 행세 좀 가능할까?!” “……?” 이안이 얼굴이 미묘하게 찌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