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은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 몇 가지 사안을 더 확인했다. 두 요원은 그의 모든 물음에 친절히 답해주었다. 다행히 그에게 불이익이 되거나, 거슬리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약서의 공백에 몇 가지 조항을 더 추가한 뒤 사인했다. 추가한 조항은 별거 없었다. 임무에 나갈 때, 자신의 안위를 가장 먼저 책임질 것. 그리고 믿을만한 인원으로만 선정해서 팀으로 같이 내보낼 것. 이 2가지가 전부였다. 이기적인 조항이었지만, 굳이 이타적으로 굴 필요는 없었다. 이안은 자신을 영화에나 나올 법한 영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사가 되기는 했지만, 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자신의 안전이 가장 소중했다. 남의 희생이나 사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미친놈은 아니더라도,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우울해하거나 슬퍼하지는 않는다. 그런 영웅심이나 이타심 따위, 그에겐 없었다. 목숨이 초개처럼 버려질 수도 있는 신비로운 세상에서 이기심은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그러니 조항을 작성하는 것에 있어서 죄책감은 없었다. 탁. 이안은 사인을 끝마치고 펜을 내려두었다. 김이서가 그가 작성한 내용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는 충분히 들어드릴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요원들이 마법사님을 챙기는 것과 별개로 희생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희도 저희 방침이 있는 터라…….” “희생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필요할 때 지켜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문제없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김이서를 뒤로하고 이안이 주머니에 든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피울 생각은 아니었다. 피우고 싶었지만, 일단 두 사람이 떠나기 전까지는 버텨야 한다. 집에서 담배를 피울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그럼 이야기는 다 끝난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이 계약서를 들고 관리국으로 돌아가 최종 검토를 한 후, 결과가 나오면 저희 쪽에서 메시지를 보낼 겁니다.” “계약이 체결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나?” “없습니다.” 즉답이었다. 이안은 픽 웃으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에, 박민아에게 서류를 건네주는 김이서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만약 내가 협력을 거절하고 너희를 돌려보냈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처리 대상으로 올라가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마법사가 관리국의 제안을 거부할 경우, 해당 마법사는 신비와 깊은 연관을 지닌 인물로 등록. 관리국의 원격 감시 대상이 됩니다.” 온화적이라고 하면 온화적이고, 난폭하다고 하면 난폭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안은 손에 쥔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어찌 됐든 마법사들은 신비를 불러들이는 존재. 그들로부터 파생되는 신비가 민간인을 죽일 수도 있으니,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행하는 것이 감시입니다. 암살 같은 경우…… 일반인을 건드리는 마법사나 위험도가 지극히 높은 마법사를 대상으로 이루어집니다.” “…….” “다만 마법사를 죽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 저희도 매우 많은 준비 과정을 거치는 편입니다.” “이런 걸 마법사에게 알려줘도 괜찮나?” “신뢰를 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이서가 차분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이안은 그녀의 분홍색 머리카락과 칙칙한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숨을 길게 토해냈다. “그래, 알겠다. 어쨌든 일반인만 건드리지 않으면 암살은 하지 않는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암살된 마법사의 수는 알려줄 수 있나?” “한국은 없습니다.” “……그래?”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대답.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사안도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안은 그 뒤로 두 사람과 짧은 대화를 나누다가 그들을 보내주었다. 김이서와 박민아는 이안에게 협력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집. 이안은 잠깐 멍하니 벽에 기대어 서서 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담배를 입에 물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제 막 2월로 진입한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앞으로 한 달에서 두 달 정도만 있으면 봄이 찾아오겠지만, 지금은 겨울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뼈를 콕콕 쑤시는 듯했다. 그 감각이 머리 회전에 도움이 되었다. 이안은 담배 끄트머리에 불을 붙이고 사락사락 내리기 시작한 눈을 시야에 담았다. ‘관리국과 엮이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건 감시를 말하는 거였나.’ 관리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결국 감시가 따라오는 건 매한가지였다. 자아가 강한 마법사들이 그 속박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차라리 싸우고 말지, 평생 관리국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갈 위인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한 명 있기는 했다. 관리국과 협력하는 마법사 중 하나. 유일하게 그들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는 존재가 딱 한 명 있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감시를 그냥 받는 거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괴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머리를 왜 궁금해하겠는가.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기는 게 제일 좋았다. 아무튼.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어째서 관리국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지, 그 이유를 알아냈다. 이것만으로 나름의 수확이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커뮤니티에서 만난 마법사들. 예를 들어 이서아나 한유나, 대모 등의 인물에 대한 정보를 관리국에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리 의리 따위 없는 마법사들의 사회라고 한들, 불문율은 있는 법이다. 하루아침 만에 모든 마법사들의 주적이 되기 싫다면 그딴 짓은 해선 안 된다. “후우…….” 이안 허공에 연기를 내뿜으며 주변에 CCTV가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이곳은 사각지대였다. 그는 담뱃재를 털어내고, 손을 펼쳐 재창조의 손길을 소환했다. [우웅.] 그의 손아귀에 잡히자마자 작게 진동하는 새하얀 마도서. 그 모습이 마치 왜 이제야 불렀냐고 투정 부리는 것만 같아서, 이안은 픽 웃으며 마도서의 표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아마 현재 관리국은 이안이 가지고 있는 마도서가 심해견문록 하나뿐일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앞에서 대놓고 꺼낸 게 심해견문록뿐이니, 재창조의 손길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 애초에 존재하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터. 테마파크에서 마도서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얼굴을 철저하게 가린 상태였다. 덕분에 관리국에서도 테마파크에서 마주친 ‘마법사’와 병원에서 협력한 ‘마법사’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용한 마법이 완벽하게 다르니, 같은 인물이라 예측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게 가능했으면 관리국에서 진작에 모든 마법사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었겠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정보의 불균형이 발생한 건 이안에게 있어서 이로운 일이었다. 괜히 마도서를 2권이나 가지고 있다며 설치는 것보다야 하나는 숨겨두는 게 더 나았다. 확률은 현저하게 낮지만, 관리국이 갑자기 눈깔이 확 돌아서 자신을 배신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 않나. 예상할 수 없는 비수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서 나쁠 게 없었다. ‘카르텔 의뢰를 처리할 때는 양쪽 다 쓰겠지만, 적어도 관리국과 협력할 때는 견문록만 써야겠어.’ 화력 하나만큼은 뛰어나지만, 범용성이나 안정성은 재창조의 손길보다 훨씬 떨어지는 심해견문록. 그러나 심해견문록에도 마냥 소환 마법만 기록된 것은 아니었다. 재창조 마법처럼 상대를 즉사시키는 건 불가능해도, 다양한 공격 마법들이 마련되어 있다. 그것들만 사용해도 임무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족쇄를 차고 다니는 느낌이라 선호하지 않을 뿐이다. 뭐, 전달자나 그에 비견되는 생물 정도는 필요할 때 소환해도 리스크가 크게 없으니, 적당히 상황을 좀 보며 소환해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후우.” 생각을 정리한 이안이 구름을 향해 연기를 내뱉고 재떨이에 연초를 비벼 꺼트렸다. 지금 이렇게 대비를 해놓는다고 한들, 결국 실전에 들어가면 변수가 너무 많아서 계획대로 잘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계획이 없는 것보다야 낫다. 이안은 연초를 재떨이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이제 좀 쉴 시간이었다. * 김이서와 박민아는 이안의 집에서 멀어질 때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 더 이상 그의 집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박민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런 마법사가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그녀는 걸치고 있던 정장 외투를 벗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축축한 식은땀이 기분 나쁘게 셔츠와 속옷을 적셨다. “생긴 걸 보면 한국인은 확실한데…… 어렸을 때 마도서를 주운 걸까? 아니면 마법사 가문?” “한국에 마법사 가문이 어디 있어.” 김이서가 운전대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흔히 순혈이라고 부르는 마법사 가문은 대부분 다 유럽에 있다. 영국이 가장 많고, 그다음이 프랑스와 독일이다. 다른 국가에도 없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아시아 쪽에는 하나도 없다. 마법보단 무속 신상이 더욱 발달한 지역이라, 한창 대항해시대가 펼쳐졌을 때도 마법사들은 아시아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 최소 10년도 더 전에 마도서를 주운 거겠지. 그게 설명이 안 돼. 갑자기 저 정도 되는 마법사가 나타났을 리도 없고.” “그렇겠지? 후우…… 대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몸을 숨기고 살던 걸까?” “몰라. 마법사들의 생태계는 알려진 게 워낙 없잖아. 자기들끼리도 정보 공유를 잘 안 하는 족속들인데 뭐…….” “음침해.” 민아는 그리 중얼거리며 창밖을 응시했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몸을 반쯤 숨긴 채 사방으로 노을빛을 흩뿌리고 있다. 그녀가 태양의 반대편에서 떠오르는 중인 달을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마도서, 정체가 뭐였을까.” “모르겠어. 다만 격이 높은 건 분명해.” 즉답이었다. “최소 레메게톤과 동급, 아니면 그 이상이야.” “……혹시 크툴루 신화랑 관련된 마도서인 거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크툴루 신화에 등장하는 마도서들. 무명 제사서, 에이본의 서, 이스테의 노래 등. 단순한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마도서는 현실에 구현되었을 때 마도서가 아니라 일종의 괴이로서 취급된다. 이야기가 힘을 가지게 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놈들이 마법을 아예 가르쳐주지 않는 건 또 아니었다. 가상의 마도사, 마법사들이 작성한 책이기에 위험성이 상당한 수준이지만, 그 지식 또한 대단하기에 많은 마법사들이 찾아 나서는 편이었다. 다만 이런 가공의 마도서들에겐 치명적인 단점 하나가 존재했다. “크툴루 신화 마도서들은 전부 소유주를 시한부로 만들잖아. 시식교전의처럼 불사를 연구하는 마도서가 아니라면 전부 5년 이내에 죽어.” “……아, 그런 내용 봤던 것 같아.” “워낙 사례가 없어서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 나도 따로 찾아낸 내용이야.” 김이서가 다시 막히기 시작한 도로에 살짝 짜증을 내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네크로노미콘처럼 실존하는 마도서라면 또 모를까, 나머지는 가지고 있으면 절대 10년을 못 넘고 죽어. 그러니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마도서는 크툴루 신화랑 관련된 물건은 아닐 거야.” “그럼 뭘까?” “굳이 궁금해하지는 말자.” 김이서가 대답했다. “나는 그 사람이 관리국에, 그리고 내 목적에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족해. 그리고…… 세상엔 모르는 게 더 나은 일도 많으니까.” “…….” “우리는 우리 일만 하자.” “……응.” 박민아가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곧장 관리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