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시리얼이었다. 이안은 숟가락으로 시리얼을 퍼먹으면서 TV를 시청했다. [최근 수도권에서 남녀를 불문한 납치 사건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에게 공통점은 발견하지 못했으며, 당국은 해당 사건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고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노력ㅡ] 띠링. 뉴스를 보고 있자 돌연 휴대폰에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안이 시리얼을 우물거리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수녀님: 이안 요즘 잘 지내니?] “크흡!” 난데없는 수녀님의 메시지에 목구멍이 턱 막혔다. 사레가 들린 목구멍에서 연신 기침이 흘러나오고, 콧구멍이 시큰거렸다. 그는 시리얼 우유를 들이켜 목을 한 차례 축인 뒤, 곧장 자판을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나: 저야 잘 지내죠. 수녀님은요? 잘 지내세요?] 수녀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딱히 같은 가톨릭을 다니는 자매님은 아니다. 애초에 이안은 무교였다. 살면서 진심으로 신을 따르고 섬긴 적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수녀님이란, 단순히 어린 시절을 보낸 보육원 선생이자 신실한 천주교 신자일 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어머니 같은 존재고, 더욱 깊이 파고들면 딱히 그 정도 사이는 아닌 애매한 관계. 딱히 어색한 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평소에도 기념일 안부 인사 말고는 잘 보내지 않는 편이고. 덕분에 좀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아무런 날도 아닌 상황에 먼저 연락을 받는 건 또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신비랑 엮이셨나? 아니면 진짜 그냥 안부 인사? 혹시 다른 졸업생들이 무슨 사고라도 친 건가.’ 알 수 없었다. 이안은 퍼먹던 시리얼을 그대로 놔두고, 답장이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수녀님: 나도 하느님의 도움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단다. 딱히 아픈 곳도 없어.] 잠시 후, 수녀님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자리에 앉아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렸다. [나: 다행이네요. 그보다 무슨 일 생겼어요? 갑자기 연락을 다 주시고.] [수녀님: 음, 생기기는 했지. 다만 큰일은 아니야.] [나: 뭔데요?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수녀님: 후후, 역시 그렇게 말해주는 건 이안밖에 없구나. 나머지 아이들은 다 내 연락을 무시하던데.] 수녀님은 그렇게 말하고 잠깐 뜸을 들이다가, 다시 문자를 보내왔다. [수녀님: 혹시 우리 보육원에 잠깐 올 수 있니?] * 이안이 지냈던 보육원은 인천공항에서 살짝 멀리 떨어진 자그마한 성당이었다. 근처에 대성당이 하나 있어서 찾아오는 교인들이 많은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유동 인구까지 많은 지역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법 한적하게 지냈었다. 성당은 평화로웠고, 거기서 지내는 삶도 고리타분한 것만 빼면 나쁘지 않았고. ‘같은 원생들이랑 싸우면 늘 수녀님이 달려와서 말리고 혼냈는데.’ 이젠 모두 과거의 추억이었다. 이안은 흐릿하게 웃으며 택시에서 내려 보육원 근처 거리를 걸었다. 익숙한 풍경을 하나하나 스칠 때마다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좋았던 기억도 있었고 나쁜 기억도 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고아치고는 풍족하게 살았던 것 같았다. 딱히 차별을 받지도 않았으며 수녀님이나 주임사제에게 얻어맞지도 않았으니……. 아니, 애초에 그게 당연한 건가. 이안은 쓰게 웃으면서 근처 치킨집으로 들어가 보육원 사람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치킨을 주문했다. 예전 같았으면 꿈도 꾸지 못할 지출이지만, 지금이야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치킨 20마리 확인 되셨고요, 요청하신 주소로 배달 갈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 다음에 또 오세요!” 딸랑. 주문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몇 갑 산 후, 슬슬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한 성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자그마한 부지. 정원이 딸린 보육원이자 성당 건물의 외부를 처음 보는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그들의 뒤로,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수녀 한 분이 걸어 나왔다. “얘들아, 뛰면 안 되지. 천천히 걸어요.” “네, 수녀님!” 그녀의 말을 따라 아이들이 뛰지 않고 걸어서 어딘가로 이동했다. 늙은 수녀는 그들을 통제하다가, 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는 이안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이니?” “네.” 이안이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녀님.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지. 어이구, 많이 컸구나. 독립한 뒤로 얼굴을 보는 건 처음 아니니?” “그렇죠. 고등학생부터는 따로 나가 살았으니까요.” “참, 그때를 생각하면 머리가 다 아프구나. 아르바이트로 돈 좀 모았다고 바로 독립이라니. 걱정 많이 했었단다.” 이안이 멋쩍게 웃었다. 수녀는 고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에게 나머지 아이들의 통솔을 맡기고 이안과 같이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익숙한 기도실을 지나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가자, 수녀가 이안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이안은 빈자리에 앉아 그녀가 건네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차라고 해봤자 보리차 티백을 넣은 기성품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가볍게 묻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너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잠깐 병원에 좀 가줬으면 해서 그렇단다.” “병원이요?” 이안이 눈을 살짝 찌푸리며 묻자 수녀가 고개를 주억였다. “얼마 전에 많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아이가 하나 있는데, 마침 오늘이 경과보고 날 이라서 말이야. 내가 매일 찾아가는 편이지만, 오늘은 중요한 종교 행사가 있어서 좀 힘들 것 같구나. 그래서 대신 가줄 사람을 찾고 있었단다.” “아…… 그래서 다른 졸업생들한테도 문자를 돌리신 거고요?” “그래. 알잖니, 내가 아는 인맥이라고 해봐야 같은 형제자매들밖에 없다는 거. 근데 그분들도 나랑 같이 행사에 참여해야 해서, 따로 맡길 사람이 없더구나. 그나마 친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독립한 원생들 말고는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었어.” “음…….” “근데 너를 제외하면 아무도 연락을 안 받더구나. 하여튼…….” 수녀는 툴툴거리면서 보리차를 홀짝거렸다. 이안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요. 행사가 끝날 때까지 같이 있어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경과보고만 듣고 나와도 되는 겁니까?” “기왕이면 같이 있어 주는 게 좋지만, 그냥 보고만 듣고 나와도 상관은 없단다. 너무 시간을 잡아먹을 수는 없잖니.” “저야 오늘 약속이 따로 없어서 괜찮습니다. 그럼 행사가 끝날 때까지 병원에 있겠습니다.” 이안은 당분간 마법에만 집중하며 신비와 관련된 일은 쉴 생각이었다. 돈도 제법 많아졌으니, 하루를 가볍게 지낼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 “그래 주겠니? 고맙구나.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갈 테니까, 조금만 고생해ㅡ” 그렇게 이안의 대답에 수녀의 반응이 이어지던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했다. 허리까지 닿는 금발 머리카락과 나른하게 풀린 보랏빛 눈동자. 아담한 체구에 두꺼운 코트를 걸친 소녀 한 명이, 방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을 보고 눈을 끔뻑거렸다. “누구?” 그녀의 입에서 어눌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수녀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소녀를 보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쪽은 제가 어릴 때 잠깐 돌봐주었던 아이입니다. 잠깐 부탁할 게 있어서 이리 불렀습니다.” 이번에는 수녀가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내뱉었다. 설마 수녀가 이탈리아어를 할 줄은 몰랐던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녀가 수녀를 응시하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무슨 부탁이에요?” “최근 병원에 입원한 아이가 있는데, 저희 행사가 끝날 때까지만 잠깐 돌봐달라는 부탁입니다. 자매님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아…… 그럼 저도 그쪽으로 갈래요. 바티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행사에 얽매일 수 없죠.” “예? 아니, 안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바티칸에서 오신 수녀님이라면 행사는 참가해야죠. 이런 타국이라고 한들, 그분에게 기도는 올려야 해요.” “그건 제가 따로 할 수 있어요. 나중에 참회하면서 기도도 올릴 테니까, 이번 행사는 빠질게요. 하느님도 이해할 거예요. 제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임무가 있으니까요.” “……혹시, 처음부터 행사에 빠진다는 말을 하려고 오신 겁니까?” “네. 빠질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수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이안을 돌아보았다. “나, 체칠리아 카포네에요. 이름, 뭐예요?” 체칠리아가 어색한 한국어로 물었다. 이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름을 알려주었다. “신이안입니다.” “이안. 좋은 이름.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이에요. 나이스.” 뭐가 나이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안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수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뭐 하는 분입니까?” “……바티칸에서 한국 성당을 조사하려고 보낸 수녀란다. 굳이 왜 조사를 하려는 건지는 잘 모르지만, 교황청의 인증을 받은 상태라 나도 그러려니 하는 중이야.” “바티칸이요? 거기서 온 사람이 왜 보육원에 있는 겁니까?” “원래는 대성당에 있었단다. 하지만 자꾸 기도를 강요하고 예배에 나오라 시킨다고 거처를 여기로 옮겼지. 막무가내인 분인데, 그렇다고 신앙이 없는 건 또 아니라는 게 참…… 하아.” 수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이안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같이 가야 할 것 같구나. 괜찮겠니? 지금이라도 그냥 저분한테 맡기고 너는 할 일 하러 가도 상관은 없단다.” “음…… 저는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여기까지 오기도 했고, 일정도 따로 없어서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면 저야 좋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안의 머리는 차갑게 돌아가고 있었다. 바티칸이 어떤 곳인지는 이안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커뮤니티에 언급된 횟수도 극히 드물었고, 알려진 정보도 많지 않았다. 신비에 대항한다는 사실만 알뿐, 그 이상은 잘 몰랐다. 어쩌면 이번 동행이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좋은 기회일 지도 모른다. 언젠가 충돌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테니, 미리 알아둬서 손해를 볼 일은 없었다. ‘내가 마법사라는 건 숨기고, 빨아먹을 것만 빨아먹자.’ 이안이 그렇게 생각하며 체칠리아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잘 부탁드려요, 체칠리아 수녀님.” “나만 믿어요. 나 강해요.” 체칠리아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빈약한 가슴을 두드렸다. 짤랑. 그녀의 십자가 목걸이가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