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삐진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안은 구석에 틀어박힌 마도서를 응시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재창조의 손길아. 난 도대체 네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구나. 딱히 둔기로 쓰지도, 방패로 쓰지도 않았는데.” [우웅.] “지금 그것도 모르냐는 뜻으로 진동한 거냐? 그럼 내가 어떻게 아니? 말이라도 하던가.” [우웅!] “네가 말을 못 하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우웅……!!] “아오, 됐다. 그냥 그러고 있어. 난 얘나 읽고 있을 테니까.” 결국 소통을 포기한 이안이 심해견문록을 들어서 펼쳤다. 심해견문록은 선택받은 게 기쁜지 몸을 들썩이며 이안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표지를 사락 섬기자 아무런 저항감 없이 페이지가 넘어갔다. 이안은 침대에 기대어 앉아 소개글부터 천천히 다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개글은 딱히 특별하지 않고.’ 외신의 이명과 작성된 마법만 기록되어 있을 뿐, 본명은 가려져 있는 형태. 재창조의 손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충 훑어보고 페이지를 넘긴다. [본 마도서의 저자이자 본래 주인, 외해의 주인은 처음 보는 100퍼센트 적합체에게 매우 깊은 호의와 흥미를 지니고 있다. 그녀는 마법으로 인한 불이익을 제외하면 그 어떤 피해도 주인에게 주지 않겠다고 별자리의 멸망 앞에서 맹세했다.] 별자리의 멸망. 난데없이 스케일이 큰 내용이 튀어나왔지만,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외신이 우주 밖에서 헤엄치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중요한 건 100퍼센트의 적합성을 지닌 적합체라는 내용이다. 다행히 광기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조심해야 할 건 소환물에게 역으로 잡아먹히는 상황뿐인 모양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평소에 고기를 좀 챙겨서 다녀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외해에 사는 가장 약한 생물이 사람만한 크기의 괴이 3마리와 큼지막한 짐승 사체 하나를 통째로 먹고 난 뒤에야 만족했다. 그만한 양의 고기를 준비하려면, 최소한 아이스박스 5개 정도를 고기로 꽉꽉 채워서 다녀야 할 텐데.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차라리 소환하지 않는 게 더 낫다. 게다가 가장 약한 생물이 그 정도 고기를 탐하는 게 확인된 이상, 좀 강한 놈들은 그보다 곱절은 더 많이 처먹을 게 분명했다. 그놈들을 위한 고기를 미리 준비하면, 그 끝에 기다리는 건 파산뿐이었다. ‘그냥 상황에 맞춰서 소환하는 게 더 낫겠어.’ 사실 돈 문제뿐만 아니라 매번 의뢰를 갈 때마다 아이스박스를 챙겨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진 게 몸밖에 없는 마법사라면 또 모를까. 이안은 평소에도 물건을 덕지덕지 챙겨가는 연금술사였다. 여기에 아이스박스까지 들고 다니면 다른 상황에 유연한 대처가 불가능했다. 소환 마법이 즉발이라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닌 이상 고기는 짐덩이일 뿐이다. “으음…….” 이안은 생각을 정리하고 냉수 한 컵을 챙겨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렇게 마도서를 읽다가 슬쩍 눈동자를 돌리니, 구석에 박혀있던 재창조의 손길이 방 한가운데까지 기어 온 모습이 보였다. “…….” […….] 이안과 마도서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괜히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우웅!] 침묵을 깨트린 것은 심해견문록이었다. 재창조의 손길에게 시선이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심해견문록은 몸을 부르르 떨며 표지를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명백한 질투 표현이었다. 이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견문록의 표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른 손을 슬쩍 내밀었다. “……소환.” 의지를 담아 중얼거리자 거실 중앙에 있던 마도서가 이안의 손아귀에 잡힌다. 아까까지만 해도 몸을 부들부들 떨던 재창조의 손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화가 어느 정도 풀렸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그냥 체념한 것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언제까지 두 마도서가 서로 질투하고 밀어내는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안은 독서를 그만두고 마도서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교통 정리를 한번 하자.” 그가 두 마도서를 가지런히 놔두고 침대에 앉았다. 마도서의 동시 사용이 불가능한 이상, 상황에 맞춰서 다루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다. 때로는 재창조의 손길만 사용해야 하고, 때로는 심해견문록을 사용하게 될 텐데. 그럴 때마다 서로 질투하면 독밖에 안 된다. 마도서들이 사리 분별을 못하고 의뢰할 때마다 투정을 부리지는 않겠으나, 이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매번 달래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슨 보모나 애인도 아니고. 엄연히 공생 관계인 이상, 서로 양보할 건 해야 했다. 설마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커뮤니티에서 봤던 것처럼 서로 싸우다가 ‘가지지 못하면 부숴버리겠어’라며 덤벼들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러니 미리미리 방지는 해둬야 한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서로 질투하지 말라고는 안 하겠지만, 그래도 그걸 티 내서 토라지는 경우는 없도록 하자. 내가 죽으면 너희도 곤란하잖아.”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그냥 웅웅 진동하는 책들을 상대로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기분이 제법 이상했다. 그래도 끝까지 말을 이어 갔다. “나 또한 너희들을 동반자이자 아끼는 책으로 대할게. 더 원하는 거 있으면 페이지에 적어서 보여줘.” [우웅.] [웅! 우웅!] 재창조의 손길이 진지하게 반응하고, 심해견문록이 활발하게 진동한다. 견문록은 곧장 표지를 활짝 펼쳐서 소개글 아래에 새로 적은 문장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본 마도서는 본 마도서의 주인, ‘신이안’이 잘 때 옆에 놔두고 잤으면 한다.] 별거 아닌 부탁이었다. 이안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재창조의 손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재창조의 손길도 요구사항을 드러낸 상태였다. [평소에 표지를 자주 관리해 주었으면 한다.] 다행히 이쪽도 별거 아닌 요청이었다. 이안은 그 자리에서 마도서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두 마도서를 번갈아 읽으며 부족한 지식을 채웠다. 다행히 그 이후로 두 마도서가 서로를 질투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이안도 온전히 독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역시 범용성 자체는 재창조의 손길이 더욱 뛰어난가.’ 심해견문록에 적힌 마법은 사실 그렇게까지 특별하지는 않았다. 소환수들의 특징과 설명이 광활하게 쓰여 있을 뿐, 소환 마법을 제외한 다른 마법들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물론 수압을 무시하는 마법이나 심해 속 어둠을 꿰뚫어 보는 마법은 상당히 유용해 보이기는 했지만, 평소에도 사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재창조의 손길을 일상생활에서 쓸법한 마법, 예를 들어 어질러진 방을 청소하는 마법이나 구겨진 옷을 펴는 마법 등. 가볍게 쓸 수 있는 마법이 다수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들도 제법 많이 작성되어 있었다. 이안은 당분간 연금술이 아니라 이 마법에 더욱 초점을 맞춰볼 계획이었다. 언제까지 직접 만든 도구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혹시라도 연금술 물품들이 모두 사라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미리 대비는 해두는 게 옳았다. “일단 벽을 타고 오를 수 있는 마법부터 한번 시도해 볼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재창조의 손길에 적힌 마법진을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그의 방에서 불이 꺼진 건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난 후였다. *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다 발랑 까졌냐?] [유니콘사랑개] 어떻게 순결한 애들이 이렇게 없지? 지금 마법 써서 처녀랑 동정 찾고 있는데 거의 없음 야스 좀 그만해! [추천 0][비추천 0] [댓글] -네귀에벌레: 대체 뭔 짓을 하길래 순결한 육체를 찾는 거임? ㄴ유니콘사랑개: 마법. ㄴ네귀에벌레: ㅇㅎ ㄴ유니콘사랑개: 내가 이 짓만 지금 몇 달째에 관리국 추적도 잘 피하는 중인데, ㅅㅂ 순결한 몸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마법을 못 쓴다. ㄴ네귀에벌레: 그래서? 설마 일반인까지 건드는 건 아니지? 그거 들키면 대모가 가만히 놔두질 않을 텐데. 골목길에 서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혀를 쯧 차며 화면을 껐다. “대모가 뭐 어쩌라고. 배척할 거면 애초에 받아주지를 말던가.” 대모가 들었으면 매우 억울했을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대모는 없었고, 있는 거라고는 짙은 술 냄새와 쌓인 쓰레기 냄새뿐이었다. 남자가 사랑하는, 정겹고도 역겨운 향기. “후우.”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박고, 유리병에 담긴 붉은 핏물을 눈동자에 톡톡 떨어뜨렸다. 그리고 가만히 입술을 달싹였다. “깨끗한 육체를 찾아라. 그 육신을 내게 보여라.” 츠즈즉. 그의 눈자위가 붉게 물든다. 남자는 후드를 푹 눌러쓰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민들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비처녀, 걸레…… 빌어먹을. 어떻게 미성년자처럼 생긴 놈들도 다 저렇게 더러운ㅡ’ 생각하는 순간, 그의 시선에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생긴 건 평범했고, 옷도 단정하게 입은 남성이다. 나이는 대충 대학생으로 보인다. ‘깨끗한 인간이군.’ 드디어 찾던 재료를 발견했다. 남자는 눈에 인공 눈물을 통째로 들이부어 핏물을 씻어내고, 남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밝은 거리를 벗어나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들어간다. 남자는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며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는 마법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요, 누구세요? 스토커예요? 왜 자꾸 따라와요.” “스토커는 아니야.” 마법사가 싱긋 웃으며 남자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주머니에 넣어둔 유리병을 바닥에 던져 깨트렸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 담긴 핏물이 밖으로 흐른다. 핏물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다가, 남자를 향해 쇄도하여 그의 호흡기를 틀어막았다. “읍!? 크흐읍?!” 남자가 얼굴을 뒤덮은 피에 당황하며 손을 휘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법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마법사는 곧바로 피에 물을 부어서 깨끗이 씻어내고, 남자를 둘러업어 근처에 주차해 두었던 차에 집어넣었다. CCTV를 향해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뒷자리에 던져놓은 남자의 손목을 손잡이에 묶는다. 발목도 케이블 타이 5개로 세심하게 묶어서 도주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입에는 테이브를 겹겹이 붙여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한다. 이걸로 준비는 끝이다. 마법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석에 앉아 키를 꽂았다. “인간 하나당 뱉어낼 수 있는 피가 대충 5L…… 적당히 관리하면서 뽑아내면 몇 달은 쓰겠네. 좋았어.” 마법사가 그리 시시덕거리며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이었다. 돌연 휴대폰이 진동하며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확인했다. 영어로 적힌 글자가 그의 눈동자에 비쳤다. [에디: 최근 한국에 마도서를 새로 주운 마법사가 있나? 있으면 알려주길 바란다.] 아주 오랜만에 도착한 옛 동업자의 메시지. 남자는 능숙하게 차를 돌리면서 다른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나: 5000달러.] [에디: 빌어먹을 새끼. 계좌불러라.] 남자가 낄낄 웃으며 계좌를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