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시베리아에 있는 5성급 호텔. 이미 괴이에게 잡아먹혀, 괴담 호텔 자체가 되어버린 건물, 그 최상층에 있는 방문을 열며 누군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수염을 깔끔하게 밀어버린 중년 남성. 세간에는 괴이를 부리는 마법사라고도 유명한 에디 하워드였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던지며, 미리 호텔 방에 들어와 있던 남자를 노려보았다. “원숭이 꿈이 갈취당했다.” “…….” “장소는 한국이었어. 근데 나타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대로 소멸했다. 관리국의 소행이라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고.” “한국 관리국은 원래도 유능하기로 유명하지 않았나요? 저기 게을러터진 중국이나, 아예 방치하다시피 하는 여기 러시아보단 훨씬 나은 것 같은데요.” “아무리 그래도 괴이가 발생하자마자 위치를 특정하고 사냥할 정도는 아니야. 분명 무언가 있다.” 에디는 그렇게 말하며 원탁에 앉아 있는 남자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금발에 녹안을 지닌 남자는, 싱긋 웃으며 에디에게 와인 한 잔을 내밀었다. “좀 마시고 화 풀어요. 그러다가 늙어.” “……후, 빌어먹을.” 에디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와인을 꿀꺽꿀꺽 삼켰다. 남자가 그 모습을 보며 가만히 턱을 괬다. “그보다 한국이라…… 제법 특이한 곳까지 날아갔네요. 거기 이상한 단체 되게 많은데.” “나도 알고 있다. 무슨 영국도 아닌 주제에 마법사 커뮤니티가 있고, 무당? 이라는 이름의 엑소시스트 단체도 있더군. 초능력자들도 똘똘 뭉쳐 있고.” “은근 사교성이 좋은 사람들만 있나 봐요. 아니면 그냥 뒤통수 맞기 싫어서 뭉친 걸 수도 있고요.” “바로 옆 나라인 일본과는 성격이 너무 달라. 거기도 특이한 놈들이 있기는 하지만, 주의해야 할 건 무녀들이랑 관리국뿐이거늘.” “어쩔 수 없잖아요. 그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불만만 쏟아내지 말고, 슬슬 계획 이야기나 할까요.” 남자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싱긋 웃었다. 에디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그 얼굴을 칼로 쑤셔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으나, 이내 꾹 참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누가 뭐라고 한들, 눈앞의 남자는 한 마법사 단체를 이끄는 수장이었고, 외신의 마도서를 습득한 주인이었다. 함부로 덤벼들었다간 역으로 살해당할 위험이 컸다. [신비 묵시록]. 자신이 직접 죽인 대상을 신비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가능한 마도서.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개장한 테마파크 역시, 그가 직접 손을 쓴 결과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생명의 수만 해도 가히 압도적이다. 인도와 중국에서 그의 모습이 포착된 건 우연이 아닌 것이다. “…….” 당장 그의 뒤쪽에도 그를 지키듯이 서 있는 괴이가 한 마리 있었다. 머리는 없고, 그 대신 그 자리에 책을 꽂아 넣고 있는 여성 경호원 하나. 본래는 인간이었으나, 어느 시점부터 마도서 보관함이 된 그것이 한 손에 총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을 쥔 채 에디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중이었다. 허튼짓을 했다간,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에디는 아직 죽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꽉 쥐었던 주먹을 풀고,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계획을 말하는 거냐.” “그거 있잖아요. 제가 당신에게 신비를 제공하면, 당신은 그걸 이용해서 성장. 그 후에 제가 요구하는 걸 하나 들어줄 것. 그게 저희 계약 아니었어요?” “……그걸 보통 계획이라고 부르나?” “뭐, 제가 그리는 큰 그림에는 포함되는 일이니까요. 아무튼, 그 계획의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진 건 확실한 것 같네요.” 남자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고 에디를 쳐다보았다. “어이없게 기회 하나를 날렸으니, 당분간은 또 괴이 성장에만 집중해야겠네요. 이번에는 또 어떤 걸 제공해 드릴까요? 저번처럼 조건만 듣고 랜덤으로 뿌려 드려요? 가챠 게임처럼 도파민 좀 나오게?” “……그래. 통제가 쉽고 그러면서도 성장의 여지가 충분한 놈으로 다오. 또한 등장하는 국가가 한정적인 곳으로 해줬으면 좋겠군.” “음…… 그래요. 적당히 추려서 보낼게요. 역으로 죽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미소 지었다. “자, 그럼 이제 정산 타임이네요. 신비 하나와 그 통제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제 명령 하나를 들으셔야죠.” “…….” 에디는 입을 꾹 다물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잠깐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 이게 좋겠네요. 최근 마도서가 이상한 말을 자꾸 내뱉거든요. 만물의 재구성이라는 분이 적합자를 찾았다던가, 외해의 주인이 마도서를 지구에 내렸다던가. 뭐 그런 거요.” “…….” “그 두 개체 모두 외신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들이 쓴 마도서의 위치 파악 및 주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오세요. 기간은 넉넉하게 드리죠.” “……이미 외신의 마도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다른 외신의 것도 탐하는 건가?” “하하, 뭘 당연한 이야기를 하세요.”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처리할 건 확실하게 처리해야죠.” *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 바티칸. 교황이 통치하는 땅이자 전 세계에 있는 교회를 관리하는 교황청이 있는 자그마한 독립국. 대외적으로는 평범한 종교적 성지나 다름이 없는 곳이지만, 그들 또한 엄연히 신비에 발을 들이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성격은 달라졌으나, 이단 심문관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신비들을 상대로 통용되는 중이었다. 이를 제외하더라도, 신비와 내통하거나 타락한 존재들을 척살하는 업무 또한 맡고 있는 것이 현재의 이단 심문관이었다. 이들은 굉장히 엄숙한 교리와 신앙으로 똘똘 뭉쳐져 있어서, 대부분은 앞뒤가 꽉 막혀 있는 통나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어딜 가나 예외는 있는 법. “으음…….” 체칠리아 카포네. 태어났을 때부터 신비에 노출되었고, 평생을 바티칸 안에서 자란 신실한 신도이자 이단 심문관. 그녀는 울리는 아침 예배 시간 알람을 가볍게 무시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자그마한 체구가 침대 위로 고양이처럼 말렸다. 당장 새벽까지 이탈리아에 잠복한 늑대 인간을 처리하고 온 뒤였다. 아직 피곤함이 전신을 짓누르고, 눈꺼풀을 잠식하는 중이었다. 수면이 더욱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이 상태에서 예배는 무슨 예배란 말인가. 가서 분명 졸다가 얻어맞을 것이 뻔한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니 배 짼다. 아무렴. 쉴 때는 확실하게 쉬어주자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야, 카포네!” 하지만 신실한 가톨릭 신자들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일어나, 이 게으른 고양이 같은 년아!” 그녀의 룸메이트이자 걸쭉한 욕설로도 유명한 페데리카가 체칠리아의 이불을 홱 걷어버리고,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쭉 들어 올렸다. “으아…….” 체칠리아가 버둥거렸으나, 페데리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위아래로 마구 흔들었다. “아침 예배는 나와야지, 이 멍청한 년아! 그러다가 대주교한테 찍힌다?” “이미 찍혔어…… 나보고 또 밥 먹을 때 기도 안 하면 참회실에 넣어버린데…….” “근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피곤해…….” 체칠리아의 말에 페데리카가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의 수녀복을 흘깃 돌아보았다. 기본적으로 검은색 베이스로 만들어지고 활동하기 좋도록 개조된 이단 심문관 복장이지만, 그렇다고 핏자국까지 가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로 범벅이 된 체칠리아의 옷 아래에는 검붉은색의 웅덩이가 형성되어 있었다. 새벽에 있었던 전투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는 증거였다. 아마 그녀에게 재생 능력이 없었다면, 진즉에 피떡이 되어 늑대 인간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하아.” 결국, 페데리카는 체칠리아를 내려주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체칠리아의 재생 능력이 대단한 건 맞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발현되는 힘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대량의 칼로리가 필요했고, 그게 다 떨어지면 생명력까지 연료로 사용한다. 다행히 오늘은 골골대는 게 아니라 피곤해하는 걸 보면 생명력까지 가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힘들었다는 건 명확했다. “으응……? 페데리카……?” 체칠리아가 갑자기 침묵한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을 비볐다. 페데리카는 한 차례 더 한숨을 내쉬며 체칠리아의 정수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으엑!” 제법 강하게 찍은 탓인지 체칠리아가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페데리카는 할 말만 남기고 아침 예배를 위해 숙소를 나섰다. “죠르죠 추기경이 너 찾더라. 파견 때문인 것 같은데, 아침 예배 안 갈 거면 일단 거기부터 가.” “……죠르죠? 그 기묘하게 생긴 할아버지?” “어, 그 할아버지 맞아. 너 또 그 추기경 앞에서 이상한 포즈 취하면 만화책 다 압수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골드 익스피ㅡ” “닥쳐.” 달칵, 쿵! 페데리카가 문을 닫고 나갔다. 체칠리아는 하품을 내뱉고는, 욕실로 들어가 가볍게 씻었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얼굴에는 선크림만 바른 채 피범벅이 된 수녀복을 입고 나선다. 아침 예배 시간이라서 그런지 교황청 복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죠르죠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린다. “체칠리아 카포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막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죠르죠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왜 지금 온 겁니까? 아침 예배는 어쩌고요?” “피곤해서요…….” “그래도 아침 예배는 드려야죠. 그분에게 새로운 날이 밝았으니 또 한 번 지켜달라고 간청해야 하지 않습니까.” “……나중에 드릴게요. 근데 그러는 추기경님도 안 가셨잖아요, 예배.” “저는 새벽에…… 아니, 이 이야기는 됐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그렇게 했다. 죠르죠는 집무실에 가져다 놓은 믹스 커피를 따라서 체칠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악마의 구정물…….” “불경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 위로 서류 한 장을 스윽 내밀었다. 체칠리아가 고양이처럼 커피를 할짝거리면서 서류를 훑어보았다. [마도서 추적.] 서류의 가장 상단엔 그런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이어진 내용은 새로운 외신의 마도서에 대한 예언이 내려왔으니, 한국으로 향하라는 인사 명령서였다, 체칠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죠르죠를 응시했다. “……지금 저 한국으로 좌천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중요해요? 외신의 마도서가 나타났다고요, 한국에.” 죠르죠가 헛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서류를 톡톡 두드렸다. “일단 추적해서 그 주인의 성향을 파악하고, 처분은 알아서 판단하에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안 죽여요?” “스스로 판단해서 결론을 내리세요.” “저 그런 거 잘 못하는데요…….” “저도 알아요. 근데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는 게 오히려 더 좋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한국으로 가서, 거기 있는 가톨릭 신자들 도움을 받으며 마도서의 주인을 추적하세요. 친분을 쌓든, 적대하든. 그건 온전히 당신 판단에 맡길 거예요.” 막중한 임무였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해도 되는 안건인가 싶을 만큼. 하지만 교황청의 예언자이자 신탁의 목소리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기상청처럼 틀리는 경우가 더 많은 놈들이지만, 어쨌든 들어맞을 때도 있으니까. 체칠리아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문제가 하나 있기는 했다. “……근데 저 한국어 모르는데요.” 체칠리아는 이탈리아 토박이다. 영어는 조금 할 줄 알지만, 다른 언어는 아예 모른다. 죠르죠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책장에 꽂아 넣었던 책 한 권을 가져와 체칠리아에게 내밀었다. [함께 공부해요! 기본 한국어 배움 놀이터!] [785페이지] 전혀 기본적이지 않고 놀이 수준도 아닌 분량의 책이 튀어나왔다. 체칠리아가 이게 뭐냐는 듯이 죠르죠를 쳐다보자. 그가 커피를 마시고 대답했다. “출발은 일주일 뒤에 합니다. 그전까지 기본 인사말 같은 건 다 외워두세요.” “……공부하라고요? 저 중졸인데요? 고등학교 자퇴했는데요?” “그건 네가 하기 싫다고…… 흠흠, 당신이 공부하기 싫다고 때려치우고 나온 거 아닌가요?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다시 공부해야죠. 원래 인생은 끊임없이 배우는 거랍니다. 그러니까.” 죠르죠가 웃으며 양손을 포갰다. “하세요.” “…….” 체칠리아는 울고 싶어졌다. * 오피스텔 건물에 들어서고 약 2시간 뒤, 이안은 필요한 괴이 몇 마리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고의로 남겨둔 귀신은 총 두 마리. 하나는 침입자를 공격하는 경비원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엘리베이터 귀신이었다. 득보다 해가 많은 다른 귀신들과 달리, 이 둘은 그래도 쓸만한 구석이 있었다. 경비원 귀신이야 말할 것도 없다. 만약 외부에서 침입자가 들거나 강도가 들면, 놈이 즉각적으로 나서서 보복을 가할 것이다. 엘리베이터 귀신은 별거 없었다. 원하는 버튼을 따로 누르지 않아도 자동으로 눌러주는 능력을 필사적으로 어필하길래 받아줬다. 아마 이것 외에도 다른 짓이 가능할 테지만, 당장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 잘하자.” 이안은 벌벌 떠는 두 귀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계약한 방으로 들어가 내부를 살폈다. 상당히 훌륭한 수준의 방이었다. 넓기도 넓고, 나름 깨끗하게 관리한 티가 났다. 이안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귀신들에게 일러두었다. “앞으로 정해진 일할 때 말고는 나오지 마. 알겠지?” 끄덕끄덕. 두 귀신이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걸로 방 구하기는 끝났다. 이안은 오피스텔 흡연장에서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택시를 타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보니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사장님: 이안, 편의점 다시 완공됐어! 이제 출근하자!] “아.” 이안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침대 위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안 했었나. 아무래도 이쪽부터 먼저 해결해야 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