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의신 : 그건 알 거 없고. 나만 믿고 ㄱㄱ. 빙의시키셈. 그 한 줄이 내 절망으로 가득 찬 시야 속에서 불길하게 빛났다. 해결한다고? 이 개판 오 분 전. 아니, 이미 개판이 끝나고 잿더미만 남은 이 상황을? 나는 압력 백을 쥐어짜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내 머릿속의 이성과 상식이 비명을 질렀다. 저 새끼는 그냥 미친놈이야. 죽어서도 정신 못 차린 과대망상 환자라고. 지금 이 상황은 신이 와도 못 살려. ㄴ 수술실망령3 : 와 또 지 혼자 튀네. 헬노예야 차라리 나를 써라 ㅇㅇ ㄴ 라떼는말이야 : ㅉㅉ. 헬노예야, 신중히 판단해라. 대체 저걸 어떻게 살린단 말이냐. ㄴ 뼈덕후88 : 내 차례는 언제 오냐! 나도 골절 환자 보고 싶다고! 골수!!! 슬라이드!! 나는 갤러리 화면을 뒤로하고 모니터를 쳐다봤다. 바로 그때였다. 삐빅, 삐빅. 모니터의 혈압 수치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55… 60… 65…. “혈압 오른다! 60대로 올라왔어.” 이민재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방금 들어간 O형 혈액이 기적처럼 효과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오, 다행이다!” 소생실의 얼어붙었던 공기가 아주 잠시 녹아내렸다. 모두가 다시 희망을 품고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액 라인 하나 더! 빨리! 혈압 잡혔을 때 뚫어야 돼!” “혈액 팩 다음 거 준비해요! 백 바로 교체할 수 있게!” “포터블 엑스레이 아직 멀었어?!” 하지만 그 희망은 신기루처럼 짧았다. “아니 외상외과 대체 언제 오는 건데! 환자 잡겠다!” 이민재가 인터폰을 향해 절규했다. 환자의 혈압은 60대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고 위태롭게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솟아나는 피를 막기에는 들어가는 피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여전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상황. 이대로라면 혈액은행의 피가 동나거나 환자의 심장이 먼저 멈추거나 둘 중 하나였다. 상황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전혀 좋지 않았다. 나는 압력 백을 쥔 채 결심했다. 하자고. 이건 도박이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결과는 100% 죽음이다. 도박이라도,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걸어야만 한다. 이미 한 번 해 보기도 했고. 그 끔찍했던 개복술의 기억.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그 기괴한 감각. 하지만 결과적으로 환자는 살았잖아.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 예의를 갖추라고, 앞으로 내 인생을 망치지 말라고 예절 교육도 단단히 시켰으니…. 지난번처럼 선배들한테 반말을 까는 미친 짓은 적어도 하지 않겠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애써 위로했다. 눈을 감았다. 내 주변의 모든 소음이 멀어졌다. ‘빙의, 메스의신.’ 그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꺼졌다. 암전. 완벽한 어둠. 소리도 감각도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의 공간. 내가 죽은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 찰나. 다시 빛이 들어왔다. 그래, 뭔가 익숙하면 안되는데 이 기분이 익숙하다. 시발. 뭔가 내 인생이 잘못되고 있잖아. 내 몸의 시야는 보이는데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긴 기분. 나는 내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었지만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무대는 내 몸. 감독 메스의신. 주연 메스의신. 관객 나. 씨발, 이게 뭐지. 손끝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지난번에는 느닷없이 빙의를 당했기에 당황했던 메스의신도 이번에는 내가 자신을 소환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번 빙의와 지난 빙의의 결정적인 차이. 메스의신의 의식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육체의 통제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일 중요한 다른점이 하나 더 있다. 존대. 존댓말. 제발 그 아가리에서 존댓말이 나오게 해 다오 이 귀신새끼야. 내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내 몸을 움직이는 메스의신의 첫 동작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는 압력 백을 쥐어짜던 내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소생실 전체를 한번 싹 훑었다. 그의 시선은 삑삑거리는 모니터와 피범벅이 된 환자의 복부, 그리고 패닉에 빠진 의료진들의 얼굴을 차례로 스캔했다. 잘 했다. 적어도 지난번처럼 바로 반말을 뱉지는 않았잖아. 그리고 내 입이 열렸다. “레보아 키트는 어디 있나?” …아니, 이 미친놈이. “아니, 어디 있습니까?” 메스의신은 스스로를 교정하듯 어색하게 존댓말을 덧붙였다. 그 어색한 존댓말에 내 안의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피눈물을 흘렸다. 그래, 장하다. 이 사회성 박살난 귀신새끼야. 최소한의 예의는 장착했구나. 하지만 그 질문을 들은 이민재의 얼굴에는 ‘이 새끼가 드디어 진짜 미쳤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레보아? 갑자기 그건 왜 생뚱맞게? 설마 하겠다고?” REBOA. Resuscitative Endovascular Balloon Occlusion of the Aorta. 대퇴동맥으로 풍선 카테터를 쑤셔 넣어 대동맥을 안에서 틀어막아 버리는 최후의 지혈술이다. 복부와 골반의 대량 출혈을 막는 몸속의 지혈대 역할을 하는 셈이다. 1년 차는커녕 어지간한 펠로우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외상외과에서도 가장 고난도의 술기 중 하나로 알고 있다. “어.” … “…아니아니.” 내 입이 나도 모르게 버벅거렸다. 메스의신이 존댓말을 하는 것에 아직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네. 제가 하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옆에서 앰부백을 짜던 한재언이 끼어들었다. “제정신 맞냐? 적응증은 맞지만, 이건 네가 할 수 있는 술기가 아니잖아. 기도 확보랑은 완전히 다르다고.” 그 말이 백번 옳다. REBOA는 미친 소리였다. 적어도 응급의학과 2년 차에게는. “그냥 배를 째는 거랑 차원이 다른 문제야 이건. 초음파나 C-arm으로 혈관을 보면서 가이드와이어를 넣고 카테터를 대동맥까지 밀어 올린다음에 정확한 위치에서 벌루닝까지, 네가 할 수 있는거 맞아?” 한재언의 목소리가 더 날카로워졌다. ”대동맥을 찢어먹기라도 하면 환자는 그냥 그 자리에서 즉사다. 할 수 있냐고.” 필사적인 반박. 하지만 이민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잠깐… 아, 씨… 하… 잠시만….” 이민재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 너 작년에 배 깠을 때도 이랬냐? 아니, 뭔 소리를. 하, 씨발… 제대로 할 수 있어? 진짜로?” 이민재는 내게 묻고 있었다. 2년 차 한현재가 아닌 그때 그 기적을 일으켰던 정체 모를 무언가에게. “할 수 있냐고.” 그 물음에 내 입에서 단 잠시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 그 순간 이민재의 모든 이성이 끊어졌다. “하씨, 오케이.” 그는 간호사를 향해 소리쳤다. “남 쌤! 레보아 키트랑 C-arm, 지금 당장 소생실로 가져와요! 빨리!” “현재야.” “네.” “난 책임 안 진다?! 진짜로! 나중에 문제 생겨도 나는 너한테 그런 거 시킨 적 없는 거야! 난 니가 미친 짓 한다고 해서 같이 깜빵에 들어가고 싶진 않거든? 그니까 나는 지금부터 그냥… 적극적인 방관자, 뭐 그런 거다! 알았냐!” 이건 책임 회피일까, 아닐까. 겉으로 말하자면 책임 회피지만, 동시에 ‘나는 네가 무슨 헛짓거리를 하건 묵인하겠다’ 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주 요오망한 양반일세. 소생실의 공기가 다시 한번 바뀌었다. 한 미친 귀신과 더 미친 2년 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방관하기로 결심한 도박사 선배가 벌이는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수술장. 이민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소생실은 다시 한번 시끄러워졌다. 의료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C자 모양의 거대한 이동식 엑스레이 기계, C-arm을 낑낑거리며 소생실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육중한 바퀴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굴러왔다. 메스의신은 그 모든 소란을 뒤로한 채 침착하게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손이 움직였다. 메스의신은 초음파 기계의 프로브를 집어 들고 비닐 커버를 씌운 뒤 멸균 젤을 듬뿍 발랐다. “초음파 이쪽으로.” 간호사가 모니터 스탠드를 침대 옆으로 끌어왔다. 메스의신은 환자의 오른쪽 사타구니 대퇴동맥이 지나가는 부위를 덮고 있던 멸균 포를 살짝 걷었다. 그리고 프로브를 피부 위에 가져다 댔다. 모니터 화면에 꿈틀거리는 혈관의 단면을 보여주는 희미한 흑백 영상이 떠올랐다. “C-arm 환자 골반 쪽으로 위치시키고 AP view(* 정면 뷰) 띄워주십시오. 네네. 그렇게요.” 방사선사는 아무 말 없이 C-arm의 위치를 조절했다. 이민재는 옆에서 레보아 키트의 포장을 미친 듯이 뜯고 있었다. “아이 씨, 왜 이렇게 안 뜯기냐.” 투명한 비닐 포장을 찢는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 모니터의 혈압 수치는 혈액이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야금야금 떨어지기 시작했다. 65… 62… 59… “시발, 피 들어가는데도 좀 떨어지네! 현재야 언제쯤 돼?” 이민재의 초조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바로 그때 옆에서 앰부백을 짜던 한재언이 끼어들었다. “현재야 잠깐만! 지금 환자 혈압 너무 낮다. 일단 MTP 들어온 피로 혈압부터 70대로라도 올리고 시작하자, 제발.” 그 말은 합리적이었고 교과서적으로 완벽했다. 미안 선배. 내 몸의 지금 주인은 교과서 따위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불쏘시개로 써버린 남자거든. “지금 혈압, 시술 적응증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선생님.”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니, 그래도 너무 위험하다. 현재야.” “됐어 됐어.” 이민재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이미 결정된 거야. 냅둬 그냥. 지금은 저 미친놈 믿는 수밖에 없어.” 그렇게 모든 반론이 묵살되었다. 메스의신이 입을 열었다.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