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진 회의는 싱겁게 끝났다. 나의 압도적인 존재 때문에 더 이상의 논의는 무의미했다. 왕과 재상은 내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정. 그들은 내게 왕국 최고의 접대를 제공하겠다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됐어요, 됐어.”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클리어 시간이 늦어지거나, 포로가 죽기라도 하면 막심한 손해. 이런 환대를 받을 시간은 없었다. 내가 막 자리를 뜨려던 참이었다. “자, 잠시만요!” 앳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아직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려 보이는 외모. “레인저?” 가죽 갑옷과 활. 직업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온 이유도. 그녀는 무언가 굳게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번 구출 작전에 자원한 샤론이라고 합니다! 부디 저를 데려가 주세요!” “응?” “저는 왕국 최고의 레인저!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자신합니다!” “뭐 그렇다면야….” 강한 의지와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 하지만 나는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당당함 아래 불안감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샤론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현자님께 이번 작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눈앞의 이 NPC가 퀘스트 안내역인 모양이지. 샤론이 품에서 자세한 지도를 꺼냈다. “이건 지난 며칠간 제가 적들의 요새 주변을 정찰하며 알아낸 정보들입니다.” 샤론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적들의 순찰 경로는 세 조로 나뉘어 이 구역을 30분 간격으로 돕니다. 감시탑은 총 여덟 군데. 특히 북쪽과 서쪽 감시탑의 시야가 가장 넓습니다.” 이어지는 자세한 설명. 적들의 순찰 경로, 경비 교대 시간, 감시탑의 위치까지. 샤론이 오크보다 오크를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치밀한 정보. “… 그래서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샤론은 지도 위에 붉은 선 하나를 그었다. 적들의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잠입 경로. “오늘 밤, 달이 구름에 가려지는 시간을 노릴 겁니다. 우리는 이 경로를 통해 소음 없이 잠입하여, 포로들이 갇혀 있는 지하 감옥으로 직행합니다.” “경로가 엄청 복잡해 보이는데…. 시간제한은 어느 정도인가요?” “잡입직후부터 약 10분 안에 모든 것을 끝내고 빠져나와야 합니다.” “시간이 굉장히 촉박해 보이는데요?” “걱정 마십시오! 제 계산에 따르면 일이 틀어지더라도 9분 20초 안에 구출을 완료할 수 있습니다!” 샤론의 설명은 완벽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냥 저 요새를 통째로 날려버리면 안 될까요?” 나는 지도를 툭툭 치며 말했다. “모래 거인을 돌격시키거나, 땅속에서 샌드웜을 불러내서 한 번에 쓸어버릴 수도 있거든요. 그게 훨씬 빠르고 확실할 것 같은데….” 내게는 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십, 수백 가지의 방법이 있었다. 굳이 이렇게 복잡하고 위험한 잠입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내 말에 샤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샤론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샤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오크들은 저희 생각 이상으로 잔혹하고, 자비가 없습니다.” 샤론의 눈에 공포와 분노가 동시에 어렸다. “만약 우리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거나, 현자님께서 강력한 마법으로 요새를 공격하는 순간…” “포로들을 전부 죽이나요? 곤란하네.” 샤론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변했다. “아뇨,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한 짓을 할 겁니다. 포로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워 가장 앞줄에 세우겠죠.” “고기 방패 말인가요?” “네, 우리 손으로 그들을 죽이고 전진하라고 조롱하면서요.” “흐음….”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열 명이 넘는 포로가 인질로 잡힌 상황. 그들 모두를 안전하게 구출하며 오크들을 전멸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쩐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 그녀의 작전은 무척이나 귀찮았다. 좁은 동굴과 더러운 수로를 기어가야 한다니. 영 내키지 않았다. “흐음….” 나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샤론의 눈에는 절박함이 보였다. 단순히 동료를 구하려는 기사의 책임감을 넘어선, 훨씬 깊은 감정. ‘뭔가 이야기가 더 있는 모양인데.’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내게 중요한 것은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의 계획대로 해보죠.” 내 대답에 샤론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샤론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일단은 저 아가씨의 계획에 맞춰주자고. 잠입 게임을 하는 것처럼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침 새로운 스킬도 테스트해보고 싶었고. ‘게다가 만약 계획이 틀어지거나, 상황이 귀찮아지면… 그때 가서 판을 뒤엎으면 그만이니까.’ 내게는 그럴 힘이 충분히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와 샤론, 단 두 명으로 이루어진 구출팀이 결성되었다. “아, 초호기도 있었지.” 나는 아직도 깃발로 빵빠레를 울리며 왕궁을 뛰어다니는 초호기를 찾아내, 크기를 작게 만든 뒤 내 어깨 위로 회수했다. *** 잠시 뒤, 나와 샤론은 요새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엎드려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오크들의 주둔지만이 횃불들로 빛나고 있었다. “…….” 샤론은 손에 쥔 작은 망원경으로 쉴 새 없이 주둔지의 동태를 살폈다. 그녀의 온몸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반면 나는 약간의 따분함을 느낀 채 밤하늘을 구경했다. “순찰조의 동선은 제가 파악한 것과 일치합니다. 30분 간격으로 정문을 중심으로 반경 50미터를 순회하고 있어요. 경비탑의 감시병들도 졸지 않고 있고요.” 샤론의 목소리는 낮고 빨랐다. 혼잣말처럼 작전 계획을 몇 번이고 되뇌는 목소리. ‘저렇게 긴장할 필요 없는데.’ 나는 문득 32층에서 얻었던 새 스킬이 떠올랐다. 신기루. 모래 위에 환영을 만드는 스킬. 이걸 잘만 응용하면, 미션의 난이도가 몇 배는 낮아질지도 몰랐다. 나는 로브와 머리카락에 모래를 발랐다. 알몸이라면 이럴 필요가 없겠지만. 내가 죽더라도 알몸으로 활보할 생각은 없었다. 신기루 스킬을 발동했다. 처음에는 내 몸 위에 주변의 바위의 환영을 띄웠다. “흠, 조금 아쉬운데?” 하지만 어딘가 어설픈 느낌. 무엇보다도, 주변 풍경과 영 어울리지 않았다. 바위가 걸어 다니는 모양새. “조금 더 머리를 써볼까….” 나는 이번엔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내 등 뒤에 있는 바위와 흙의 모습을 내 전신에 그대로 투영했다. “좀 어렵긴하네.” 컨트롤이 힘들어 살짝 아파오는 머리. 그러나 제라드의 마력 조작 기술을 배운 지금이라면 할 만했다. 약간의 시행착오 후, 금세 요령을 잡았다. 스르륵-.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 모습이 공기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마치 투명망토를 쓴 것 같았다. “좋았어.”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샤론에게도 이 마법을 걸어줄 차례였다. “괜찮아, 내 계획은 완벽해…. 열 발자국 앞으로 간 뒤, 3초 후 오른쪽으로 돌아서 다섯 발자국. 그다음에 15초를 대기하고….” 옆에서 여전히 중얼거리며 작전 계획을 점검하고 있는 샤론. “좋은 계획이네요. 아주 세밀하고.” “가, 감사합니다. 오늘을 위해서 며칠이나 계획을 세웠거든요….” 샤론의 얼굴에 긴장과 자신감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네? 더 좋은 방법이라니요?”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거예요.” “네?” 나는 대답 대신, 한 움큼 쥐고 있던 모래를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꺄악!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요. 좋은 거 해줄게.” 나는 샤론이 반항할 틈도 주지 않고 온몸 구석구석에 모래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현자님? 간지러워요! 잠깐만!” 샤론이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가죽 갑옷 틈새, 활과 화살통, 심지어는 머리카락 사이사이까지 꼼꼼하게 모래 입자를 발랐다. “다 됐어요.”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그녀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자, 이제 잘 보세요.” “네?” 나는 내 몸에 다시 한번 신기루 마법을 걸었다. 내 모습이 공기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어…?”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현자님? 어디 계십니까?” 샤론이 당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녀의 바로 옆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여기요.” “꺄악!” 샤론은 기겁하며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그녀는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빛을 굴절시켜서 환영을 만드는 마법이에요. 자, 이제 샤론 씨 차례예요. 눈 감지 말고 똑바로 보세요.” 나는 그녀의 몸에 묻은 모래를 향해 마력을 집중했다. 샤론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부터 시작해 팔, 그리고 온몸이 점차 투명하게 변하며 등 뒤의 바위와 밤하늘이 비쳐 보였다. “세상에….” 그녀는 자신의 몸이 사라지는 경이로운 광경에 넋을 잃었다. “자, 이제 출발하죠.” “네? 이렇게 그냥 걸어간다고요?” 샤론이 당황하며 속삭였다. 여전히 불안한 듯,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주변을 살피는 샤론. 잠시 후 첫 번째 오크 순찰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샤론의 어깨가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속삭였다. “긴장 풀어요.” 시끄럽게 대화하며 우리 앞을 지나가는 오크들. “록타아 따람라.” “록타르.” 녀석들은 우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샤론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 정말 우리를 보지 못했네요.” “그렇다니까요.” “내 며칠 동안의 계획이….” 샤론이 허탈한 표정으로 투명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괜히 안쓰러워 보여서 위로를 건넸다. “에이, 쓸 일이 있겠죠.” “그, 그렇겠죠?” 우리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마치 우리가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순찰을 도는 오크들과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그들은 우리를 전혀 보지 못했다. 샤론도 조금은 안심한 듯했다. 물론, 완벽하게 모든 장애물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흠, 돌아가야 하려나?” 굳게 닫힌 문을 지키고 있는 오크. 지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중얼거렸다. “그냥 저놈 죽여버리고, 그 자리에 오크 환영이라도 세워둘까요? 뭐, 시체도 모래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고….” 내 말에 샤론이 기겁하며 내 팔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누가 대화 한 번이라도 나누면 들킬 거예요….” “알았어요, 알았어.” 나는 그녀의 신중함에 일단 동의했다. 뭐, 일단은 그녀가 이 작전의 지휘관이니까. “그럼, 여길 지나갈 방법이 있나요?” “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샤론이 반대편의 숲으로 건너갔다. 잠시 뒤, 샤론이 낯선 언어를 외쳤다. “카아! 빈 모그 그타자그 차!” 문을 지키던 오크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재빠르게 자리를 피하는 샤론이 보였다. 투명화여도 내겐 어차피 다 보이기 때문에 큰 상관이 없었다.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샤론,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에요.” “아…. 죄송합니다. 제 눈에는 현자님이 안 보여서 그만….” “흐음. 이 부분은 좀 보완을 해야겠네.”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재빨리 문을 통과한 뒤, 나는 샤론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오크어를 할 줄 알아요?” “네…. 하지만 왜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응?”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쓸 수 있었습니다.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역시, 현자님이 보시기에도 이상하십니까?” “아뇨? 유능하다고 생각했는데요.” 내 무심한 대답에 샤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런가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 샤론은 긴장이 풀린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희미한 자신감이 떠올랐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비슷한 방식으로 적을 따돌렸다. 마침내 목적지인 임시 감옥 앞에 도착했다. 주둔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동굴. 입구는 두꺼운 철창으로 막혀 있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오크 정예병. “마지막 관문이네요.” 샤론이 저 멀리 돌을 던졌다. 쨍그랑! 쨍쨍그랑! 멀리 있는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그럼에도 녀석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로 처리해야겠는데요?” 내 말에 샤론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내지 말고, 최대한 조용히.” 샤론이 화살을 꺼냈다. “하나는 제가 제거하겠습니다. 바람을 계산해야 하니 제가 신호를 드리면….” “그냥 제가 둘 다 처리할게요.” 나는 손가락 사이에 은빛으로 빛나는 모래알 두 개를 띄웠다. 평소보다도 작고 은밀한 탄환. 푸슉. 아주 작은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정확히 미간을 꿰뚫은 탄환.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오크. “아차.” 나는 재빨리 모래를 쌓아 만들어 오크를 부축했다. 저렇게 커다란 녀석이 쓰러지면 또 소리가 날 테니. 난 녀석들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세를 고정시켰다. 한동안은 시간을 벌어주겠지. “세상에….” 샤론 경악과 감탄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쓰러진 오크들을 지나쳐 철창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동굴 안쪽, 희미한 횃불 빛 아래로 사람들의 형체가 보였다. “생각보다 많은데….” 얼핏 봐도 열 명은 훌쩍 넘어 보였다. 이 많은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소리 없이 주둔지를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샤론은 내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샤론은 허리춤에서 작은 쇠꼬챙이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철창의 자물쇠에 꼬챙이를 쑤셔 넣고 끙끙거리기 시작하는 샤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풀어드리겠습니다.” 샤론의 손은 다급했지만, 긴장한 탓인지 자물쇠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쇠꼬챙이가 헛도는 소리만 짤깍거리며 동굴 안에 울렸다. “조금만 더… 거의 다 됐어요!”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나섰다. “잠시만요.” 나는 자물쇠에 가볍게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사라락. 견고했던 강철 자물쇠가 한 줌의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에?” 샤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이번에는 안의 포로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손과 발에 채워진 족쇄에 손을 뻗는다. 사라락. 사라락. 사라락. 내가 손을 댈 때마다, 기사들을 옭아매고 있던 쇠사슬이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동굴 안의 모든 포로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기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목과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그들을 괴롭혔을 족쇄가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눈치. 그들 중 가장 안쪽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비록 갑옷은 벗겨지고 옷은 누더기가 되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5년 전보다 주름은 깊어졌고 얼굴에는 흉터가 늘었지만. 나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기사단장 시모어. 시모어의 시선이 샤론에게 닿는 순간, 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샤론…? 네가 왜… 어떻게 이곳에….” 그의 목소리가 충격으로 심하게 떨렸다. 다음 순간, 샤론이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아버지!” 샤론은 시모어의 허리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한 듯, 그녀의 작은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시모어는 딸을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부녀의 재회를 잠시 바라보았다. 샤론이 왜 그토록 이 임무에 필사적이었는지. 왜 단 한 명의 희생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는지.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한참 동안 아버지를 끌어안고 울던 샤론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내게로 달려왔다.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현자님…!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샤론은 울먹이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눈물이 내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어색하게 손을 빼냈다. “감사는 나중에 하고, 여기서 빠져나갈 생각부터 하죠.” 내 말에 시모어가 정신을 차리고 나를 보았다. “세상에,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