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냉장고가 마법사 갤러리에 올린 게시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목: 이번 주에 연구소 방문하지 않을래?]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자신이 조만간 해외 학회에 참석할 일이 있어 한 달간 자리를 비우게 된다는 것. 그래서 지금이 아니면 한동안 만나기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였다. “흠…. 이걸 어쩐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분명 언젠가 한번 찾아가겠다고 말은 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다른 마법사와의 만남. 솔직히 말해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드는 것도 사실. 특히 32층에서 만났던 궁정마법사 제라드. 그의 마력 운용 방식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분명 정부 산하 연구소 소속의 엘리트라고 했었지….” 게다가 이 만남의 목적인 아이템 복원. 성공 시, 어떤 아이템이던지 상관없이 내게 준다는 약속. 만나서 손해 볼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짧게 댓글을 달았다. *** “집 잘 보고 있어야 된다? 함부로 문 열어주지 말고. 특히 옆집 아저씨 오면 그냥 무시해.” 나는 초호기에게 몇 번이나 경고를 한 뒤에 집을 나섰다. 초호기가 활짝 웃으며 팔을 연신 흔드는 것이 어째 불안했지만, 큰 문제는 없겠지. 예비 목숨도 10개나 있으니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곳까지 이동한 뒤. 나는 탈 것을 소환했다. “샌드웜?” 내 부름에 손가락에 감겨 있던 반지가 스르르 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거대한 몸집으로 불어난 지렁이가 내 앞에 입을 벌렸다. 나는 익숙하게 그 안으로 들어섰다. [샌드웜은 요즘 너무 힘을 많이 쓴 것 같다고 투덜댑니다.] 머릿속으로 샌드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소보다 기운이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 마력 충전한다고 내 몸에 24시간 붙어있으면서 무슨 소리야?” [샌드웜은 당신의 마력은 최소한의 유지 비용일 뿐, 여전히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과자도 먹고 있잖아.” [샌드웜은 과자만 먹고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샌드웜은 더 많은 공물을 바쳐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예를 들면 정령의 정수 같은….] “알았어, 알았어. 그치만 구해도 안 나오는 걸 어떡해? 일단 서울로 가자.” [샌드웜은 한동안은 유급 휴가를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이번만 수고해 줘.” 샌드웜의 몸이 작게 진동했다. 출발한다는 신호. 어쨌든 목적지는 서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런 건 죄다 서울에 있는 거지?” 정부는 지방을 살려내라…! 나는 속으로 불만을 터뜨리며 이동을 명령했다. 샌드웜의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속을 고속으로 이동하는 익숙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가만히 있자니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바깥 좀 보여줘.” 샌드웜의 몸 안에서, 굵은 촉수 한 줄기가 뻗어 나왔다. 나는 그 촉수에 팔 한쪽을 집어넣었다. 샌드웜의 감각 일부가, 내 신경과 연결되었다. 곧 내 눈앞에 새로운 시야가 펼쳐졌다. 비록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심했고, 흑백에 불과했지만. 대략적인 형태는 알아볼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바깥의 풍경. 마치 열차의 창밖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 신기하네.” 내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풍경을 구경하던 그때였다. 갑자기 지면이 통째로 뜯겨져 나갔다. 쿠구구구구궁-! 엄청난 충격과 함께, 샌드웜과 내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중력을 무시한 채 공중으로 솟구치는 흙더미.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뭐, 뭐야!” 속이 울렁거리며 멀미가 치밀어 올랐다. “젠장, 여기 안에서는 제대로 대처를 못 하겠어…!” 나는 즉시 샌드웜의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시야가 트였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허공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전투태세를 갖춘 사내. “아직도 살아있나? 단단하군.” S급 헌터, 김수호였다. 김수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껏 폼을 잡은 채, 무거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럼 이것도 버틸 수 있나 볼까. 풍둔, 나선수….” 바로 그 순간, 샌드웜의 입에서 나온 나와 눈이 마주쳤다. “…….” “…….”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김수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비장한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드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김수호는 잠시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이내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S급 헌터의 명성에 걸맞은, 눈으로 좇기조차 힘든 속도. 순식간에 점처럼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디가!” 내 외침에 김수호가 하늘 위에서 급정거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아주 느린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안녕?” *** “…….” 끔찍하게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나와 김수호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충격 때문에 엉망이 된 옷을 털었고, 김수호는 헛기침을 하며 애써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의 귓가가 여전히 붉었다. 잠시뒤, 결국 침묵을 깬 것은 김수호였다. “저… 괜찮아?” “네. 괜찮아요.” 내 짧은 대답에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김수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필사적으로 대화 주제를 찾는 듯했다. 어쨌든,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게 분명해 보였다. 마침내 적당한 질문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김수호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땅속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어디 가던 중이었어?” “아, 네. 서울에요. 냉장고를 만나러….” “아…. 갤에서 그런 말 했었지.…” 김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내 손가락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거대한 모래 벌레였던 샌드웜이 어느새 반지 형태로 돌아와 내 손가락에 얌전히 감겨 있었다. “그런데, 저번에도 이렇게 땅속으로 이동한 거야? 그때는 아무런 경보도 없었는데.” “아뇨. 이건 저번에 새로 얻은 레인보우 등급 스킬 소환수인데…. 꽤 유능해요.” [샌드웜은 자신은 더욱 칭찬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내 말에 김수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 S급 헌터인 그에게도 레인보우 등급 스킬은 흥미로운 주제인 모양이었다. 그는 내 손가락에 감긴 반지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대전에서부터 이걸 타고 왔다고? 대단한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었다. “수호 씨는 제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내 질문에 김수호가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수호 씨라고?” 김수호는 내 호칭이 무척이나 우스운 모양이었다. 어린아이의 외모를 한 내가 어른처럼 ‘씨’를 붙여 부르는 게 어색하게 들렸나 보지. “어린애가 ‘씨’가 뭐야? 참나,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부르면 되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씨발, 오빠라니? 세상에 그렇게 끔찍한 어감의 단어가 또 있을까. 내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온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죽어도 말할 수 없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그, 그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안을 제시했다. “그냥 아저씨라고 부를게요.” “아, 아저씨라고….” 김수호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되뇌었다. 하긴. 나도 저 나이에 아저씨라고 들으면 충격이 올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오빠라는 말은 진짜 입에 안 붙어서요. 너무 어색해서 못하겠어요. 토할 것 같아.” “….” 김수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연이은 멘탈의 데미지를 수습하는 중인 것 같았다. “… 그냥 마음대로 불러. 아저씨만 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오빠라는 끔찍한 단어는 피했다. 김수호는 다시 헛기침을 하며 원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그가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지 정확하게 알았냐고 했지? 그건 수도권 전역에 감지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서 그래.” “감지 시스템이요?” “예전에 북한 쪽에서 몬스터들이 땅굴을 파고 넘어온 일이 있었거든…. 그때 이후로, 수도 방어 목적으로 철저하게 구축해 뒀지.” 김수호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지진 감지 시스템과 마법 공학을 복잡하게 엮어서 만든 최첨단 방어 설비. 지하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진동이 감시되면 자신에게 긴급 연락이 온다고 했다. 대충 위치를 특정하고 나서는, 김수호에게도 있는 개안 스킬을 통해 쉽게 내 위치를 찾아냈던 거였고. “솔직히 자세한 원리는 나도 잘 몰라. 그냥 그런 게 있다고만 알아. 이것도 미래 씨가 만든 거거든” “냉장고님이?” “응. 그 친구가 원래 그런 쪽 천재잖아.” “대단하네요….” 김수호는 다시 한번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주의를 주었다. “아무튼, 앞으로는 조심해야 해. 이번엔 내가 힘 조절을 해서 다행이지, 만약에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S급 헌터로서, 김수호는 자신의 힘이 가진 파괴력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실수로 너를 죽였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일일 거야. 나한테 그런 경험을 안겨주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잠시 침묵했다. 솔직히 말해, 내가 죽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자동 방벽이 먼저 반응했을 테니. 설령 방벽이 뚫렸다고 해도, 지금 내 신체 내구도는 어지간한 몬스터보다 훨씬 높았다. ‘전력을 다하는 게 아니라면 상처 하나 없을 지도?’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할게요.” 나는 진짜 어린애가 아니니까. 진심 어린 걱정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상대방이 왜 이런 걱정을 하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고. 하지만 내 순순한 사과에 김수호는 꽤 놀란 듯했다. 그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변명을 하거나, 혹은 어린애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라고 예상했던 모양이다. 곧 김수호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알면 됐어. 이번엔 꿀밤 한 대로 봐줄게.” 김수호가 손가락을 들어 내 이마를 향해 꿀밤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이마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무언가에 막혔다. 내 이마 바로 앞에서 모래가 나타나 그의 딱밤을 완벽하게 막아낸 것이다. 김수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미간에 장난스러운 심술이 어렸다. “이 녀석이….” 그가 짐짓 화난 척, 낮은 목소리를 냈다. “야. 쉴드 꺼. 한 대 때리게.” “푸흡…. 껐어요.” 나는 참지 못하고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김수호가 다시 한번 내 이마를 향해 손가락을 겨눴다. 이번에는 조금 더 힘을 실은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딱콩! 이번에는 정확하게 명중한 손가락. 하지만 예상했던 아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딱밤을 때린 김수호가 자신의 손가락을 붙잡고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우, 내 손이 더 아프네. 어떻게 돼먹은 몸이야?” 김수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황당함과 신기함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참나…. 큭큭.” 우리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고 실실 웃었다. 아까 전의 어색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을 보니 더욱 웃겼다. 결국 우리는 참지 못하고 동시에 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핫!”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숨이 가빠오고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나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김수호 역시 배를 잡고 있던 손을 내리고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너 때문에 오늘 하루치 웃음은 다 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