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명 남짓 되어 보이는 소규모의 병사들. 그들은 필사적으로 사방에서 밀려드는 오크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오크의 수 자체는 인간보다 적었다. 그러나 오크 하나하나는 인간보다 강하다. 기술도, 체격도, 심지어는 무장마저도. 방진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중심에는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이 있었다. 아마도 그가 지휘관인 모양. 그때, 오크 무리를 가르고 유난히 거대한 덩치의 오크가 나타났다. 양손에 도끼를 든 오크 대장. “크워어어어!” 오크 대장이 괴성을 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수직으로 내려 꽂히는 도끼날. 기사는 몸을 비틀며 겨우 검으로 그 공격을 받아냈다. 카앙-! 비명과 금속음이 울렸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기사가 말에서 떨어져 굴렀다. 곧장 몸을 일으켰지만, 그땐 이미 두 번째 공격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나는 손가락에 감겨 있던 반지를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샌드웜.” 내 부름에 반지가 스르르 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작은 모래 지렁이가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직후. 쿠구구구구궁-! 땅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오크와 인간, 양쪽 모두 갑작스러운 지진에 당황하여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크의 옆에서 땅이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언덕이 생겨났다. 갈라진 대지 사이로 보인 것은 몇 개로 찢어진 거대한 입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이빨이 늘어선 심연의 구멍. 샌드웜은 그대로 전장을 가로질렀다. 마치 기차가 모든 것을 치고 지나가듯. 대지에 굵은 선이 하나 그어졌다. 그 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갈려 나간 오크들의 시체와 파편으로 가득했다. “크… 크워…?” 살아남은 오크들이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동료 수십이 단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지형을 보고 경악했다. 순수한 공포가 그들의 눈에 떠올랐다. 나는 그 정적 속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수십 개의 모래 탄환이 생성되었다. 텅스텐 입자를 머금어 묵직한 은빛을 띠는 탄환들. 나는 혼란에 빠진 오크들의 머리를 정밀 조준했다. 퍼벙! 퍼버벙!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탄환에 맞은 오크들의 머리가 차례차례 폭발했다. “크, 크워어어!” 눈앞에서 동료의 머리가 터져나가는 것을 본 오크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무기를 내팽개치고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하는 오크들. 불과 몇 초 만에, 수십 명의 오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고요해진 전장에는 인간 병사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자신들과 싸우던 오크들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병사들의 시선이 이내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30 층대의 정보를 떠올렸다. 이 층에서부터는 가끔 NPC가 등장하며, 그들과 협력하여 퀘스트를 진행할 수도 있다고 했다. ‘아마 저 가운데의 기사가 네임드인 것 같내.’ 네임드 NPC, 기사 시모어.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성격이 오만하고 더럽기로 유명한 NPC였다. 시비를 걸거나 무시하는 일이 잦다던가. 나는 병사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래도 설마 죽을뻔한 걸 구해줬는데 시비를 걸진 않겠지? “… 저, 정지!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살아남은 병사 중 하나가 나를 향해 창을 겨누며 소리쳤다. 병사의 목소리와 창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흠?”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내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기사 시모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만 그 고함의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감히 현자님의 앞을 가로막다니! 당장 창을 거두지 못할까!” 기사의 일갈에 병사가 화들짝 놀라며 창을 내렸다. 그는 병사들을 한번 노려보고는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앞에서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례를 저지른 부하를 용서하십시오. 부하들이 눈앞의 기적을 감당하지 못하고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경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의 이름은 시모어. 위대한 분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오만하고 무례하다던 사람이 맞나? 시모어는 지나칠 정도로 깍듯하고 정중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 이름을 하나 만들어두는건데. 원스타? 그건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그냥 편할대로 부르세요.” “알겠습니다. 대현자님.” 시모어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를 앞에 두고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 시모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 “….” 결국 답답함을 느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대로면 진행이 안될 것 같았으니. “뭔가 하고 싶은 말 없나요?” “예?” 내 목소리에 시모어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물었다. “내게 하고 싶은 부탁 같은 거 없어요? 뭐, 오크들을 싹 다 죽여달라거나….” 순간 시모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나 시모어는 곧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대답했다. “그, 그럼 저희 주둔지까지 동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현자님께 정식으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잠시 휴식이라도 취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게 본 퀘스트인 모양이니 당연히 협조할 생각. “좋아요.” 내 짧은 대답에 시모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말을 끌고 왔다. “이 말을 타시죠. 은인께서 걸어가시게 할 수는 없으니.” 나는 말과 안장을 바라보았다. ‘좀 높은데…?’ 내 머리랑 비슷한 높이의 말의 허리. 안장도 내 허리보다 높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 지팡이로 땅을 짚었다. 순식간에 발판 하나가 만들어졌다. “기, 기적이다….” 주변의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마법사 처음보나? 나는 괜히 뿌듯해진 마음으로 발판을 밟고 올라가, 안장에 한쪽 발을 걸쳤다. 그리고 몸을 단숨에 끌어올려 말 위에 타는 순간이었다. “젠장, 다리가 너무 짧잖아….” 말에 성공적으로 올라타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양 발이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게다가 처음 타본 말은 생각보다 불안정했다. 다시 고소공포증이 도질 것만 같았다. 나는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 그냥 걸어갈게요.” 나는 말에서 다시 내렸다. 고삐를 잡고 있던 시모어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죄,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 괜찮으니까 빨리 가기나 해요.” “아닙니다!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그냥. 빨리. 가자고요.”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시모어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말을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병사들 역시 서둘러 대열을 정비하고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맨 뒤에서 그들을 따라 걸었다. ***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언덕 너머로 허름한 막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모어는 가장 크고 깨끗해 보이는 천막으로 나를 안내했다. “누추하지만, 부디 편히 쉬십시오.” 시모어는 나를 위해 모포를 깐 의자를 마련해 주었고, 다른 병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물과 음식을 가져왔다. 물론 그들이 내놓은 것은 딱딱한 육포가 전부였지만, 그것이 그들이 가진 최선인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이 주둔지의 상황은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나쁘지 않은 대접이었다. 아니, 솔직히 꽤 만족스러웠다. 내가 육포를 몇 조각 삼켰을 때였다. 시모어가 다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현자님. 염치없는 부탁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본론이 시작되는 모양. “저희는… 저희 부대의 군기를 적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시모어의 목소리가 부끄러움과 분노로 떨렸다. “군기는 곧 명예입니다. 그것을 잃은 채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시모어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이마가 거의 바닥에 닿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가 더 말을 잇기도 전에 대답했다. 어차피 그리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으니. “군기를 되찾아 달란 거죠? 알았어요. 어디에 있는데?” 내 흔쾌한 수락에 시모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적들은 저 언덕 너머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제가 길을…” 그러나 시모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밖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적습이다! 오크들이 몰려온다!” 막사 밖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시모어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백이 넘어 보이는 오크 부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병사 하나가 커다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원래의 문장이 그려져 있던 자리에는, 붉은 피로 그린 조잡한 그림이 덧칠되어 있었다. “저 깃발…!” 시모어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의 군기를 저런 흉물로 만들다니…!” 깃발을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퍼져나가며, 오크를 감싸고 있었다. 오크들의 입에서 거품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누가 보아도 정상과는 거리가 먼 상태. 깃발로부터 무언가의 버프를 받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벌써 여기까지….” 병사들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찾으러 가야 할 물건이 제 발로 찾아와 준 셈이니. 나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주변의 땅은 이미 모래로 변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튕겼다. 수십 발의 모래 탄환이 허공에 생성되었다. 퍼버버버벅! 가장 앞줄에서 돌격해 오던 오크들의 머리가 예외 없이 터져나갔다. “한번 더.” 나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무작정 돌격해 오던 오크들은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한 채로 제자리에서 쓰러졌다. 마치 나 혼자서 전열 보병이 된 것 같은 기분. 제자리에 서서 손가락을 몇 번 튕기는 것만으로, 백에 가까운 오크 부대가 순식간에 전멸했다. “…….” 세상이 다시 조용해졌다. 오크들이 달려오던 자리에는 시체의 언덕만 남아 있을 뿐. 나는 천천히 걸어가 깃발을 뽑아 들었다.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으, 냄새….” 나는 깃발을 들고 시모어에게 돌아갔다. 시모어와 병사들은 입을 벌린 채, 마치 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받으세요?” 나는 별생각 없이 깃발을 그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되찾아 주기로 약속한 물건이었으니까. 하지만 시모어는 깃발을 받지 않았다. 시모어는 깃발에 덧칠된 오크의 문양을 보며 슬픔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 저희의 혼은 이미 더럽혀졌군요.” 시모어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대현자님. 그 깃발은… 이제 저희의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희는 이 깃발을 다시 들 자격이 없습니다. 이미 더럽혀진 것이니, 부디 마법사님께서 전리품으로 가져주십시오.” “전리품?” 나는 이걸 어디에 쓰나 싶었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걸레짝을 받아서 뭘 한단 말인가? 내가 막 거절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퀘스트 ‘빼앗긴 군기’를 완료했습니다.] [탑 31층(EXTREME) 클리어를 축하합니다.] [최초 클리어 보너스가 적용됩니다!] [랭킹 1위 보너스가 적용됩니다!] [보상 아이템 ‘더럽혀진 군기’에 보너스가 적용됩니다.] 메시지가 사라짐과 동시에, 내 손에 들린 깃발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건…!” 시모어와 병사들이 경악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빛과 동시에, 깃발 위에 덧칠해져 있던 붉은 핏물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낡고 해진 천은 새하얀 비단처럼 변했고. 순수하고 눈부신 백색으로 다시 태어난 깃발. 그 중앙에서 한 줄기 금빛의 실이 피어나더니, 정교한 문양을 수놓기 시작했다. 황금빛의 모래시계가 그려진 문양. [아이템 ‘더럽혀진 군기’가 ‘시작의 깃발’로 진화했습니다.] 시모어와 병사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마법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게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적의 증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오….”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신호였다. 시모어를 시작으로 모든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흐음….” 나는 하얗게 빛나는 나의 깃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만의 문양. 그 디자인이 나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익숙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탑에서 배출되는 감각. 주변의 풍경이 빛에 휩싸이며 빠르게 멀어졌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내 집 앞의 전용 도로 위였다. 내 손에는 황금빛의 모래시계가 수놓인 새하얀 깃발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깃발에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영역 선포 시, 사용하실 문구와 효과음을 입력하십시오] [현재 문구: 자동] [현재 영역: 반경 10m / 80 데시벨] 무슨 이런 잡스러운 효과가? “이건 일단 꺼놔야겠다….” 누가봐도 잘못 만졌다간 대형 사고가 터질 것만 같은 예감. 내가 망설임 없이 해당 옵션을 끄려고 했을 때였다. “대전의 적법한 지배자, 모래먹는 자, 얼굴 없는 자, 인과에서 벗어난 자, 오크들의 원수, 세계수를 죽인자, 세계수를 되살린 자, 엘프들의 구원자, 타락한 엘프들의 재앙, 극악무도한 노예주….” “이게 뭐야!” 새하얀 빛이 깃발에서부터 쏟아지더니, 커다란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