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반지의 자세한 능력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불의 기억] [등급: 레전더리] [효과: 드워프들의 설계도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기술을 흉내 낼 수 있게 됩니다.] [현재 단계: Lv.1] “설계도가 담겨 있다라….” 나는 시험 삼아 반지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동시에 내 앞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책 한 권이 펼쳐졌다. 실제 손으로 펼치고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드워프의 키보다도 훨씬 두꺼운 책. 안에는 복잡한 그림과 함께 낯선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29층의 석판에서도 보았던 드워프의 글씨. 설마 이번에도 샌드웜이 일일이 번역해주어야 하나? 그렇다면 곤란한데. “어, 읽히네?” 곧 내가 그 글자들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마치 오랫동안 사용해 온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정보들. “오….” 아무래도 이 반지는 드워프어 통역 기능이 탑재된 모양이었다. 나는 감탄하며 눈앞에 펼쳐진 설계도 목록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진짜 별 게 다 있네….” 페이지를 넘길수록 내 입이 벌어졌다. 목록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다. 단순한 못과 망치부터 시작해서, 온갖 기계장치들이 가득했다. 다만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의 항목이 희미한 회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검은색 글씨는 목록의 가장 첫 페이지에 있는 몇 가지뿐. “왜 레벨이 있나 했더니만….” 나는 시스템을 금방 파악했다. 각 설계도마다 요구하는 제작 레벨이 있었다. 내 현재 레벨로는 만들 수 없는 것들은 회색 글자로 처리. 경험치를 쌓아 레벨을 올려야 더 많은 설계도가 해금되는 방식이었다. “뭐가 있는지나 볼까?” 나는 호기심에 책을 휙휙 넘겨보았다 뒤로 넘길수록 신기한 물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미스릴 거신병] [차원 수납함] [마법 배터리] “이야 이런 것도 있어?” 심지어는 내가 25층에서 만났던 중간 보스도 리스트에 있었다. 관심이 커진 나는 아예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천공 요새 발할라] “… 이건 꼭 만들어봐야겠다.”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중간의 차원 수납함이나, 마법 배터리도 충분히 유용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천공 요새? 하늘을 떠다니는 섬이라고? 이건 전재산을 탕진하더라도 꼭 만들어봐야 했다. 드워프들의 기술력은 내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또 뭐가 있으려나….”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른 설계도들도 샅샅이 훑어보았다. 얼마 안 가 또 눈에 띄는 항목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공 작살포: 용 사냥꾼] 설명을 읽어보니 하늘을 나는 적을 자동으로 추적하여 거대한 마력 작살을 발사하는 무기였다. “공중 공격 수단이라…. 필요하긴 하지.”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공중의 적에게 대항할 방법이 전무했다. 내 모든 마법은 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지상의 적에게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하늘을 나는 용이나 그리폰 같은 몬스터를 만난다면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뭐, 아직까지 공중 몹은 한 번도 못 보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걸 하나쯤 챙겨두면 든든할 것 같았다. 나는 작살포의 요구 제작 레벨을 확인했다. [요구 제작 레벨: 50] “….” 나는 조용히 책을 뒤로 넘겼다. 지금 내 제작 레벨은 1. 까마득한 차이였다. “천공 요새는 몇 레벨…. 아니, 씨발. 이걸 언제 찍어.” 내친김에 다시 확인해 본 천공 요새의 요구 레벨은 무려 100. 눈앞이 캄캄해지는 숫자. “아니야, 포기하지 말자.” 레벨이 얼마나 빨리 오를지는 모르는 일이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난 탑 등반 말고는 하는 일도 없다. 매일 조금씩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새 컨텐츠가 열렸다고 생각하지, 뭐.” 나는 다시 책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작에 필요한 요소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기술 레벨. 이건 제작 경험치를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 재료. 이건 탑에서 구하거나 돈으로 사면 해결될 문제였다. 셋째, 설비. 다시 말해 모루나 용광로를 포함한 각종 대장간 설비들. 결국 마지막이 가장 큰 문제였다. 우리 집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내가 막막한 표정으로 책을 노려보고 있을 때, 반지에서 새로운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마력 변환 시스템 활성화 가능] [일부 설비 및 공정을 마력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경고: 매우 위험함.] [마나 소모가 극심하고 제어가 극히 어려우니 마스터급 장인이 아니라면 시도하지 절대 시도 하지 마십시오.] [마력 탈진, 고혈압, 당뇨, 우울증, 심장 마비, 요로 결석 외 기타 52가지 재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날 위한 거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옵션을 활성화했다. 그러자 내 눈앞에서 푸른 마력 입자들이 뭉쳐지더니, 빛으로 만들어진 반투명한 망치와 모루가 허공에 나타났다. “한번 어느 정도로 어려운지 감이나 잡아볼까?” 경고창을 마냥 무시하기엔 찝찝했다. 일단은 쉬운 걸로 감을 잡아볼 생각. 나는 첫 번째 제작 퀘스트를 확인했다. [제작레벨 1→2] 고리 100개 만들기 (0/100) 바늘 100개 만들기 (0/100) 못 100개 만들기 (0/100) “…노가다 미쳤네.” 다행히 재료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철. 나는 재료 수급을 위해 전화를 걸었다. *** 이걸 대체 어디다 쓰는 건지 의아해하는 브로커와의 실랑이가 잠깐 있었지만, 금세 몇 개의 철 주괴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몇 개를 꺼내 빛의 모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빛의 망치를 집어 들었다. 의외로 묵직하게 느껴지는 망치. “좀 걱정이 되기는 한데….” 나는 태어나서 망치질은커녕 못 한 번 박아본 적 없었다. 내가 살면서 쓴 공구라고는 십자드라이버와 육각 렌치가 끝. 게다가 도구도 걱정스러웠다. 내가 대장장이 일에 대해서 잘 알진 못했다. 그러나 모루와 망치만으로 바늘이나 고리를 뚝딱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반지는 내게 대장장이의 지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망치를 들어 올리자, 머릿속에 떠올라 있던 설계도가 빛나며 첫 번째 타격 지점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저 그곳을 향해 망치를 휘두르기만 하면 되었다. 챙! 종을 치는 듯한 맑은 소리가 울렸다. 내가 휘두른 망치가 철 주괴에 닿는 순간, 타격 지점에서부터 푸른 마력의 파동이 퍼져 나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단했던 철 주괴가 마치 점토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그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망치가 한 일은 그저 마력을 전달하는 스위치 역할뿐. 실질적인 가공은 반지와 내 마력이 알아서 처리해주고 있었다. 철이 늘어나고, 접히는 모든 과정이 내 의지에 따라 마법처럼 이루어졌다. 나는 설계도가 지시하는 타격 포인트에 따라, 몇 번 더 망치를 내리쳤다. 그때마다 철은 고리의 형태로 완성되어 갔다. 단순히 망치를 몇 번 내리치는 것 만으로, 완벽한 형태의 고리 하나가 모루 위에 놓였다. [고리(Lv. 1)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고리 100개 만들기 (1/100)] “생각보다 훨씬 쉬운데?” 경고창에는 분명 마나 소모가 극심하고 컨트롤도 어렵다고 했지만, 내겐 어느 것도 걸리지 않았다. 용기를 얻은 나는 내친김에 계속해서 망치질을 이어갔다. 깡! 깡! [고리 100개 만들기 (20/100)] 그러나 고리를 20개쯤 만들었을 때, 나는 슬슬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 같은 엘리트에게 이런 단순 반복 작업은 맞지 않아….” 앞으로 이걸 80개는 더 만들어야 한다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숫자. “으…. 손도 저리고….” 심지어 왠지 모르게 팔도 아파오는 것 같았다. 나는 손바닥을 허공에 털었다. 내 근력수치를 생각한다면 이깟 망치질로 손이 아픈 것은 이상한 일. 마법 모루에 체력을 소모하는 옵션이 달려있는 게 분명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분신!” 나는 즉시 바닥에서 모래를 끌어올려 나와 똑같이 생긴 양산형 분신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력을 이용해 빛의 망치와 모루를 하나 더 생성하여 분신에게 쥐여주었다. 분신은 눈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뭘 봐? 시작해.” 분신은 툴툴거리면서도 망치질을 시작했다. 깡! 깡! 빠르게 고리가 완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분신을 이용하면 경험치도 두 배로 오르겠지?” 분신이 첫 번째 고리를 완성했을 때,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고리 100개 만들기 (20/100)] “씨발?” 경험치는 그대로였다. 분신이 한 작업은 내 경험치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만화에서처럼 숙련도를 날로 먹는 건 불가능한 모양. “…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어. 초호기!” 나는 초호기를 불러냈다. 초호기의 몸을 키워준 뒤, 모루와 망치를 한 세트 만들어주었다.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생전 처음 하는 망치질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고리 100개 만들기 (21/100)] 성공적으로 카운팅 되는 숫자. “좋아! 이제 79개만 더 만들자!” “….” “앗! 뭐 하는 거야!” 나와 망치를 몇 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초호기는 바닥에 망치를 던져버리고 냅다 도망쳐버렸다. 제길, 낳아주고 키워준 대가가 겨우 이거라니? 아무래도 핸드폰 시청이 교육에 나쁜 영향을 준 것 같았다. 머리가 너무 굵어진 초호기 대신 일을 할 녀석이 필요했다. “대장간 일 전용으로 2호기를 만들어?” 좋은 생각 같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손가락을 또 하나 소모해야 한다는 것. 저번에 시도해 보았는데, 8개로는 컴퓨터 타자 속도가 너무나 느려져 쾌적한 인터넷 생활에 지장이 많았다. 분신을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는 손가락을 쓰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혹시 의수 같은 게 있으려나?” 나는 혹시나 싶어서 책을 넘겨보았다. 과연, 비슷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흐르는 손]. 제작 레벨은 10. 사용자의 신체에 맞춰 그 형태를 바꾸는 의수였다. “계속 형태가 변한다는 게 마음에 드네.” 나는 꽤 자주 신체가 사라졌다 생겨났다 하니까. 이렇게 유동적인 아이템이 좋았다. 게다가 제작 레벨도 10. 이 정도면 금방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레벨 10까지는 혼자 힘으로 올려야 한다는 거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혼자 망치를 집어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틈날 때마다 꾸준히 레벨을 올려두는 수밖에. 나는 나름의 목표를 세우기로 했다. 1차 목표가 바로 의수. 이것으로 2호기나 3호기까지도 만들어서 내 일을 돕게 한다. 2차 목표는 대공 방어 수단인 용 사냥꾼 작살포. 언젠가는 필요할 때가 올 것 같았다. “뭐, 그전에 공격기가 나와주면 필요 없겠지만.” 하지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최종 목표인 천공 요새 발할라. 언젠가는 저 하늘에 나만의 별을 띄우고 말리라. 나는 다시 한번 망치질에 집중하며, 먼 미래의 꿈을 그렸다. 지루한 노가다였지만, 명확한 목표가 생기니 조금은 할 만한 것 같기도 했다. *** 그 후로 며칠. 나는 집에서 망치질만 했다. 고리와 바늘, 못을 수백 개씩 찍어내며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제작 레벨은 드디어 5가 되었다. 목표까지 앞으로 절반. 하지만 슬슬 지독한 노가다에 진절머리가 났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쉬었다가 해야겠어.” 나는 다시 탑으로 향했다. 망치질보다는 몬스터의 뚝배기를 깨는 것이 훨씬 더 즐거웠으니. 스트레스를 풀 일이 필요했다. [탑 31층(EXTREME)에 진입합니다.]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시야가 전환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넓은 초원.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부드러운 바람이 풀잎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30 층대부터는 NPC들도 나온다고 했지?” 네임드 NPC에 대해서는 숙지를 하고 왔다. 문제는 그중에 정말로 만나기 싫은 녀석도 하나 있다는 것. 하필 30 층대 전체에서 랜덤 등장이라 나올 때까지 그 사실을 미리 알 수 없다는 사실도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그때였다. “와아아아아아!” “죽여라! 모두 죽여라!”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땅을 울리는 거대한 함성이 들려왔다. 한쪽은 녹색 피부의 오크 무리였다. 5층에서 만난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무장과 기세. 피로 번들거리는 무기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갑옷을 입은 지쳐보이는 인간 병사들. 그들은 돌격해 오는 오크 무리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 함성과 고통스러운 비명. 피 냄새와 흙먼지가 바람을 타고 내 코끝을 스쳤다. 나는 그 광경에 압도되어 멍하니 바라보았다. 30 층대의 컨셉은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