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보스는?” 내가 의아함에 주변을 둘러보던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궁-! 갑자기 땅 전체가 낮게 울리며 진동했다.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며 내는, 육중한 무게감이 실린 발소리.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위치는 내 바로 뒤! 나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콰가가가각! 동시에 굉음과 함께 거대한 암벽이 무너져 내렸다. “콜록, 콜록…. 젠장, 흙이 입에 들어갔잖아….” 엄청난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그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25층의 보스. 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건 대체 어디 쓰려고 만든 거야?” 놈의 한쪽 팔에는 톱니바퀴가 달려있었다. 버킷 휠 굴착기에서나 볼 법한 무식하게 커다란 톱니바퀴. 그 몸체를 지탱하는 것은 무한궤도가 아닌 곤충처럼 생긴 여섯 개의 거대한 기계 다리였다. 몸체 곳곳에는 그 외에도 집게 팔과 드릴, 컨테이어 벨트 같은 온갖 종류의 중장비들이 기괴하게 융합되어 있었다. 마치 아이가 공사장 장난감을 전부 한데 모아 붙여놓은 듯한 모습. 기계 하나에 백화점이라도 차리려고 한 것인가? 하지만 나는 그 우스꽝스러운 외견을 비웃을 수 없었다. 크기만 따져도 20층에서 마주했던 세계수와 비슷할 정도였으니까. 녀석의 수많은 기계 눈에서 붉은빛이 동시에 들어왔다. 목표는 오직 나 하나. 산을 부수기 위한 장비가 나를 향해 휘둘러진다. 다가오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자동 방벽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다. 나는 즉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막아!” 나는 체내에 축적된 오리할콘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연분홍빛의 두꺼운 모래 방벽이 솟구쳤다. 콰아아아앙-! 충돌과 동시에, 동굴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천장의 벽에서 바위들이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이게 평타라고?” 무슨 위력이 내 필살기 신의 지팡이와 비슷한 체급이다. 나는 혀를 차며 공격을 준비했다. “덩치가 크니까 탄환은 효율이 나쁘겠지.” 구멍 몇 개 뚫는다고 해서 멈추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나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빠르게 회전하는 칼날이 허공에 떠올랐다. “길게, 더 길게….” 정신을 집중했다. 평소에 만들던 다이아 커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 칼날이 길어질수록 제어는 힘들어졌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고무줄의 한쪽 끝을 잡고 있는 듯한 불안감. 마침내 내 키의 몇 배는 되는 회전톱이 만들어졌다. 나는 고무줄을 잡은 손을 놓는 것처럼 녀석을 방출했다. 참격이 앞으로 쏘아졌다. 서걱-! 시원한 파열음. 동시에 거대한 칼날이 보스의 여섯 다리 중 둘을 매끄럽게 절단했다. 보스의 거대한 몸체가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졌다. “됐다!” 바로 그때였다. 파직! 잘려나간 단면에서 무언가가 번쩍였다. 너무 빨라서 눈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결과를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탁, 타탁! 스파크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자동 모래 방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로 새하얀 전류가 꿈틀거렸다. 방벽에 부딪힌 전류는 잠시 머무는가 싶더니, 이내 흡수되어 사라졌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자식이…. 번개를 날렸다고?” 그것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미친 거 아닌가?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자동 방벽이 없었다면, 혹은 그 속도가 느렸다면. 나는 그대로 전기 통닭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흙법사여서 살았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래가 전기와 상성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물법사였으면 방금 감전으로 이승하직했겠지?” 역시 땅법이 최고다. 카운터 당할 일이 없으니까. 나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이제 약점은 파악했다. 다리 둘이 부서지자 균형이 눈에 띄게 흔들리는 녀석. 하나만 더 부수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겠지. 나는 다시 한번 거대한 칼날을 빚어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르고 더 정교했다. 기우뚱거리며 다리를 이동해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녀석. “한 번 더!” 내 외침과 함께 두 번째 참격이 날아갔다. 서걱-! 첫 번째 공격과 마찬가지로, 녀석의 또 다른 다리 하나가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이제 남은 다리는 셋. 끼이이이익-! 기계는 비명 같은 굉음을 내지르며 균형을 잃었다. 거대한 몸체가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우뚱 가라앉았다. 이제 움직이지 못하는 놈에게 다가가 풍화로 마무리하면 끝. 나는 승리를 확신하며 바닥을 움직여 녀석에게 다가갔다. 지팡이 끝을 쓰러진 기계의 몸체에 겨누었다. 풍화. 접촉한 부분부터 단단한 금속이 모래가 되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속도가 좀 느린데….” 마치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려는 것 같은 느낌. 나는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기계, 몸체가 강철이 아니라 미스릴이었다. 마법에 대한 강력한 저항성을 가진 금속. “와, 구성 한번 진짜 더럽네.” 악의적인 몬스터 설계에 극찬이 튀어나왔다. 진짜 편하게 가는 일이 없었다. 나는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만들었던 것 중 가장 거대하고, 가장 날카로운 칼날. 내 모든 마력을 집중시킨 최후의 공격이었다. “반으로 갈라져 죽어.” 거대한 참격이 공간을 갈랐다. 서걱-! 거대한 몸체가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그 틈새로 여전히 붉은빛을 내는 녀석의 코어가 보였다. 저것만 파괴하면 끝. 하지만 순간 망설임이 올라왔다. 품속에서 열기를 발하는 산의 심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것도 기계 코어인데 가능하지 않을까? 어차피 부술 거라면 한번 시험해 볼 가치는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녀석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반 토막 난 기계의 내부로 손을 뻗어, 뜨겁게 박동하는 코어를 움켜쥐었다. 우드득-! 연결된 케이블과 파이프를 억지로 뜯어내자, 코어가 손안에 잡혔다. 삐이이이이익-. 코어가 뽑히자 기계의 모든 불빛이 꺼지며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이게 되네?” 나는 품속에서 산의 심장을 꺼냈다. 그리고 방금 빼낸 뜨거운 코어를 그 위에 가져다 댔다. 스르르륵-. 다른 코어들이 그랬듯이, 액체처럼 녹아내리며 심장의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코어. 심장의 붉은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이렇게나 뜨겁다고?” 동시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이템을 감싸고 있던 모래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투명한 유리구슬로 변해버렸다. “이놈의 히든 피스 아이템은 왜 다 이 모양이야?” 나는 투덜거리며 유리가 되어버린 모래를 털어냈다. 세계수의 씨앗도 그렇고, 이 돌덩어리도 그렇고. 하나같이 보관하기 골치 아픈 물건들뿐이었다. 문득 내 시선이 쓰러진 보스의 몸체에 다시 꽂혔다. 뇌리를 스치는 아주 기묘한 생각 하나. “이거… 먹을 수 있는 건가?”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스스로에게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기름과 먼지로 뒤덮인 고철 덩어리다. 너무 더럽고 위험하다. 뭘 믿고 이걸 입에 넣는단 말인가. “…근데 미스릴이잖아.”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스릴. 내 마법에도 버틸 만큼 강력한 마법 저항력을 지닌 금속. “딱 한 입만 먹어볼까?” 결국 실용주의가 혐오감을 이겼다. 우선 더러운 겉면부터 처리해야 했다. 나는 칼날로 사과 껍질을 깎듯이 바깥쪽 장갑을 벗겨냈다. 사각사각. 겉껍질이 벗겨져 나가자, 그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매끄러운 속살, 아니, 뼈대가 드러났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드러난 뼈대의 가장 끝부분을 한 입 베 어 물었다. 콰작. 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익숙한 감각. “틀림없는 미스릴이군.” 내가 아직 한참이나 필요한,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바로 그 귀한 금속.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각을 잡고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층을 클리어했으니 시스템이 언제 나를 쫓아낼지 모른다. 그전에 저 거대한 미스릴 덩어리를 전부 먹어치워야 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다이아 커터로 한입에 삼킬 수 있도록 가공되는 미스릴. 와작와작와작와작. “남들이 보면 진짜 미친놈처럼 보이겠네….” 나는 그런 자조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체면 차릴 시간에 미스릴 한 조각이라도 더 먹는 게 이득이다. 나는 거의 몸을 파묻다시피 하며 금속을 삼켰다. 그렇게 정신없이 먹어치우던 와중. 나는 문득 내 몸에 일어난 또 다른 변화를 깨달았다. 그것은 음식을 아무리 먹어도 배가 절대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치 내 위장이 무한한 공간을 가진 차원 주머니라도 된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요즘은 배고픔이라는 감각 자체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제는 며칠을 굶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이미 인간의 생리 현상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념에 잠긴 것은 아주 잠깐. 나는 다시 눈앞의 식사에 집중했다. 생각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먹어야 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내 몸에 미스릴이 한계까지 차올랐다. 나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푸하…. 잘 먹었습니다.” 그 순간, 내 몸이 희미한 빛에 휩싸이며 시야가 흐려졌다. 탑에서 퇴장하는 익숙한 감각. 나는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몰려오는 피로감에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식곤증인가? 미스릴을 소화시키느라 그런지 몸이 유난히 나른했다. *** 끔찍한 열기가 잠을 깨웠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축축하게 달라붙은 잠옷이 심히 불쾌했다. “뭐야…. 왜 이렇게 더워….” 가을에 이 날씨라니. 진짜 지구가 망해도 제대로 망했나? 나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에어컨이라도 켜야겠다 싶어 리모컨을 찾으려던 순간.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기는 지하실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