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도 잠시, 서원광은 빠르게 목표를 직시했다. 기척이 읽혔으나, 대살문의 특급 살수라는 직책에 걸맞게 당황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평정을 되찾는 속도에서 평범한 살수들과 그렇지 않은 살수들이 갈렸다. 곧장 천향루 인근을 살폈다. 평범한 행상인 따위로 위장한 흑룡회의 무인들이 적지 않았다. 대살문의 살수들 역시 형태를 가리지 않고 변장을 마친 상황이었다. 상대가 정파인일 경우 자주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무고한 이들 사이에 숨어 빈틈을 노렸다. 상대의 검격 발경을 제한하기에 이만한 수단이 없었다. 어디서 기습을 당할지 모르니 수싸움에서도 자연스레 우위에 서게 되었다. 자고로 살수는 제 목숨보다 임무의 성공을 중히 여기는 족속이라 했다. 살수의 시초 격인 형가(荊軻) 역시 시황제를 암살하려 할 때 그러했다던가. 사지가 잘려나가도 목표물의 목에 칼을 박아넣으면 이득이라 여겼다. 서원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은 탓이다. 명령을 따르다가 죽는 것이 살수의 생이라 배웠다. ‘거리는 백 장.’ 고수의 움직임을 놓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눈을 두 번 깜빡일 시간이면 코앞까지 다가와있지 않을까. 허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촤락―! 대궁의 시위를 붙잡은 서원광의 손 끝에 얕은 미풍이 일렁거렸다. 씨족의 공능을 발현한 것이다. 쐐애액―! 저물어가는 석양 속에서 먹을 묻힌 화살촉이 쏘아졌다. 인지 범위를 아득히 추월하는 속도였다. 본래도 수백 장을 거뜬히 나아가도록 하는 절세 궁술이다. 백 장 거리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씨족의 공능을 타고나지 않는 이상 인지조차 불가할 것이다. ‘고강한 인물이니 인지는 할 수 있겠다.’ 그것이 최선이라 여겼다. 쓰러진 제자를 절망어린 눈으로 내려다볼 것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허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뒤이어 민초로 위장한 사마외도들이 일시에 들이닥칠 것이다. 자신은 그 틈을 노려 신녀문주의 목숨을 취하면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두 번째 화살을 매길 때였다. “네놈은 몸 성히 살려두지 않으마.” 등 뒤에서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강한 선녀와도 같은 자태였다. 바람에 너울지는 머리칼, 섬섬옥수와 같은 손 끝에는 자신이 방금 전 쏘아보냈던 화살이 들려 있었다. ‘……!’ 소름이 돋기도 전에 곧장 발을 떼고 물러났다. 딛고 있던 기와가 뭉개졌다. 동시에 발치에서 바람이 움텄다. 씨족의 공능을 발현한 것이다. 벽력탄이라도 터뜨린 것처럼 몸이 곧장 뒤로 튕겨나갔다. 아니, 그래야 했다. 앞꿈치의 바람이 잠잠해졌다. ‘무슨?’ 미간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그를 도와야 할 바람이 역으로 그를 떠밀고 있었다. 공기가 좌우로 갈라지고, 바람이 그를 포박하듯 신녀문주를 향해 끌어당겼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생이 살수인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리는 것만 봐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 만했다. 극히 고귀한 씨족에게만 허락되는 기예였다. 대자연이 도와주는 수준을 넘어 수족이 되기를 자처한다고 했다. 씨족 가운데에서도 천하에 단 넷에게만 허락된 경지였다. “대수림에 있어야 할 자가 어찌하여……!” 서원광의 눈동자가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손끝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씨족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자가 어찌 귀까지 숨긴 채 인간 행세를 하고 있단 말인가. 다급히 쏘아보낸 화살이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바람이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신녀문주는 일렁이는 풍랑 사이에서 표정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을 수족처럼 부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듯했다. 전신에서 소름이 끼쳤다. 서원광은 망설이지 않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 씨족의 공능을 내팽겨친 채, 본인의 진기만을 다루면서다. ‘알려야 한다.’ 신녀문주가 존귀한 혈통임을 알려야 했다. 대살문으로는 안 된다. 바람이 그녀를 따르는 한, 대살문의 문주조차 감히 그녀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소림의 법력이 사마외도에게 넘볼 수 없는 상성으로 군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후우욱! 하늘에서 바람이 길게 너울졌다. 동시에 진기가 바람과 어우러져 무형의 손바닥과 같은 형태를 띄는데, 뻗어오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바람 중에서 가장 빠르고 위대한 바람이나 보일 법한 위용이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신녀문주는 씨족의……! 꽈드드득―! 거기까지였다. 붙잡힌 순간 전신의 뼈와 중하단전이 한순간에 바스라졌다. 서원광은 전신에서 밀려드는 격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혼절했다. 꺼져가는 의식 너머로, 신녀문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악행을 저지르면 어찌 되는지, 네놈들이 본보기가 되리라.” ***** 천향루 인근은 하남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마외도와 외적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한 탓이다. 서연은 살수를 구분하는 방법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무력을 알고도 찾아온 놈들이라면 표정이나 몸가짐만으로는 구분하지 못하도록 행색을 다듬었을 것이다. 진기를 퍼뜨려 하나하나 근육의 짜임새를 확인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허나 일촉즉발의 상황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따라 바람이 거세구나.’ 허공답보를 구사하는 중인 탓일까, 평소보다 바람을 강하게 느꼈다. 안겨오기라도 하는 듯했다. 당장 중요치 않은 일이었다. 곧장 상념을 떨쳐내고는 사방으로 도화색 진기를 퍼뜨렸다. 뭣 모르는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었다. 화아악―! 심상에 영향을 받은 탓일까, 진기가 자연스레 연꽃의 형태를 띄었다. “어머니, 아버지! 하늘을 보세요!” “……내가 지금 몽혼에서 깨어나지 못했나? 오늘 그렇게 많이 마시지는 않았던 것 같거늘. 헛것이 다 보이는구나.” “선녀님께서 내려오신 모양이다. 너희들도 경박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어서 절하려무나. 선녀님께서 경을 치실게다.” “방장대사께 얼핏 신녀문주의 불경 공부가 그리 뛰어나다는 사실을 듣기는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차마 몰랐다. 도대체 심상이 어떠하기에 진기가 연꽃의 형태를 띈단 말인가. 선재(善哉), 선재로다.” “아미타불…….” 노을이 뉘엿하게 져가는 하늘에 떠오른 도화색 연꽃을 보는 행인들의 대화였다. 허나 이적을 일으킨 당사자인 서연은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렸다. 뭇 행인들이 감탄을 감추지 못하고 연꽃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이상할 정도로 동요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네놈들이구나.’ 하늘에 기이할 정도로 커다란 연꽃이 피어올랐으면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보통 사람의 심리다. 눈치채지 못했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시선을 따라 돌리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이다. 허나 천향루 인근에는 정상에 속하지 않는 자들이 스물하고도 셋이나 되었다. 맞은편 객잔에서 옆사람들과 떠들던 사내가 우뚝 선 채로 제자들이 있는 방향을 노려본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보였던 노인이 지팡이 속에서 진검을 꺼냈다. 비파를 튕기던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각당한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반응했다. 살수들 특유의 고절한 은잠술 탓이다. 안법이 발달한 고수가 아니면 시야에 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엇, 밀지 마시오!” “크헉!” 개중에는 막무가내로 주변인들을 밀치면서 달려오는 이들도 있었다. 초장부터 무인으로서의 기도를 숨기지 않던 이들이다. 그 중 제자들을 향해 달려가던 사내가 등에 매고 있던 봇짐에서 큼지막한 도를 꺼내들었다. 가볍게 휘두르며 도격을 다듬는 모습이 유려하기 그지 없었다. 흑룡회의 풍마나찰도에게서 보았던 도격과 유사했다. 놈들도 숨길 생각이 없어보였다. 병장기로 상대의 목숨을 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파다웠다. 불현듯 한 걸음에 천향루의 담장 위로 튀어오른 사내가 서늘한 도격을 내질렀다. 빛살과도 같았다. 첫 수부터 전력을 발휘한 것이다. “신녀문주는 본 회의 징치를―!” 스윽. 문장을 맺기도 전에 출수했다. 민초들 틈에 숨어든 살수들을 구분해내기 전부터 전신에서 공력을 끊임없이 순환시키는 중이었다. 손바닥이 땅으로 향하는 순간 강대한 기파가 번져나갔다. 힘을 주어 주먹을 쥔 순간 농밀한 기운이 실선처럼 번져나가 사내를 옭아맸다. 비충을 잡는 듯한 가벼운 손짓에 막대한 힘이 담겼다. “허억……!” 단말마처럼 흘러나온 신음을 내뱉은 사내는 압도적인 기세에 선 채로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육신이 대못이라도 되는 듯했다. 지면에 단단히 틀어박힌 다리를 중심으로 균열이 번져나갔다. 서연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힘을 불어넣었다. 사내의 육신이 점차 지면을 깊이 파고들어갔다. 전신이 터져나가는 듯한 격통에 경련을 멈추지 못했다. “커허…….” 얼마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지면 위로 머리만 드러낸 채였다. “어찌 사람이……!” “모두 엎드려! 선녀께서 노하셨다!” “호광에서 허공을 디뎠다더니……. 허언이 아니었구나.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몇 명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곧장 허리를 숙였다. 살아있는 신선에게 화를 입을까 염려한 것이다. 화련에게 가시를 발라주던 당소소는 소란이 일어난 창 밖을 응시했다. ‘슬슬 잡것들이 꼬이는구나.’ 스승님의 위명을 생각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명문세가의 직계로 살아가며 비슷한 일을 자주 겪은 탓에 크게 당황하지도 않았다. ‘실로 천하를 논할 만한 장법이시다. 나중에 저것도 알려주실까.’ 화련은 그녀보다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젓가락으로 식사를 이어나가는 눈동자가 굉장히 차분했다. 창 밖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명문대파의 후계자나 보일 법한 얼굴이었다. 문파의 수장을 온전히 믿는 것이다. ‘……역시 사저시다.’ 나이를 불문하고 윗사람으로 모실 만했다. 스승님께서 첫째 제자로 낙점하신 이유를 알 듯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겠다. 당소소 역시 화련을 본받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음식을 마저 먹는 것에 집중했다. 화아아악-! 하늘에서 피어오른 연꽃에서부터 세찬 아지랑이가 몰아쳤다. “헉!” “내공 수발력이 어찌……!” “신녀문주는 검수라고 하지 않았더냐!” 쇄도해오던 살수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저항조차 하지 못할 힘으로 짓눌렀다. 가공할 기교였다. 땅에 짓눌리듯 처박힌 신형이 족히 수십에 달했다. 콱! 그 와중에도 세차게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지붕을 한 번에 서너 개씩 넘나드는 보법을 지닌 이들이었다. 살수 중에서도 정예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서연을 철저히 배제하고 제자들의 안위를 노렸다. 천하에서 보기 드문 악적들일 것이 분명했다. 망설이지 않고 잔향을 발검했다. 이런 잡놈들을 몸 성히 살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팽무성에게 분근착골이라도 배워 둘 것을 그랬다. 뼈마디만을 잘게 부숴 극한의 고통을 준다던가. ‘아니지.’ 열반을 깨달은 육체라 했다. 직접 보고 배우지 않아도 능히 깨달을 만하다고 여겼다. 지면에 처박힌 채로 끙끙대는 사내에게 시험해보았다. 서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뻗어 사내의 머리 위에 올려두었다. 곧장 진기를 퍼뜨려 사내의 근맥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사내는 전류에 감전된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다 어느 순간 고개를 떨궜다. ‘몇 번 더 해보면 알겠다.’ 일순 살수들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비도를 꺼내 천향루를 향해 던지는 놈들을 보고 매우 큰 분노를 느꼈다. 결심을 내린 서연이 천천히 입술을 똈다. “네놈들은.” 찰나였다. 잔향이 세차게 움직이며 허공에 무수한 실선을 그려냈다. 살수들의 신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투두둑―! 동시에 살수들이 들고 있던 병장기와 그를 붙잡고 있던 팔이 종잇장처럼 잘려나갔다. “뜻대로 죽지도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