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자헌은 혈맥을 따라 흐르는 무량한 내공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차가운 칼날과 같던 사천당문의 가주가 이토록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대체 어찌하여 공청석유를 자신이 흡수하게 되었는가. 당자헌은 서연의 육신을 살피던 기억을 떠올렸다. 진실로 경이로운 육체였다. 그렇기에 전설 속에서나 전해 내려오는 천무지체라 착각했다. 허나 공청석유의 기운이 자신에게로 흘러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천무지체는 아니었다. ‘……무극지체(無極之體)? 정녕 실존했던가?’ 열반의 묘리를 몇 번이고 깨달은 몸이라는 뜻이다. 선천적으로 내공이 마르지 않는 체질이라 했다. 운기로 얻는 내공양이 막대하여, 하단전과 중단전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전신을 단전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공청석유가 듣지 않았던 것도 설명할 수 있었다.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단전이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러한 것들이 당자헌의 추측에 확신을 실어주었다. 터무니없이 들릴 수도 있었으나, 결국 언젠가 존재했으니 전설로나마 남았을 것 아닌가. 설마 서연이 자신보다 고수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절세고수는 굳이 영약을 취할 필요가 없다. 자연을 단전으로 사용하기에, 영약을 먹어도 내다 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절세고수가 귀한 공청석유를 상대로 그런 의미없는 짓을 하겠는가. 애초에 서연이 절세고수였다면, 공청석유를 그대로 들고 가 제자에게 가져다 먹였을 것이다. 그러니 제 체질을 여태 몰랐다는 쪽이 훨씬 설득력 있었다. ‘딸아이가 혹할 만도 하구나.’ 능히 새로운 지평을 열만한 신체였으니 말이다. 서연이 자연지기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직접 보았거나, 하다못해 무학을 주제로 이야기라도 나누었다면 당자헌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여러 상황이 겹친 탓도 있었다. 쥘부채의 영향으로 일대의 자연지기가 마구 뒤섞였고, 서연의 육신 자체도 다른 절세고수들과 판이했다. 그렇기에 당자헌은 서연이 무극지체라 착각할 수 밖에 없었다. 서연 또한 긴장한 얼굴로 당자헌을 응시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당자헌이 입을 열었다. “은공은 무극지체 같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청석유를 내다 버린 듯 하여 좌불안석이었는데,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와 당황했다. “호흡 자체가 운기로 화한 체질이오. 확인해보니 임독양맥도 타통되어 있고, 기경팔맥과 십이정경에 정순한 기운이 가득 차 있더이다. 여태 살아오며 내공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을 것이오. 앞으로도 그러하겠지.” “그럼…….” “은공에게는 영약이 필요치 않소. 실로 괴력난신과 같은 자질이오.” “괴력난신…….” 서연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자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로 그러하오. 앞으로 삼십 년이면 능히 절세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오. 팔대세가는 말할 것도 없고, 구파일방 또한 은공의 자질을 깨닫게 되는 순간 어떻게든 모시려 할 것이오.” 서연은 가만히 입을 닫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면 몰라도, 사천당문의 가주가 거짓을 지어낼 이유가 없었다. 육체에 대한 공부로는 신의와 견줄 만하다 했다. 당가주가 자신을 무극지체라 한다면, 무극지체가 맞을 터. 어쩐지 밤길이 훤히 보이고, 격렬하게 움직여도 육체가 쑤시지 않으며, 하단전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내공을 거침없이 사용할 수 있더라니. 그런 내막이 있었던 모양이다. ‘삼십 년 뒤에 절세고수라.’ 드넓은 강호무림의 절대자 중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갑자기 너무 일이 커진 것 같았다. 서연은 절세고수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제 제자를 가르치며 강호를 유람하다 조각이나 하는 지금의 삶이 좋았다. 무공 또한 여행 도중 생길지 모를 문제로부터 제자를 지키고자 익혔던 것이다. 물론 고수가 된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한가로운 생활은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당자헌이 삼십 년이라 단언한 것은,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해 단련했을 때의 일일 터. 지금처럼 여유롭게 강호를 유람하며 다니면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은 자명했다. 그뿐이랴. 무극지체라 했다. 구음절맥이나 구양절맥보다 귀한 체질인 것은 분명했다. 당자헌이 좋게 말해주기는 했으나, 정파에서 모셔간다는 뜻은 다른 말로 사파나 마교에서 잡아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겉보기로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자헌 또한 인체의 도해를 꿰뚫고 있는 사천당문의 가주라는 특수성 때문에 알아챌 수 있었으리라. 평정을 되찾은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숨길 방법이 있겠습니까?” “은공에게 직접 진기를 흘려넣지 않는 한,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오. 소림의 방장이 천안통을 깨쳤다 하니 그는 예외로 두어야겠으나, 그만한 안법을 깨친 자는 중원 무림을 통틀어서 셋이 넘지 않소.” 서연은 내심 안도했다. 그 말은 즉슨 웬만해서는 정체가 탄로 날 일이 없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강적을 만난다면 쥘부채가 알아서 경고해줄 터이니, 위험에 처할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은공의 체질로 인해 본의 아니게 공청석유의 기운을 흡수하게 되었소. 그러니 두 가지를 더 고르시오.” 왜 갑자기 두 개로 늘어난단 말인가? 그러한 기색을 느꼈는지, 당자헌이 말했다. “공청석유를 은공이 사용하지 못했으니 하나, 또 영약으로는 성취를 얻기 힘든 경지에 도달했던 본 가주가 은공의 체질 덕분에 적잖은 성취를 얻었으니 둘이오.” 본래 당자헌 정도 되는 고수라면 공청석유 정도 되는 영약으로도 내공을 얻기 힘들었다. 사용하지 않고 가문의 보고에 보관해두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허나 서연 덕에 웬만한 깨달음 이상으로 내공을 얻었다. 서연은 얼떨떨한 얼굴로 보고를 돌아보았다. 더 고를게 남았나?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제자가 쓸 물건까지 얻어가면 좋을 것 같았다. ***** 대명은 더없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이십 년 동안 풍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 풍년은 올해로 끝을 맺었다. 사천, 안휘, 하남과 같은 평야지대의 작황이 예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뿐이랴, 장강 이남은 가히 흉년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정복전쟁까지 겹쳤다. 국사를 돌보는 자금성 태화전(太和殿)의 분위기가 무거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명나라 황태자 주영륜(朱英倫)은 전장으로 떠난 황제 대신 정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본래 황태자에게 정무를 맡기는 것은 자칫 황권을 흔들 만한 중대한 사안이었으나, 황제 본인이 아랑곳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오히려 대리청정을 장려했다. 고작 정무를 맡는 것으로 제 황위를 흔들 수 없다고 신하들 앞에서 확언하고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국경으로 떠났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본디 황제는 존귀한 존재인 바, 황태자인 자신이 가는 것이 옳았다. 허나 부친은 이를 원치 않았다. 명군이기 전에 패왕이었다. “국경의 정벌군에게 군량을 보급하는 일이 지연되고 있사옵니다. 귀주와 광서, 광동 지방에서 특히 어려움이 깊다고 하옵니다.” 전부 장강 이남이다. 사마련, 스스로를 팔천(八天)이라 자칭하는 무도한 세력이 기다렸다는 듯 약탈을 감행하고 있었다. 부친이 국경으로 떠난 탓이다. 온 중원에 황제가 미치던 영향력이 지대했다. 황태자의 손끝이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대리청정 자체를 부담으로 여기는 여타 황족들과 다르게, 그의 표정은 여유롭기 그지 없었다. 그의 나이가 불혹에 가까웠다. 간언과 아첨을 능히 구분할 줄 알았다. “섬월대(閃月隊)를 보내라.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와 연계할 권한을 줄테니, 막는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섬멸하도록.” 한 성의 군사를 통할(統轄)하는 사령관이다. 거기에 천명검까지 파견한다면 군량 보급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으리라. “점창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오. 마땅히 지원을 보내야 할 것으로 사료되오.” “곤륜과 공동파 또한 마찬가지요.” “마교가 큰 분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수십 년이오. 오히려 장강 이남의 사마련이 큰 문제올시다. 그 쪽에 집중하는 것이 맞소!” “동의하오. 마교가 수작을 부릴 생각이었다면 진작 나섰을 것이오.” “사교의 종자들이 잠잠한 것이 더욱 수상하올시다. 이럴 때일수록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하오!” “그만.” 황태자가 말했다. “사마외도의 간자들만 있는 줄 알겠다. 덕분에 정무의 본질이 흐려졌다. 더 듣고 싶지 않으니 대신들은 이만 물러가라.” 고오오. 동시에 황태자의 주변에서 패도적인 기파가 흘러나왔다. “허어억……!” “흡…….”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에 대신들이 침음성을 토해냈다. 말로만 무림을 징치하겠다고 할 사내가 아니었다. 황태자는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익혔다. 신하들은 다급히 물러갔다. 황태자는 그런 대신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부친의 눈치를 보던 작자들이 안하무인하게 구는 꼴이 우습다. 저러는 이유 또한 안다. 부친이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허나 호부 밑에 견자 나겠는가. 주영륜 또한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다탁에 놓인 두루마리들로 향했다. ‘낙양 부윤’, ‘전 지휘사 월중천’. 두루마리를 작성한 자들의 이름이었다. 황상에게 고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허나 황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루마리를 완전히 풀었다. 황상께 전권을 위임받았다. 무엇을 꺼릴까. 낙양의 소식은 진작에 귀에 닿았었다. 동창의 손이 중원 전역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뭣 모르는 민초들이 선녀가 나타났다고 읊어대었다고 했던가. 그것을 생각하면 낙양 부윤의 보고는 한참 늦었다고 할 수 있다. 두루마리만 보냈다면 진작에 보고가 닿았을 것이다. 허나 낙양 부윤은 서책 한 권을 동봉했다. 그것이 귀물이라도 되는 양, 무수한 병사들로 호위하며 보낸 탓에 보고가 늦었다. 황태자의 시선이 비연천공이라는 글귀를 스쳤다. 서체가 아주 유려한 것이, 여인이 적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명필이었다. 흥미가 돋은 황태자는 한 손으로 서책의 첫 장을 펼쳐 들었다. 황제의 아들로서 부친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신공절학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충분했다. “심공이구나.” 황태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비급의 첫 장부터 드러난 기개가 심히 광오하게 느껴졌다. “드넓은 중원을 자유로이 거닐겠다고.” 흥미가 돋아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심성이 글귀에서부터 느껴져, 엷은 미소를 오랫동안 머금었다. 허억― 곁에 시립해 있던 환관들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냉랭한 표정을 짓는 것이 일상이었던 황태자가 웃는 모습을 실로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이었다. 황태자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환관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들린 비연천공에 집중하며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능히 절세를 논할만한 심법이다. 대종사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미완성본이기는 하나, 이토록 귀한 보물을 황실에 기꺼이 진상한 마음씨가 기꺼웠다. 낙양 부윤이 말하기를, 저자는 운남으로 향하는 중이라 했다. 조각에 심취하여, 옛 대리국(大理國)이 있던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는 것이다. 황태자의 입매가 묘하게 비틀렸다. 정파의 절세고수 중, 부친과 연이 없는 자가 없었다. 천명검단주? 자신의 수하였으나, 동시에 황상의 친우였다. 애초에 천명검이라는 막강한 집단을 자신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부친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대가 얼굴 밖으로 드러났다. 그 때문인지 황태자의 입꼬리가 아주 작게 더 위로 올라갔다. “자유를 원한다니, 그리 해야겠지.” 원하는 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절세고수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부친보다, 자신의 손이 먼저 닿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곧 황태자의 손 끝에서 거대한 불꽃이 일어났다. 낙양 부윤이 보냈던 두루마리가 재도 남기지 못하고 타서 없어졌다. 기를 발해 물건을 태우는 삼매진화(三昧眞火)의 묘리였다. “…….” 비연천공도 태워야 할까. 황태자는 잠시 고민했다. 잠시 본 것으로 내용은 전부 새겼다. 괜히 기록을 남겼다간 부친의 눈에 띌 수도 있었다. 허나 그만두었다. 부친의 손이 닿지 않은 첫 절세고수가 보낸 친애의 표식을,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가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황태자가 말했다. 수많은 환관들이 그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