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은 어깨를 으쓱거리는 화련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당소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은공, 부디 하대해주십시오. 편히 소소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늘 나이 지긋한 분들에게 했던 말을 이렇게 되돌려 받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동안은 그것이 당연한 예의라고 여겼으나, 당소소의 말을 듣고 가슴 한편이 불편해지는 것을 보니 마냥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었다. 서연은 짧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여태 살아오며 대놓고 하대를 해본 적이 드물었다. 상대가 적일 때는 경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으니 당연히 하대를 했지만, 평소에는 화련처럼 누가 봐도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경어를 사용했다. 그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허나 당소소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편히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은공,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경어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설마 당문의 무인들이 눈치를 주었을리는 없고, 혹 팽 나으리가 그러셨습니까?” 당소소를 포함한 당문의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팽무성을 향해 홱 돌아갔다. 갑작스레 쏠린 시선에 당황한 팽무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저는 당연히 팽 나으리를 믿습니다만, 은공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팽 나으리, 본가로 초대해 드릴 터이니 잠시만 땅바닥을 보고 계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팽무성은 화를 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천명검이라는 집단의 특성상 명문세가와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반 각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을 처박고 있는 것으로 사천당가 내부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팽무성은 스윽 몸을 돌려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의 개수를 새기 시작했다. 서연은 묘한 부담감을 느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게 뭐라고 이토록 부담이 될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평소에 제자를 부르듯 하면 되지 않겠는가. 순식간에 마음을 다잡은 서연이 말문을 떼었다. “소소야.” “예, 은공.” 생각보다 울림이 나쁘지 않았다. 서연은 하대하는 것도 나름의 멋이 있다고 느꼈다. 당소소의 목숨을 구했다. 사천당가의 혈족들이 모여 사는 요새인 당가타(唐家陀)에 들어가서도 경어를 사용한다면 주변인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천당문으로 안내해줄 수 있겠니?” 서연의 음성이 잔잔하게 울렸다.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당소소가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경어를 들을 때 불편하다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이었다. “암단화는 어찌할 생각이니?” 서연은 채집 절차가 매우 복잡할 것이라 짐작했다. 피독주가 녹아내리는 것을 보아하니, 두꺼운 장갑을 끼고 뽑아도 중독될 것 같았다. 특수한 장치를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서연의 기대와 달리, 당소소는 맨손으로 암단화를 뽑아 올렸다. 주변의 대기가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당소소는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사실 저는 독인이라 괜찮습니다. 만독불침(萬毒不侵)까지는 무리여도, 천독불침(千毒不侵) 정도는 될 듯 싶군요.”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까닥였다. 곧 당문의 무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흑단으로 만들어진 두꺼운 상자를 가져왔다. 당소소는 암단화 뿌리에 묻은 흙을 털어낸 다음, 상자에 넣고 밀봉했다. 놀랍게도 상자는 타들어 가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독인……?” 팽무성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단순히 놀라움으로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저 나이에 독인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천명검 소속의 독룡은 물론이요, 현 당가주보다도 재능이 뛰어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당소소는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조용히 덧붙였다. “팽 나으리도 어찌보면 은인이라 할 수 있으니 알려드리는 겁니다. 다만 이 이야기가 천명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상부에 보고를 올리는 것까지는 괜찮으나, 소문이 퍼지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정도는 상정 범위 내였기에 팽무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리다.” 이내 일행은 동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소소는 암단화가 담긴 상자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였다. “암단화는 본가에서 영약으로 가공한 다음에 은공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암단화보다도, 그 암단화를 온전히 품고 있는 상자에 더 시선이 갔다. 겉에 있는 장식부터 그러했다. 자개처럼 겉면이 화려했는데, 그 화려함 속에 숨겨진 견고함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솜씨라 믿기 힘들었다. 상자가 잠깐 열렸을 때 내부 구조를 확인한 탓이다. 흡사 나무로 만들어진 정교한 기계장치에 가까웠다. 서연의 시선을 느낀 당소소가 답했다. “본가에 머무시는 산정께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직역하면 산의 정령이라는 뜻이다. 서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혹시 산정이 키가 작고, 수염도 수북하시니?” 당소소의 눈이 커졌다. “어찌 아셨습니까? 혹 은공께서는 과거에 산정을 뵈신 적이 있으십니까?” 설마가 사람잡는다더니. 일전에 얼핏 들었던 청목족도 그렇고, 이 세계는 확실히 무협지에서 보았던 평범한 중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쯤 되니 진정 자신이 청목족 혼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생부(生父)의 얼굴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보다 먼저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았다. 서연은 괜히 손으로 귀끝을 매만졌다. 귀는 둥글기만 했다. ***** 일행은 녕강에서 사천당문이 위치한 성도(成都)까지 꼬박 칠 주야를 걸었다. 녕강이 사천과 인접했음에도 그러했다. 대명의 모든 행정구역을 통틀어 가장 넓은 곳이 바로 사천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성들은 기껏해야 한두 개의 대방파가 자리했지만, 사천에는 세 개나 되는 대방파가 존재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사천성은 천부지국(天府之國), 즉 하늘이 곳간을 내려준 땅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곡창 지대였다. 날씨가 덥고 습해 향신료가 잘 자랐고, 자연스레 식문화가 발달했다. 그런 사천성의 제일방파로 군림하는 사천당문이 부유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행은 사천당문의 정문에 도착했다. 끝도없이 펼쳐진 드높은 담장을 일 각이 넘는 시간동안 걷고 난 후였다. 장원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의 수만 따진다면 중원을 통틀어서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라 했다. 사천당문이 세워진 것이 수백년 전의 일이다. 직계는 소수였지만, 방계나 데릴사위, 그리고 당문에서 식솔로 살아가는 자들까지 합치면 그 수가 물경 수천에 달했다. 팽무성이 혀를 내두르며 장원 내부를 살폈다. “작은 도시라고 해도 믿겠군.” 아직 내성으로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그러했다. 대부분의 식솔들은 외성에 거주했다. 그들은 당소소를 마주할때마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두려움이 아니라 진실로 존경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사천당문이 식솔들을 어찌 대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소소 아가씨, 대체 어딜 다녀 오셨기에 열흘이나 걸리셨어요?” “비밀입니다.” “또 이러신다. 저녁에는 수자육편(水煮肉片)이면 될까요?” “매콤하게.” “네, 매콤하게 해드릴게요.” 당소소는 익숙한 듯 식솔들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특이한 점은 당소소가 상대의 나이를 불문하고 경어를 썼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화련을 대할때도 그랬다. 예의가 바른 것일까, 아니면 성격이 유별난 것일까. 서연은 둘 다일 것이라 짐작했다. 내성으로 향하는 정문은 실로 웅장했다. 소림과 종남파의 산문을 합쳐도 이보다는 작으리라 생각될 정도였다. 이윽고 내성 입구를 지키던 고수들이 당소소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이분은 저를 구해 주신 은공이십니다. 극진히 모시도록 하십시오.” 척! 당가의 고수들은 반문하지 않았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서연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이건 이번에 캔 암단화입니다. 영약으로 가공하여 은공에게 드려야 하니, 독심방(毒心房)으로 가져가십시오.” “예.” "죄인들도 곧장 뇌옥에 집어넣으십시오." "예." “그리고, 가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가주께서는 현재 패검대주와 독대하고 계십니다.” “패검대주……?” 당소소의 시선이 순간 팽무성에게로 향했다. 성도로 향하는 길에 팽무성이 틈틈이 은비조를 사용하여 패검대와 소통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패검대가 사천 땅에 발을 들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보다 먼저 도달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는 팽무성 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마 패검대주께서 홀로 방문하셨을 것이오.” 패검대의 경신술이 느린 것은 사실이나, 패검대주만은 예외였다. 그는 패검대에 들어오기 전부터 별개의 경신법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소소는 서연에게 물었다. “은공, 어찌하시겠습니까? 본래 은공을 가주님께 당당히 소개하려 했는데, 웬 나으리가 다 망쳤습니다. 은공께서 원하신다면 직계의 권한으로 가주전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패검대주가 중요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당가주께는 패검대주보다 제가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말 한마디만 하면 가주전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당소소가 은공으로 모시는 것도 충분히 부담스러웠다. 그뿐이랴. 외성을 오가는 도중에 자신에게 공손히 구는 당가의 식솔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당가주까지 추가된다면 그 부담감이 얼마나 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서연은 얼핏 튀어나오려는 경어를 가까스로 삼키고 말했다. “나중에 천천히 뵈어도 괜찮단다.” “……그렇습니까?” 당소소는 씰룩거리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팽 나으리는 은공께 감사하십시오. 은공이 아니었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독인인 제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릅니다.” “서 소저, 고맙소.” 팽무성은 순순히 사과했다. 사천당문 내부에서 직계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해, 그의 잘못이 없다고만 볼 수도 없었다. 자신이 은비조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패검대주가 이곳에 올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당소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일단 가주님께 이 일을 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 따로 전달한 말은 더 없으실까요?” “패검대주가 떠나면 바로 은공을 모시고 가겠다는 말도 전해주십시오.” “그리 하겠습니다.” 일행은 당소소의 안내를 받고 곧장 영빈당(迎賓堂)으로 향했다. 귀빈을 맞이하는 장소라고 했다.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는데, 특이하게도 웬 남아가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당소소와 똑 닮게 생겼다. 쌍둥이라는 뜻이다. “오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님의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소년은 서연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당소소를 누님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나중에 태어난 쪽인 듯했다. “당진성(唐辰星)이라 합니다. 가주께서 용무를 처리하시는 중이라, 급히 소가주인 제가 대신 모시게 되었습니다.” 명문가에서 자란 탓인지, 품고 있는 기세가 매서웠다. 당소소가 독공 위주로 수련했다면, 당진성은 암기술 위주로 수련한 것 같았다. “혹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서연은 잠시 고민했다. 아직 밥을 먹을 때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당문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가는 또 온갖 식솔들의 인사를 받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암단화를 담았던 상자가 떠올랐다. “당문에 산정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을 뵐 수 있을까요?” 당진성은 즉답하지 않았다. 산정이 계시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묻지도 않았고, 가서 무엇을 하실 것인지 묻지도 않았다. 대신 당소소를 한 번 쳐다보았다. ―누님. ―아우님, 은공을 앞에 두고 전음을 보내는 건 대체 어느 가문의 예의입니까? 당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본새를 보아하니 누님이 맞았다. 고로 마교의 주구(走狗)가 누님을 살해한 다음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누님 행세를 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물론 아직 몇 가지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기는 했다. 마교의 주구가 누님에게 섭혼술을 걸어 부리고 있을 가능성, 혈교가 혈고를 심어 조종하고 있을 가능성, 천명검이 기어이 누님에게까지 마수를 뻗쳤을 가능성……. 이 외에도 대략 육십하고도 다섯가지 가능성이 더 존재했다. 뭘 모르는 누님은 이를 꼴깞이라 치부했지만, 당진성은 이러한 걱정들을 제가 마땅히 할 일이라 여겼다. 사천은 사마외도의 영역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땅이다. 소가주인 자신이 어찌 안일하게 굴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항상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그렇기에 당진성은 품 속에 항상 두 자루의 비도와, 아흔 여덟 자루의 비침을 품고 다녔다. 두 자루의 비도는 각각 아버지와 누님이 조종당했을 때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나머지 아흔 여덟자루의 비침도 나름의 사용처가 있었다. 천하의 모든 당씨 중에 자신이 가장 비장한 각오를 품고 있지 않을까. 적어도 당진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본래라면 칠십 단계가 넘는 검증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아직까지는 누님의 목숨을 구한 은공인 서연을 그리 대할 수는 없었다. 일단계를 통과했으니 마땅히 안내해드려야 했다. 당진성은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따라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