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에서 낙양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작정하고 준마를 채찍질하면 두 시진 안에 닿을 수 있었고, 설령 도보로 길을 나선다 해도 넉넉히 사흘이면 충분히 다다를 만했다. 서연은 이왕 떠나게 된 길, 모처럼의 유람을 만끽할 작정이었다. 낙양으로 향하는 유람선에 오르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창 출항 준비에 여념이 없는지, 선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화물을 싣는 운송선과는 그 목적부터 달랐다. 돈 많고 유람을 즐기는 젊은 객들이 선호하는 배답게, 악공들의 흥겨운 가락과 진미로운 음식 냄새가 승선하기도 전부터 코끝을 간지럽혔다. “인당 팔백 냥 되시겠습니다.” 섬뜩하리만치 비싼 가격에 곁에 있던 화련이 눈을 껌뻑였다. 너무 비싸요. 화련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허나 서연은 아랑곳 않고 선뜻 돈을 지불했다. 남궁세가에서 받았던 금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았던 터였다. 이번 기회에 어엿한 어른으로서 한껏 멋을 부리고 싶은 마음 또한 없지 않았다. 배 위에 올라타자 한켠에 두런두런 앉아 있는 젊은 남녀들이 보였다. 안휘성에서 만났던 남궁 남매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하나같이 잘 사는 집안의 자제들인지, 등 뒤로는 호위 무사들을 하나둘씩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연과 화련을 보고는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왜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서연이 의아해할 무렵, 술잔을 든 한 귀공자가 불쑥 다가왔다. “소저께서는 혹시 뱃값을 얼마나 내셨습니까? 설마 진정 팔백 냥씩이나 내신 것은 아니겠지요?” 추파를 던질 줄 알았건만. 뜬금없는 질문에 서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귀공자는 난감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사실 저희가 오늘 종일 배를 대여하여, 친구들끼리 장난삼아 뱃삯을 팔백 냥까지 올리면 어찌 될지 내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손님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저는 아무도 오지 않을 쪽에 걸었습니다.” 어쩐지 배에 손님이 그리 없더라니,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면 내려야 하나요?” “아닙니다. 내기에서 진 사람이 손님을 대접하고, 돈도 되돌려주기로 했습니다. 여섯 중에 저만 오지 않는다는 쪽에 걸었으니, 제가 대접해야지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금룡상단의 삼남, 금진송이라 합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부잣집에서 나고 자라 이 정도는 큰 부담이 아닙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으니, 소저께서 거절하시면 제 입장이 난감해집니다. 부디 친우들 사이에서 면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금룡상단!”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화련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러다가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는데, 어린 아이라 그런지 누구도 타박하지 않았다. “혹시 동생분이십니까?” “제가 가르치는 아이에요.” “혹시 무얼 가르치십니까? 아, 이 이야기는 저쪽으로 가셔서 마저 나누시겠습니까? 흥미로운 이야기는 여럿이 들어야지요. 이건 이야기값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금진송은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전낭을 꺼내 건넸다. 겉보기에도 팔백 냥보다는 많이 들어 있었다. 서연이 거절하려는데, 금진송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성큼성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서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상단의 자제라더니, 분위기를 주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이렇게 되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가 않으니, 사람을 다루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서연이 다가가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내기에서 진 금진송을 놀리는 것이다. 금진송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빈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방금 말씀은 그리 했지만, 부담스러우시다면 적당히 어울려주시다가 언제든 돌아가셔도 됩니다.” 원형 탁자라 어딜 앉아도 옆 사람과 맞닿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서연이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아, 화련도 옆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영애가 고개를 까닥였다. “운(雲) 가의 초아에요. 그쪽은요?” “서연이라고 합니다.” “가문은요?” 서연이 고개를 가로젓자, 운초아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좁혀졌다. 수백 냥이 넘는 거액을 선뜻 낸 사람이 평범한 민초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탓이다. “그러면 어느 문파 출신이신가요? 화산? 아니면 종남?” “딱히 소속된 문파는 없어요.” “…….” 모든 이들이 숨죽인 가운데, 금진송이 다급히 나섰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강호에 어디 본 신분을 숨기고 다니는 사람이 한둘이겠습니까? 운 소저도 그만 하십시오.” “…….” “이러지들 말고 들어보십시오. 제가 방금 서연 소저께 물으니, 제자를 가르친다고 하더이다. 무얼 가르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금진송은 그렇게 말하며 서연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강호 무림에 여인이 홀로, 그것도 어린 여제자를 데리고 다닌다. 그뿐이랴, 허리춤엔 보란 듯이 검도 패용했다. ‘분명 뛰어난 검수일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자칫했다간 초대한 손님을 공개석상에서 망신 줄 불한당이 될 판이었다. 허나 서연의 입에서 튀어나온 문장은 그런 금진송의 기대를 배반했다. “조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각?” “낙양에서 각예대회가 열린다기에, 견문이나 쌓을 겸 가는 중이었습니다.” 운초아의 입매는 어느새 삐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눈매에도 어느새 오만함이 잔뜩 피어올랐다. 다른 자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은연중에 서연을 무시하는 듯한 기운을 풍겼다. 태생이 그러했다. 각자 지역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자란 탓이리라. 금진송만 어쩔 줄 몰라했다. 홀로 상가(商家) 출신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그냥 타고난 성품이 그런 것이다. 운초아가 비웃음을 애써 숨긴 어조로 쏘아붙였다. “원래 그리 얼굴을 가리고 다니시나요?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불편해 보여서요.” 시선이 노골적이다.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 얼굴에 훤했다. 서연도 그러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그냥 일어서면 그만이었지만, 금진송이 너무 죄송하다는 듯 쳐다보아 그러지도 못했다. 화련이 너무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던 탓도 있었다. 봉황탕, 벽옥두부……죄다 들어보지도 못한 휘황찬란한 요리들이었다. 이번 기회에 원없이 먹이고 싶다는 마음 또한 있었다. ‘하긴, 이런 사람도 있어야지.’ 어디 정파라 하여 선인만 있겠는가. 오히려 여태 운이 너무 좋았던 것이다. 서연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반응하자, 운초아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왔다. “아니면 용모가 추해서 숨기는 걸까요?” “운 소저, 그만 하시오. 지금 선을 넘었소.” 금진송의 제지에도 운초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금진송을 제외한 다른 자제들이 무언으로 호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금진송을 제외하면 모두 무가의 자제였다. 은연 중에 상가 출신인 금진송을 무시하고 있었기에 이런 반응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개 조각가가 그만한 거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이상해요.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벌었을지도 궁금하네요.” 금진송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제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놀림거리로 삼으려고 데려온 것이 아니다. 비록 내기에 져서 만났지만, 진심으로 대접할 생각이었다. 허나 친우라 소개한 작자들이 제 손님에게 물을 먹이니, 얼굴에 절로 열이 올랐다. 그는 세찬 시선으로 운초아를 노려보다가 서연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서 소저. 날을 잘못 잡은 듯 합니다. 나중에 각예대회에서 뵙게 되면 제가 제대로 대접할테니, 지금은 장소를 옮기는 게 좋을 듯합니다.” 허나 운초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서연을 일으켜 세우려는 금진송을 보란 듯이 막아세웠다. “근래 하남에 사마외도가 많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혹 얼굴을 가리는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르죠.” “나도 운 소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얼굴을 봐야겠어요.” 침묵하던 자제들의 입도 트였다. 사방에서 서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호위들에게 은밀히 시선을 보내 포위토록 하는 이도 있었다. 장난이 선을 넘었다. 아니, 어느순간부터 장난이 아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금진송의 생각대로였다. 자제들은 하나같이 서연이 사마외도면 목을 베어 명성을 드높이고, 아니라면 일개 민초일 터이니 함구토록 할 생각이었다. “적당히들 하시오!” “저는 오히려 금 공자가 그리 나오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얼굴 좀 보겠다는게 그리도 큰 죄인가요?” 호위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서연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검집에 손을 올린 이도 적지 않았다. 여차하면 출수하겠다는 것이다. ‘이젠 안 되겠다.’ 서연은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혼자였다면 모를까, 화련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여드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죽립에 손을 올렸다.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이유는 간단하다. 괜한 일에 연루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허나 오히려 얼굴을 가리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길 판이니, 드러내는 것이 옳았다. 운초아가 냉소를 감추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우둔하진 않으니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이겼다는 얼굴로 서연을 응시했다. 운초아는 일개 민초에 불과한 서연이 자신들과 감히 한자리에 합석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마외도가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서 반드시 망신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각가 따위가 검을 차고 다니긴.’ 꼴에 무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도 거슬렸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교육하고,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이 아니었다. 무릎꿇린 다음, 감히 얼굴을 올려다보지도 못하도록 격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운초아의 시종들처럼 말이다. 그때였다. 스윽. 서연이 죽립을 내리기 무섭게, 도화와도 같은 머릿결이 윤기로 이지러졌다. “뭣!” “어떻게 저런 색깔이…….” 비단보다 우아한 머리색에 감탄한 몇몇 자제들은 상황도 잊은 채 입을 떡 벌렸다. 근엄한 얼굴로 서 있던 호위들마저도 눈을 부릅뜨고 서연을 쳐다봤다. 당황한 것은 운초아도 마찬가지였다. 면사를 벗지도 않았는데 이미 빼어난 외양이 저절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발악하듯 외쳤다. “며, 면사도 벗어!” 표면적으로나마 유지하던 경어조차 잊은 채였다. 모두의 시선이 서연의 섬섬옥수와 같은 손으로 향했다. 면사가 차차 내려오며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가 겉으로 드러났다. 가늘게 휘어져 길게 뻗은 눈꼬리에는 벽녘의 연꽃과도 같은 눈동자가 자리해 있었다. 천하일색(天下出色)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외모였다. 한 사내가 혼을 빼앗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국지색(傾城之色)이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서연은 입을 작게 열고 긴 날숨을 내뱉었다. 탐스러운 벚꽃잎처럼 붉고 보드라운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사내들이 탄식을 토해냈다. 서연이 물었다. “이제 충분한가요?” “조, 조금만 더.” 서연은 말이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던 사내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 금진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