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나는 눈을 떴다. ​ “아….” ​ 목은… 쉬어있었다. 말도 잘 안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바람 빠지는 소리만 새어 나온다. ​ 기억을 잃고 낯선 곳에서 눈을 뜨는 게 벌써 이번이 두 번째. ​ 그러나 다행히도 이번에는 붉은색 비단이 가득한 침대가 보이는 방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딱딱한 천장과 코를 찌르는 특유의 냄새. ​ 이곳이 어딘지는 알 것 같았다. 병원이었다. ​ 팔을 들었다. 링거가 꽂혀 있다. ​ 나는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 마지막 기억은… 번개와… 자화연…? 그래, 자화연이 있었는데…. ​ 그 이후의 일은 다시 기억에 없다. ​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몸이 아프지는 않은데 머리가 많이 아프다. ​ “으….” ​ “아, 깨어나셨군요.” ​ 바로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의사인 듯했다. ​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 그는 하드보드를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 “머리가 아프고… 계속 어지럽네요.” ​ “정신계 헌터의 어빌리티에 당하셨습니다. 액체 형태로 음료에 타서 섭취하신 것 같더군요.” ​ “… 네. 그런 것 같네요.” ​ 백시은이 내게 먹인 커피에는, 그녀의 어빌리티가 담긴 액체가 들어 있었다. 무슨 효과를 유발하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 의사는 내 차트를 넘겨보며 혀를 찼다. ​ “해독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환자분께서도 정신 계열 저항이 꽤 높으신 편이라 이 정도로 끝난 겁니다. 보통의 일반인이었다면 폭발하는 욕구를… 해소하지 못해 폐인이 되었을 수도….” ​ 아찔한 이야기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다만, 후유증이 조금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 의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 “환자분께서 섭취하신 약물은, 단순히 정신 조종 계열이 아니었습니다. 대상의 본능을 증폭시키는 일종의… 최음제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해독을 통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부분은 모두 제거했습니다만….” ​ 의사는 조심스럽게 결론을 말했다. ​ “아주 작게, 약효의 일부가 신체에 남아… 의지와는 관계없이 갑작스럽게 충동이 일거나 혹은 신체의 특정 부위가 멋대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는 했다. ​ 그래,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난 게 어디겠는가. ​ 의사는 그렇게 몇 가지의 주의 사항을 전해주고 다시 나갔다. ​ 아마 퇴원까지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다고 한다. 다행이다. 일정이 바빠서 누워있을 시간이 없었다. ​ 병실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텅 빈 눈으로 병원의 천장을 응시했다. ​ 그리고 내가 겪은 일들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 백시은. ​ 왜? ​ 대체 왜. ​ 내가 알던 그녀는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늘 해맑게 웃고 누구에게나 친절했었다. ​ 그런 그녀가 어쩌자고 이런 끔찍한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다. ​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 결론적으로 그 당시 상담소에서 했던 이야기의 대상은 나였고. ​ ‘그래서, 그냥 집에 가둬버릴까, 생각도 했어.’ ​ 내게 꺼낸 속 이야기조차, 정말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길드를 나가고 우리의 사이가 멀어질 것을 우려해, 이 모든 범행을 계획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 심지어, 우발적인 범행도 아니었다. 내게 계획을 예고한 계획범죄에 가까웠다. ​ 만약 진세아가 나를 찾지 못했다면…. ​ 나는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었을까. ​ 그녀의 붉은 새장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 내가 얼마나 멍청했던가. 나는 상담사다. ​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갖췄다. ​ 그러나 나는 그 능력에 가급적 의존하지 않으려 했다. 필요할 때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내면을 확인하지 않았다. ​ 만약 그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기 전에 한 번이라도 그녀의 내면을 확인했더라면….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나는 내 자신감과 오만함에 대해 반성했다. [(。•́︿•̀。)] [이 모든 것은 본 시스템의 불찰입니다.] 그때, 내 눈앞에 나를 위로하는 듯 메세지가 떠올랐다. ​ 나는 그 뜬금없는 사과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네가 뭘.” ​ [본 시스템의 자율적 판단 기능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 (☍д⁰) ] ​ [따라서, 기능적 업데이트를 긴급히 실행하겠습니다.] ​ 나는 그 문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업데이트? ​ 대체 뭘 하겠다는…. ​ [업데이트 중… _〆(。。) ] ​ 내 시야를 가득 채웠던 반투명의 시스템 창이 노이즈와 함께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낡은 TV의 화면이 꺼지기 직전처럼. [기존 알고리즘 폐기….] [신규 프로토콜 세이프가드(Safeguard) 적용….] [위험 요소 감지 범위 확장….] [사용자 설득을 위한 신규 인터페이스 적용….] [적합 답변 선택지와 예상 결과에 대한 자체적 예측 알고리즘 개방….] ​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 [업데이트 완료.] ​ [완료되었습니다!] [(ஐ╹◡╹)ノ] ​ 나는 다시 해맑아진 이모티콘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 “뭐가 달라진 건데.” ​ 지금으로서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사실 문제 상황에 대한 기능이 업데이트된 것이라면, 문제 상황이 아닌 지금 모르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 “…… 모르는 게 나은 건가?” ​ 기능을 알게 됐다는 건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리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때. ​ - 벌컥. ​ 병실의 문이 열렸다. ​ 나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진세아가 서 있었다. ​ 회색빛의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 그러나 늘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와 달리,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선우야….” ​ 진세아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 그녀는 문을 닫고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침대 옆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고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 “괜찮아…?” ​ “응. 누구 덕분에.” ​ 나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세아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 내 대답에 진세아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 “다행이다…… 정말로….” ​ 그리고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 나는 그런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들기며, 다독여줬다. ​ 오랫동안. ​ ​ ​ ​ ​ ​ *** ​ ​ ​ ​ ​ ​ ​ 루나와 엘리스는 선생님이 납치당했다고 생각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 현장에 도착했지만, 눈에 보이는 건 흔적도 없이 타버린 집 한 채와…. 엄청난 크기의 싱크홀. ​ 그러나, 현장에 있는 헌터에게 선생님은 현재 구출되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 너무나도 다행인 소식이었다. 따라서 그녀들은 지금 바로 협회 지정 병원으로 향했다. ​ 왜 가냐고? ​ … 내담자니까? ​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리고 뉴스에서는 선생님이 의식을 찾았다고 했다. ​ 혹시나 면회도 가능할지 모른다. 안되더라도 멀쩡한 얼굴이라도 보면 좋을 것 같았다. ​ 친분이라면… 친분이랄게 있기는… 하니까. ​ 그러나 루나와 엘리스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 “루나….” “엘리스여.” ​ “유선우 환자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 이곳은 협회가 지정한 병원. 환자와 관련이 없는 자는 한 걸음도 들여보내 주지 않는 장소였다. ​ 두 사람은 안내 데스크원의 질문 앞에서 얼어붙었다. ​ 유선우와 딱히 무슨 관계라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녀들은 쉬이 입장할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루나와 엘리스는 내담자. 오히려 유선우가 관리하고 책임져야 할 대상에 가까웠으니까. ​ “아… 그… 그게에….” ​ 무슨 관계지? 선생님? 동료? 친구? ​ 대답을 망설이자 데스크의 직원은 그녀들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 또한 이번 납치 사건의 범인이 유명 여성 헌터였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참이었다. ​ 따라서 그녀들 또한 극단적으로 말하면 예비 범죄자일 수도 있었다. 직원은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 “지인이 아니라면 면회는 불가능합니다. 돌아가 주세요.” ​ 결국 두 마리의 토끼는 문 앞에 두고 좌절하고 말았다. ​ 그녀들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 그러나 그때. 그들의 등 뒤 안내 데스크로 다른 한 명의 여인이 다가왔다. ​ “유선우 환자님을 뵈러 왔습니다.” ​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루나와 엘리스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 그곳에는 현대적인 병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옥색 비단 장포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사근사근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했다. ​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 “이서령이라 합니다.” ​ “유선우 환자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 “제 딸아이의 보호자 되시는 분입니다.” ​ “네…? 딸아이의 보호자면… 그러니까….” ​ 직원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의 흐름에 따라 고개를 갸웃했다. 딸아이의 보호자. ​ 그렇다면 환자는 이 여인의 남편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 이서령은 그런 직원의 혼란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 “환자분께 직접 확인하셔도 괜찮습니다. 혹시 안에서 잠시 기다려도 괜찮을까요?” ​ “아… 네! 네네. 물론입니다.” ​ 원래 규정상 환자의 가족임이 확인되면 면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증명서 같은 것보다 환자의 직접적인 확인이 더 편했으니까. ​ 이서령은 그렇게 보호자 대기실로 움직였다. ​ “…….” ​ 루나와 엘리스는 유유히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딸아이. ​ 보호자. ​ “…….” ​ 그 두 단어가 두 자매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