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일 새벽. 백시은의 집. 그리고… 그 집의 지하실. ​ “그니까… 그 팀장은 약 먹고 완전 꼭두각시란 거잖아? 그러면 충분히 가능하지.” ​ 그곳에는 헤스티아 출신의 헌터들이 시뻘건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몸을 묻고 있었다. 전부 알파, 즉 여성이었다. ​ “포탈만 열어주면 된다는 거 아니야?” ​ 공간 이동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헌터, 리아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 “응. 상담실 안으로, 아주 잠깐만.” ​ 백시은은 소파에 기댄 채, 자물쇠의 고리를 손에 끼워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이후에는?” ​ 옆에 앉아있던 김가은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다른 동료인 카라에게서 먼저 나왔다. ​ “걱정할 거 없어. 베타들이 원래 처음에는 좀 튕기잖니?” ​ 카라는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노골적인 미소를 지었다. ​ “시은이가 만든 약으로 절여서 며칠 밤낮으로 이것저것 가르치다 보면 뭐… 금방 그쪽이 먼저 헥헥거릴 것 같은데.” “나중에는 오히려 그쪽이 백시은 없으면 못 살게 되지 않을까?” ​ 그 말에 백시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때, 안심한 표정의 김가은이 조용히 물었다. ​ “근데… 시은아 혹시… 나중에 조교 잘 끝나면… 나도 한 번 가능할까?” ​ 그 말에 백시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 “음….” ​ 그러고는 인심 썼다는 듯 대답했다. ​ “나중에 질리면 너 해.” ​ “히히….” ​ 바로 그때. 공간 이동 능력을 가진 헌터, 리아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 “근데 백시은. 진세아는 어떻게 할 거야? 솔직히 나 걔랑 눈 마주치는 것도 싫거든. 걔, 그 베타 좋아한다며.” ​ 백시은은 김이 오르는 찻잔을 들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 “걱정 마. 그년을 위한 임무는 준비해 뒀으니까. 위재완이 직접 지시할 거야.” ​ “만약 진세아가 거절하면?” ​ 리아의 물음에 백시은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 “절대, 절대 못 해.” ​ 찻잔을 내려놓으며 단언했다. ​ “원래 윗선 말 더럽게 안 들었는데… 유선우가 갱생시킨 거거든.” “걔는 유선우 말은 무조건 들어, 그리고 걔 앞에서는 한 톨의 흠도 보이고 싶지 않아 해. 그러니까… 걔 앞에서는 임무도 절대 거절 못 해.” ​ 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 “그 임무 진짜 있기는 한 거야?” ​ “있겠니?” ​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 “상관없어. 그게 가짜라는 걸 깨달을 때쯤이면….” ​ 그녀는 즐거운 상상을 하는 듯, 눈을 가늘게 휘었다. ​ “유선우는 침대 위에서… 약에 절여진 상태로… 내 허리만 붙잡고 흔들고 있을 테니까.” ​ 리아는 그 노골적인 대답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 “너는 앙앙거리고?” ​ 옆에서 카라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나 리아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 “근데 시은아.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어? 그 베타 약하잖아. 그냥 집으로 쳐들어가서 납치하면 되는 거 아니야?” ​ 백시은의 미소가 처음으로 사라졌다. ​ “너는 잘 몰라서 그래. 다른 곳이… 오히려 훨씬 더 위험해.” ​ 최근에 깨달은 사실이다. 진세아는, 유선우의 집과 상담소가 모두 보이는 있는 위치에 살고 있었다. 그 동선 어딘가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순간… 즉시 적발당한다. ​ 반드시. ​ 그러나 해태 길드는 다르다. 오히려 진세아 자신의 영역이기에 어떤 장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의 자신감일 것이다. ​ 그러니… 역설적으로. 진세아만 없다면 매우 쉽다는 소리다. ​ 백시은은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 “약효 돌기 전까지는 상담하는 척할 거야.” ​ 유선우는 약하지만, 의외성이 있다.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뛰어나고… 그가 작정했을 때의 폭발적인 속도는, 웬만해서는 따라잡기 힘들다. ​ “그럼, 좀 이따 보자.” ​ 백시은은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해태로 출발했다. ​ ​ ​ ​ ​ ​ *** ​ ​ ​ ​ ​ ​ ​ 수요일 오전. ​ 나는 해태의 길드로 향했다. ​ “… 오랜만이네.” ​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할까. 옛날에 헌터 생활을 할 때는 내일도 이곳에 왔으면 하며 하루하루를 간절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완전히 아예 다른 기분이다. ​ 그때의 필사적이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이야기다. ​ 나는 감상에 빠지는 것을 그만두고 그대로 문을 열었다. ​ - 위이잉. ​ 회전문이 돌면서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풍경과 공기 또 사람들이 나를 맞았다. 전투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헌터들. 장비를 에어건으로 세척하는 소리. 라운지에서 흘러나오는 커피 향기까지. ​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 “야! 선우야!” ​ 그때 누군가가 내게 재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 “팀장님.” ​ 위재완 팀장이었다. 그는 넉살 좋은 미소와 함께 내 어깨를 툭하고 쳤다. ​ “요즘 유명하던데… 확실히 출세하긴 했어. 그렇지?” ​ 나는 그 이야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게 맞는 것 아닐까? 나는 상담사가 어울리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팀장이 내게로 오자, 다른 해태의 길드원들 또한 내게 다가왔다. 그들은 저마다 나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 “요즘 어때요? 상담사는 할만하고?” ​ “그럭저럭 괜찮아요.” ​ “적성에는 맞아요?” ​ “그것도 그럭저럭….” ​ 그들의 환대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답변했다. 그렇게 로비가 옛 동료들의 반가운 목소리로 북적거릴 때였다. ​ 2층 발코니에서 누군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선우야!” ​ 그 목소리 하나에 로비의 소음이 멎었다. 조금 전까지 내 어깨를 두드리고 팔짱을 끼던 여성 길드원들만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 나는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난간에 기댄 채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진세아가 있었다. ​ 그때, 팀장이 헛기침을 하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 “자자, 다들 그만하고. 우리 상담사님 일하셔야지. 이쪽으로 따라오면 돼. 상담실 마련해뒀어.” ​ “네.” ​ 나는 진세아에게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준 뒤, 위재완을 따라 들어갔다. ​ 상담소는 유니온이 마련해 준 곳보다 훨씬 넓었다. 비교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해태는 최근에 올린 신식 건물이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 여담으로 건물에 대한 지분 반 이상이 진세아라는 소문도 있다. ​ 나는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그곳에는 팀장이 내게 전송한 오늘의 내담자 목록이 있었다. ​ 나는 그 명단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 첫 번째 순서는…. ​ ‘세아구나.’ ​ 좋다. 오히려 잘 됐다. 한번 이야기를 해봐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 인터폰을 누르고 비서에게 전달했다. ​ “진세아 헌터님 불러주시겠어요?” ​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경쾌하게 열렸다. 문틈으로 장난기 가득한 금빛 눈동자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 “상담사니임~” ​ 진세아는 깡충거리는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상담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요즘 너무 힘들어요오~” ​ 나는 그런 진세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상담을 시작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 - 위이이이이이이이잉!! ​ 거대한 사이렌 소리가 해태 건물 전체를 뒤흔들었다. ​ “……!” ​ 나도 이 사이렌이 뭔지는 알고 있다. 해태가 담당하는 구역 내에 사건이 터졌고, 길드 내의 긴급 대기조를 소집하는 것이다. ​ “아….” ​ 눈앞의 진세아가 이마에 손을 얹고는 이를 꽉 깨물었다. ​ “대기조야?” ​ “… 응.” ​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 눈치를 살짝씩 살피며 중얼거렸다. ​ “근데 아마 안 가도…….” ​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과격하게 두드려졌다. ​ - 쾅쾅!! ​ 팀장이 거의 문을 부수다시피 열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다급함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 “세아야!” ​ 위재완 팀장이 문을 열었다. ​ “빨리 가야겠다! 지금 다른 팀원들은 전부 다 현장으로 갔어!” ​ “하…….” ​ 진세아는 그 모습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 “어디 안 갈게.” ​ 나는 그녀를 다독였다. ​ “다녀와도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약속할게.” ​ 내 다독임에 그녀의 흔들리던 금빛 눈동자가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알았어…….” ​ 그리고 터덜터덜 나갔다. ​ 아마, 진세아가 속한 팀인 것을 보면 이번 주는 1팀이 대기조였던 것 같은데…. 1팀은 어차피 매우 유능하다. 금방 처리하고 돌아올 것이다. 보통은 별일 아닐 가능성이 높다. ​ 던전이 발견될 ‘가능성’ 이 있거나, 그런 경우니까. ​ 나는 인터폰을 눌러 직원에게 전했다. ​ “오늘 비번인 헌터분들 위주로 먼저 부탁드릴게요.” ​ 혹시라도 상황이 악화되어 지원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지금 당장 움직일 필요가 없는 인원들부터 빠르게 상담을 끝내는 것이 좋아 보였다. ​ 나는 끊어진 인터폰을 내려놓고 잠시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 “…….” ​ 말은 그렇게 했어도… 출동은 언제나 걱정되긴 한다. 아마, 별일 없을 것이다. 나만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된다. ​ 바로 그때. ​ - 똑똑. ​ 상담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두드려졌다. 나는 벌써 다음 내담자가 온 것인가 싶어, 무심코 대답했다. ​ “네, 들어오세요.” ​ “선우야~” ​ 백시은이었다. 그녀는 오늘 비번인 듯했다. 상담 신청 목록에서 보긴 했다. ​ 그녀의 손에는 차가운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플라스틱 컵의 로고를 보아, 라운지 1층의 카페에서 사 온 듯했다. ​ “한잔하세요 상담사님~” ​ 백시은은 웃으며 내게 커피를 내밀었다. 그리고 맞은편 의자에 앉아,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 “잘 왔어.” ​ 나 또한 웃으며, 그녀가 건넨 커피를 받아들었다. ​ - 꿀꺽. ​ 그리고 한 모금 마셨다. ​ 시원한 액체가 목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 나는 상담을 시작하기 위해, 컵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럼 내담자님은 어떤 고민이 있….” ​ 뭐지? ​ 뭔가 이상하다. ​ 실제로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직감이, 나의 직감이 내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 네가 지금 삼킨 그것은, 위험한 액체였다고. ​ 그럴 리가…. ​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 음료는 백시은이 내게 직접 건넨 것이다. ​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 [백시은] [메인 스탠스] [잘 자. 그리고… 기분 좋아지자.] ​ 잘… 자라고? ​ [비상! 비상! 비상! WARNING!!] [∠(゚Д゚)/] ​ [도망치세요 지금, 당장!!!!!!!] [도주로 가이드: 절대 방의 문이 아닌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빠르게 뛰어내리셔야 합니다!!] ​ 시스템이 비명을 지른다. ​ - 덜컥! ​ 나는 그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높이는 20층. 이 정도면 뛸 만하다. 유리를 깨고 외벽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면…. ​ 그러나. ​ “아….” ​ 창틀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나는 그 자리에 간신히 기대어 멈춰 섰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 뇌의 명령을 몸이 듣지 않는다. ​ 대체… 무슨…. ​ 나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백시은이 아주 느긋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 “우와… 진짜 놀랐어.” ​ 그녀는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백시은의 해맑은 얼굴이 서서히 초점을 잃어가는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어떻게 창문이 탈출구인 걸 바로 알았지?” ​ 그리고 내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백시은이 들어왔던 상담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그러나 그 너머는 해태의 복도가 아닌, 붉은 비단으로 꾸며진 새빨간 침대만이 보였다. 포탈···이다. ​ “가자.” ​ 그녀는 내 몸을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 “우리 집으로.” ​ 백시은은 축 늘어진 나를 그 붉은 심연 속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 나는…. ​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 ​ ​ ​ ​ ​ ​ ​ ​ ​ *** ​ ​ ​ ​ ​ ​ ​ ​ ​ 진세아는 현장에 도착했다. ​ 발생한 마나의 파장에 대해 추측해 봤을 때. 높은 확률로 던전 형성 직전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 “빨리 끝내죠.” ​ 진세아는 글러브를 끼며, 현장에 먼저 도착한 팀원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끌려온 것치고는, 팀원들의 표정은 은근히 좋았다. ​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 “저… 세아씨.” ​ “네.” ​ “그게… 더미 파장이래요.” ​ 더미 파장. 그러니까 던전 형성과 비슷한 마력 파장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다. 번개나, 천둥이 치듯이 가끔가다 발생하는 자연현상. ​ 진세아는 그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그렇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니까. ​ “그럼 저는 바로 철수….” ​ 그러나 진세아를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다. ​ 주변을 둘러봤다. ​ … 있어야 할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 “… 백시은은요?” ​ “네? 시은 씨는 오늘 비번입니다.” ​ 비번…이라고? 선우가 왕진을 왔다. ​ 그리고 백시은은 그의 내담자다. ​ 게다가, 마침 자신이 상담을 받을 차례에 더미 파장으로 인해 그녀는 해태 밖으로 끌려 나왔다. ​ 진세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문제는 없다. 빠르게 돌아가면 된다. ​ 그녀는 눈을 감았다. 느껴지는 그의 존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감각은 끊어지지 않는다. ​ 아직은 괜찮았다. ​ 그러나. ​ - 뚝. ​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연결이 끊어졌다. ​ 진세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 - 휙! ​ 그리고 고개를 재빠르게 돌렸다. 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그리고. ​ - 콰과과과광! ​ 거대한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그녀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남겨진 팀원들은 그녀가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