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팽팽 굴렸다. 눈앞에는 이제 막 마음을 열랑 말랑한 토끼 한 마리가 앉아있다. ​ 그래서 일단 내가 결론 내린 것. ​ 정석적인 상담사의 길을 가자. 만족률이 더 높은 게 아닌 이상 후자를 선택할 이유는 크게 없어 보였다. ​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80%] [무엇이든,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 나는 머릿속으로, 첫 번째 선택지를 확정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말, 이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뭐야.’ ​ 오랜만에 보는 시스템의 확인 메시지였다. 과거. 아직 내 능력에 서툴렀던 시절 진세아를 상대할 때나 가끔 나타나던 것이었다. 마치 '더 쉽고 빠른 길이 있는데, 정말 이 힘든 길을 갈 거임?'라고, 나를 유혹하며 떠보는 듯했다. ​ 아니 만족률이 더 높은데 어쩌라고…. ​ ‘응, 할게.’ ​ 내 결심을 확인한 시스템 창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 나는 눈앞의 루나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붉은 눈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 “무엇이든,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내 말에, 루나는 대답 대신, 아주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라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우유 거품이, 그녀의 입술에 하얗게 묻었다. ​ 순간, 자화연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저 거품을 닦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그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찻잔을 쥔 내 손에 힘을 주었다. ​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의 먼 풍경을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차분하고 담담했다. ​ “제국에서는… 혐오하고, 또 경멸하는 것이 세 가지 있어요.” ​ 루나는 동화책을 읽어주듯 나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 “첫 번째는, 마법이라는 고상한 힘 대신, 힘과 완력에만 의지하는… 천한 무투가들.” ​ “…….” ​ “두 번째는, 말을 할 수 없고 오로지 주인을 위해 부려져야만 하는… 짐승이나 가축들.” ​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뱉어내기 위해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 “그리고… 마지막은….” ​ 루나의 시선이 창밖의 허공에서, 마침내 내게로 떨어졌다. ​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저희 같은 수인이에요.” ​ 목소리는 공허하고 담담했다. 그게 그녀가 꺼내놓은, 그녀 자신의 첫 번째 이야기였다. ​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 시선을 받아주었다. "······."​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루나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내담자가 터놓고 얘기할 수 있게끔 상황을 유도하는 것 또한 상담사의 역할이다. ​ 나는 그녀가 스스로 그곳으로 걸어 들어올 수 있도록, 작은 길을 터주기로 했다. ​ “제국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곧 혈통이자 귀족의 증명이라고 들었습니다.” ​ 그러자 루나가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거리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 “맞아요. 제국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곧, 혈통이자 귀족의 증명.” ​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쳤다. ​ - 팡! ​ 그녀의 손바닥 위 허공에서 빛의 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서로 얽히고설키며, 작고 귀여운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 루나는 자신의 손바닥 위의 마법진을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 “이 힘은… 절대로, 제가 사용할 수는 없었어야 했겠죠.” ​ 수인이면서, 귀족의 힘을 가졌다는 것. 내가 논문들을 읽으면서도 끝끝내 답을 찾지 못했던 가장 큰 모순이었다. ​ 대체 그녀는 어떻게? ​ “하지만 수인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요.” ​ 그리고 루나는 마법진을 스르르 없애며, 모든 이유들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 “…왜냐하면, 저는 온전한 수인이 아니니까요.” ​ 온전한 수인이 아니다? 나는 그녀의 붉은 눈을 바라봤다. ​ “아버지… 아니 백작님은 제국 백작가의 자랑스러운 후예였고. 어머니는 그 백작님이 가장 아끼시던 토끼 수인 하녀셨죠.” ​ 그녀가 아버지라고 불렀다가, 황급히 백작님으로 고쳐 부르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그녀가 겪어왔을 기나긴 고뇌를 엿보았다. ​ “저희는… 그러니까 저와 제 쌍둥이 동생, 엘리스는…..” ​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 “백작님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 “그러니까··· 제국에서 태어나서는 안 될 존재였어요. ” ​ 그게 루나가 내놓은 자신의 첫 번째 이야기였다. 그녀는 모든 진술을 마치고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 나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 “아니요.” ​ [루나] [메인 스탠스] [그녀는 모든 죄를 고해했고, 당신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100%] [그녀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축복임을 명심시키십시오.] ​ “그럴리가요.” ​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재빠르게 옆에 있는 태블릿을 꺼내들었다. 하나의 영상을 재생하기 위해서였다. 어젯밤, 상담을 위해 협회 데이터베이스에서 긁어온 비공식 자료였다. 이 영상에는 현장 날 것의 기록이 전부 담겨 있다. 화면이 켜지자, 게이트가 폭주하여 반파된 도심의 처참한 풍경이 나타났다. 불길과 연기, 사람들의 비명. ​ 그리고 그 아비규환의 현장을, 섬광처럼 가로지르는 하얀 인영과 검은 인영. 루나와 엘리스였다. ​ 영상 속의 루나는, 내가 아는 그녀와는 다른 존재였다. 망설임도 없이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괴물들을 베어 넘기고, 무너지는 건물 잔해 속에서 어린아이를 구해냈다. ​ 장면이 바뀌고, 구출된 아이가, 부모의 품에 안겨 울먹이며 인터뷰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영상에는 협회가 언론 보도를 위해 준비한 비공개 인터뷰까지 함께 존재했다. [기사]: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아이]: (울먹이며) 너무 무서웠는데… 갑자기, 하얀 천사님이 나타나서… 절 구해줬어요! 저, 크면 꼭! 루나님처럼 멋진 헌터가 될 거예요! ​ 영상 속의 아이는, 울면서도, 세상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 루나는 그 화면을 숨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멍하니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린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아래로 스크롤 했다. 영상은, 끝도 없이 많았다. 루나는 그녀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인명 구조 현장에 늘 가장 먼저 등장하는 성실한 헌터였으니까. ​ 다음 영상. ​ [학생]: 루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 다음 영상도. ​ [여성]: 제 아이를… 제 아이를 구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 모든 영상이, 그녀를 향한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이들에게는, 내담자님의 존재 자체가 축복이었을 겁니다.” 수백수천의 목소리가 그녀를 영웅이라 부르고 있었다. ​ “… 이거… 진짜… 정말이에요?” ​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네, 그럼요. 전부 진짜입니다.” ​ 내 대답에, 영상이 끝나고 검게 변한 태블릿 화면 위로 넋이 나간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 “처음… 봐요. 이런 건… 찾아볼 생각도 못했어요···.” ​ “그런 것 같네요.” ​ “당연히… 당연히 이곳 사람들도, 저를 전부 싫어하는 줄만 알았어요. 제국에서처럼… 짐승이라고… 불경하다고… 그래서 그래서 저는….” ​ 그녀의 말은, 더 이상 문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과 함께 흩어졌다. ​ 그럼 루나의 상담은 간단히 해결한 건가? 그렇지는 않다. 이제 막 곪아 터진 상처를 드러낸 것일 뿐. ​ 내가 지금껏 본 루나의 습성을 생각하면, 그녀가 그녀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 그걸 연 것 자체가 상담의 과정이자 오늘의 성과였다. 그리고 당연히 끝난 것도 아니다. ​ 그녀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상담은 아마, 길어질 것이다. ​ 나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시스템을 활성화했다. ​ [루나] [메인 스탠스]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의 망령을 희석시키는 기쁜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의 앞에서, 새로운 '존재의 이유'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80%]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꽉’ 붙잡으십시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 뭔 소리야 갑자기. 되게 섬세하고 좋은 분위기인데 대체 왜…. ​ 그런데 상태창을 자세히 보니, 평소와는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첫 번째 선택지 아래 마치 노이즈가 낀 것처럼 한 줄의 문장이 지지직거리며 접혀 있었다. ​ 나는 그 이상한 부분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 ‘열어.’ ​ 그러자, 접혀 있던 선택지가 스르르 펼쳐지며, 숨겨져 있던 내용이 드러났다. ​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80%]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고 진정할 시간을 주세….] 그래, 이거지. 이게 정답이다. 그러나 내가 그 문장을 채 다 읽기도 전. ​ - 치지직. ​ 방금 나타났던 정상적인 선택지가 타들어가듯 사라졌다. ​ 그리고 내 시야에는 다시, 첫 번째의 그 기괴한 선택지가 바뀌어 있었다. ​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80%]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꽉’ 붙잡으시면서 귓가에 속삭이십시오.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요?’] ​ 슬슬 루나에게 무언가를 하긴 해야 했다.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눈앞에 떠 있는 선택지는, 이제 단 하나뿐이었다. 다른 모든 길은 지워져 버렸다. ​ 적어도… 지금까지 능력이 내게 잘못된 길을 걷게 한 적은 없었으니, 일단 믿는 수밖에.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결심을 굳혔다. ​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 내 손이 흐느낌으로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양 어깨에 닿았다. 그 순간이었다. ​ [더 꽉.][만족 적합률 110%] ​ 진짜 미친놈인가? 오늘따라 정신이 좀 나간 것 같다. ​ 루나의 어깨가, 내 손아귀 안에서 떨리며 흠칫 굳었다. ​ 그녀는 놀란 듯, 눈물에 젖은 붉은 눈으로 조심스럽게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 “루나님은….” ​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춘 채, 말을 이었다. ​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가요?” ​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가볍게 미소 지었다. ​ 내 행동에 루나의 모든 반응이 멎었다. 흐느낌도 어깨에 떨림도 없다. ​ 그녀는 그저 내 손에, 귀를 붙들린 토끼처럼. 나를 멍하니 올려다볼 뿐이었다. ​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의 입술이, 아주 작게, 달싹였다. ​ “상담… 선생… 음….” ​ 그녀는 단어를 고르다 말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제가 혹시… 호칭을 뭐라고 하면 될까요?” ​ 내담자가 상담사에게, 자신을 부를 호칭을 정해달라고 물었다. 호칭은 기본적으로 내담자의 자유다. 이것마저 질문하는 것 자체가, 그녀가 얼마나 배려심이 있는 성격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 나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돌려주기 위해, 가볍게 웃으며 대답을 하려던 참이었다. ​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90%] [선생님]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50%] [상담사님]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 [주인님] ​ ‘…….’ ​ 이제 하다 하다 호칭마저 나한테 훈수를 두는구나. 게다가 마지막 선택지는…. 그냥 오늘 여러모로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다. ​ 나는 가장 만족률이 높은 선택지를 골랐다. ​ “편한 대로 불러주시면 됩니다만….” ​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 “선생님. 이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 그러자, 루나는 나를 올려다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늘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 근육이 아주 오랜만에 제 역할을 찾은 듯했다. ​ 처음으로 보는, 그녀의 웃음이었다. ​ “네… 선생님….” ​ 루나는 작게 읊조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