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이서령을 안으로 들였다. ​ 놀라지는 않았다. 예상은 어느 정도 하고 있었으니까. ​ 어떤 방식이로든, 다시 내게 접근할 것이라는 것. 다만 이렇게 빠르게, 또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을 뿐. ​ 나는 그녀를 손짓으로 검은색 테이블로 안내했다. ​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차를 내오겠습니다.” ​ 그녀는 우아하게 의자에 앉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네, 그럼요. 의원님이 직접 내어주시는 차라니… 기대되네요.” ​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 ​ 차를 준비하며 그녀의 의도를 가늠했다. ​ 정말로, 헤어진 딸을 되찾고 싶은 어미의 절박함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소유물이었던 인형을 되찾기 위해 찾아온 것일까. ​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 그것을 알아내야 한다. ​ 따뜻한 녹차 두 잔을 내왔다. ​ 이서령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는 붉은 입술에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 손끝으로 흑색 테이블의 표면을 부드럽게 쓸었다. ​ “탁자가… 상당히 범상치 않군요. 기개가 느껴집니다.” ​ 자화연이 선물해 준 테이블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나는 찻잔을 내밀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 “지인이 주신 선물입니다.” ​ “그렇군요… 아, 향이 좋군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 그녀는 더는 묻지 않았다. 백옥같은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눈을 감고 차를 음미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잠시 동안 차 향기만이 감돌았다. ​ 바로 그 순간 이서령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흥미가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차 맛이… 아주 좋네요. 의원님께서는, 혹시 따로 다도(茶道)를 익히신 걸까요?” ​ “신경 쓰고 있는 편입니다.” ​ 그리고 웃으며 덧붙였다. ​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 이 이상의 잡담은 필요 없다. ​ 이서령은 상담을 받으러 온 내담자가 아니다.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줄, 아이스브레이킹의 의무 또한 내게는 없다. ​ 나는 손에 있던 찻잔을, 소리 없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 이서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직언이었다. ​ 이서령은 바로 본론이냐는 듯, 붉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나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그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유월이는… 사실 제가 낳은 딸이 아닙니다.” ​ 설유월이 친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고백. ​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놀란 표정을 짓지도,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 내 무표정한 반응에, 이서령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의원님께서는, 이 사실 또한 이미 알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 “네. 유월 씨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 “유월이는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의원님에게 벌써 많이 마음을 연 것 같습니다.” ​ “그렇군요.” ​ 내 답에 이서령은 더 이상 유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전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 “의원님께서는 저희가 넘어온 규정된 세계. ‘중원’에 대해, 혹시 알고 계십니까?” ​ 나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눈을 마주쳤다. ​ “미약하게나마, 알고 있습니다.” ​ 처음에는 말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규정된 세계 ‘중원’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무협소설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세계라고. ​ 나 또한 그 정도만 알고 있었지만. 설유월을 상담하기 위해, 나는 밤새 중원에 대한 기록과 시중에 떠도는 가십거리까지 샅샅이 조사했다. ​ 아마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봐야겠다. ​ “다행입니다.” ​ 이서령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 “그렇다면, 이 사실 또한 알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 무슨 이야기지? 나는 잠자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저희 세계, 중원은, 극도로 보수적이며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은 곳입니다.” ​ 남존여비(男尊女卑). 남성은 존귀하고 여성은 비천하다. ​ 그러나 의아했다. 중원이 무협 소설과 비슷한 세계라는 것. 그리고 과거가 배경인 세계라는 점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 다만 여성 중에서도 그 사상을 무공이라는 힘의 논리로 짓누르는 기인들이 존재할 뿐. ​ 솔직히 말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내가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바로 그 순간. ​ “의아해… 하시는군요.” ​ “…….” ​ “저 또한 이 세계에 넘어와 의원님께서 생각하시는 그 무협 소설이라는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 그녀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 “참으로… 낭만적이더군요.” “의원님께서 아시는 중원은, 아마 그 소설 속에나 존재하는 세상일 겁니다.” ​ 이서령은 말을 이었다. ​ “그러나 저희의 세계에서 여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 “…….” ​ “아주 극소수의, 거대한 가문을 등에 업은 명문가의 규수가 아니라면.” “그저 사내들의 욕망을 채우는 노리개이거나, 가문의 세를 불리기 위한 정략결혼의 도구일 뿐입니다.” ​ 이서령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 “설령, 무공을 익혀 하늘의 뜻을 엿본다 한들, 여인은 그저 암컷일 뿐이지요. 강한 사내의 보호를 받거나, 그 사내에게 엉겨 붙어야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는 곳.” ​ 그녀는 찻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무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맺었다. ​ “그곳이, 제가 살던 중원입니다.” ​ 나는 그 충격적인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묘사하는 세상은 내가 소설 속에서 읽었던 그런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단번에 이해가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야, 그 이야기에 완벽히 반하는 예시가 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 전 무림맹주이자, 현 창천맹주, 이서령. ​ 그녀의 존재가 그녀의 이야기의 모순이었다. ​ 나는 눈앞의 여인을, 다시 바라보았다. 여인은 사람이 아니고, 사내에게 보호받거나 엉겨 붙어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이서령은 어떻게, 맹주가 되었는가. ​ [이서령] [메인 스탠스] [방금 말한 이야기는 전부, 사실입니다. 눈앞의 의원의 혼란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 게다가, 거짓말이 아니었다. 내 능력이 그녀의 말이 전부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 그 사실이 내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 이서령은 그런 내 표정을 읽었다는 듯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을, 대신 입에 담았다. ​ “의원님께서는 지금 이렇게 묻고 싶으실 겁니다.” ​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 “그렇다면, 너는 대체 무엇이냐고.” ​ 그리고 천천히 덧붙였다. ​ “지금부터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 이서령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매혹적으로 미소 지었다. ​ “부디··· 들어주시렵니까?”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담담하게 답했다. ​ “그게 제 업입니다.” ​ 내 대답에 이서령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 아무래도, 이야기는 길어질 것 같았다. ​ ​ ​ ​ ​ *** ​ ​ ​ “의원님.” ​ 그녀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 “의원님이 보시기에… 제 출신은 어디일 것 같습니까?” ​ 이서령의 출신이라….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녀의 외모는 기품이 넘치고, 매력적이다. 따라서 그녀가 설명했던 중원의 법칙에 의하면, 이서령은 명문 정파의 후예거나, 가문의 후예일 가능성이 있었다. ​ “음… 글쎄요. 명문가의 규수이실 거라, 그리 짐작했습니다.” ​ 내 대답에 이서령의 입가에서 웃음이 작게 터져 나왔다. ​ “아닙니다.” ​ 그녀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 “그렇게 봐주신다니 기쁘지만… 저는 의원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고귀한 출신이 아닙니다.” ​ 이서령은 당연히 명문 정파의 자식일 줄 알았다. ​ “사람들은 제가 살았던 마을을 마도의 찌꺼기라 불렀습니다. 정파의 위선자들은, 대의라는 명분 아래 하룻밤 사이에 제 모든 것을 앗아갔지요.” ​ 그녀의 집안은 무공을 익히는 무림인이 아니었다. 그저 정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척박한 접경 지역에서, 농사를 지어 연명하던 민간인들. ​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마교와 거래를 했다. 식량을 팔고, 생필품을 얻어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 하지만 정파의 위선자들에게는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였고. 그들은 마교의 비호 아래 살아가는 배신자가 되었다. ​ 결국 이서령은 부모와 이웃을 모두 여의고, 추격을 당했다. ​ 그녀의 목소리는 그 끔찍한 과거를 이야기하면서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 “저는 그 잿더미 속에서 홀로 살아남은 이름 없는 부랑자였습니다.” ​ 과거를 회상하는 이서령의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 “그렇게 추격자들에게 쫓기며, 짐승처럼 산을 떠돌던 어느 날. 운 좋게도, 제 스승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이서령은 말을 이어갔다. ​ 그녀를 거두어들인 스승은 아미파의 여고수였고. 그녀의 비호 아래 이서령은 처음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았다. ​ “그렇게 십 년쯤 흘렀을까요?" ​ 그렇게 그녀가 소녀가 되었을 무렵. ​ “스승님은, 돌아가셨습니다.” ​ 그것을 말할 때, 그녀는 처음으로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 “저라는 흠이 있었기에 그것을 핑계로 스승님은 억울한 누명을 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스승님의 죽음을 슬퍼할 틈도 없이, 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습니다.” ​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절벽 끝에서….” ​ 떨어졌고. ​ “기연을 얻었습니다.” ​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자부심도 기쁨도 없었다. ​ “그리하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고수가 되었지요.” ​ 정파의 추격조에게 쫓기던 이서령은 절벽 아래에서 사망했고. 의문의 고수, 무림 초출 이서령은 신분을 세탁해 세상에 처음으로 그 이름을 알렸다. ​ “하지만… 여인의 몸으로 얻은 강함은, 글쎄요.” ​ 그녀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조명 아래 백옥같은 피부와 붉은 입술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 그녀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순수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 “의원님께서 보시기에, 제가 사내들에게 시달릴 만큼 고운 얼굴을 하고 있나요?” ​ “네?” ​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쉽게 생각해도 그녀의 고향인 중원에서, 미모의 여성 고수로 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 “네… 뭐. 그러실 것 같기는 합니다.” ​ 객관적인 사실이다. 이서령은 매력적이니까. 그러자 그녀는 한 번 더 미소 지었다. ​ “수많은 파리떼가 들끓었지만…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답니다.” ​ 그렇게 이서령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그리고 저는 어느 순간부터 저를 쫓던 무림맹의 소속이 되어, 원수들의 밑에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 그맘때의 이서령은 이미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 “글쎄요…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저를 무시하고 핍박하던 이들 위에 서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요? 막상 맹주는 아니더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니…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 그녀는 그때를 회상하듯 조용히 되뇌었다. ​ “내가… 왜 이러고 있지?” ​ 그저 살아가기에 살아갈 뿐. 당장 목숨을 가져간다 하여도, 아쉬울 게 없는 삶이었다. ​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마도(魔道)의 잔당들이 모여 사는, 접경 지역을 토벌하라는.” ​ 그녀의 시선이 잠시 내 너머의 허공으로 향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의 풍경을 다시 보는 것처럼. ​ “그날은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떨리는 듯했다. ​ “그곳에서 한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 이서령의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그때를 기억하는듯했다. ​ “길거리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저 살기 위해, 제게 목숨을 구걸하던 아주 작고 더러운 아이.” ​ 이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아이의 텅 빈 눈동자에서, 저는 과거의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 이서령은 운이 안 좋았지만, 역설적으로 매우 운이 좋았다. ​ 하지만 이서령이 보기에 그 여성 꼬마의 미래는 뻔해 보였다. 길가를 떠돌다가 죽거나, 운이 좋다면 기생으로 팔려가 남성에게 아양을 떨며 살아가거나. ​ “그래서 거두었습니다.” ​ 이서령은 미소 지었다. 내가 보았던 그녀의 미소 중 가장 진실한 미소였다. ​ “유월이는, 그렇게 제 삶의 전부이자.” ​ 그녀는 속삭이듯 말을 맺었다. ​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서령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하나의 신념만이 깃들어 있다. ​ “저는 유월이를 위해, 무림 맹주가 되었습니다.” ​ 무림 맹주의 비호 아래 있는 설유월을, 그 누구도 건들 수 없게끔. 그게 그녀의 의지였다. ​ 이서령은 나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 “제 딸이, 제가 겪었던 그 지옥을 단 한순간도 겪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 [이서령] [메인 스탠스] [유월이는 그녀가 만들고 다져놓은 길을 걷기만 하면 됩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가 하라는 대로만 따른다면 절대로 문제가 생길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유월이를 위한 길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 “의원님.” ​ 이서령의 미소가 보인다. 그 모습은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 “이게, 제가 찾은 가장 올바른 길이었습니다.” ​ 그녀는 거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니… 의원님, 부디.”​ 그게, 이서령의 진짜 뜻이자. “유월이를 놓아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뒤틀린 사랑의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