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이른 아침. ​ 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상담실에 나와 있었다. 케이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 동이 트기 전의 푸른 새벽빛이 조용한 상담실의 창문으로 스며든다. ​ - 달그락. ​ 내가 조심스럽게 그릇을 옮기는 소리만이 고요한 공간을 채웠다. ​ “굽고 나서….” ​ 나는 오븐의 예열 상태를 확인하며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사각 케이크 틀을 바라보았다.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두 개의 케이크를 굽고 있었다. 둘 다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오븐을 가득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 하나는 루나의 용기에 대한 보상으로 준비한, 달콤한 딸기 케이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계획에 없었던 부드러운 바닐라 케이크. ​ 어제 보육원에서 보았던 엘리스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 그래서일까. 그녀에게도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 하나 더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 나는 두 개의 케이크 반죽을 오븐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곧, 달콤한 향기가 상담실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고요함을 깬 것은, 문에 달린 작은 종이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 - 딸랑. ​ ‘이 시간에?’ ​ 오전 6시도 되기 전이었다. ​ 나는 의아함을 품고 주방에서 나와 현관 쪽을 확인했다. 그리고 현관 앞에 서 있는 대상을 보고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칠흑같이 검은 무복 차림의 천마, 자화연이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빛을 등지고 문 앞에 소리 없이 서 있었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춰 그녀를 맞이했다. ​ “오랜만입니다, 천마님. 이 시간에 여기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 웃으며 말했다. ​ “……흥.” ​ 그러나 나의 인사에도 자화연은 코웃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흥 소리만 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나를 정면으로 보지도 않고 나를 힐끗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자신이 보낸 그 거대한 흑옥 테이블의 앞 의자에 토라진 아이처럼, 털썩 앉아버렸다. ​ 자화연의 뺨이, 아주 살짝… 뾰로통하게 부풀어 있었다. ​ 우리 지존님이 왜 토라지셨을까. 나는 속으로 웃으며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능력을 활성화했다. ​ [자화연] [메인 스탠스] [엊그제, 당신을 보기 위해 예고 없이 이곳을 방문했으나 당신이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속상했습니다. 삐져있는 상태입니다.] ​ “…….” ​ 에고. ​ 엊그제 왔었구나. ​ 하긴, 내가 언제든지 오라고 했었으니까. 왕진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내 말만 철석같이 믿고 찾아온 그녀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토라질 만도 했다. ​ 뭐, 그러나 천마 자화연을 달래기 위한 방법은, 굳이 시스템의 적합 답변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나는 즉시, 부엌으로 가 우유 거품을 풍성하게 올린 달콤한 라떼를 가장 예쁜 찻잔에 담아 내왔다. ​ “죄송합니다, 천마님. 제가 엊그제 중요한 용무로 자리를 비웠습니다.” ​ 나는 웃는 낯으로, 그녀 앞의 거대한 흑옥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라떼를 내려놓았다. ​ “우선 차입니다.” ​ 그리고, 나는 내 상담용 책상으로 가 가장 깊숙한 서랍을 열었다. 거대한 크기와 위엄이 깃든 그것. 내담자들이 위화감을 느낄까 싶어 평소에는 치워두었던, 그녀의 선물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 - 번쩍. ​ 흑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명패가 상담실의 조명을 받아 그 위에 새겨진 금빛 글씨를 밝게 빛냈다. 나는 그 명패를 보물이라도 다루듯 양손으로 소중하게 들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 “제게는 너무나도 과분하고 소중한 명패이기에, 혹여나 먼지라도 탈까 퇴근 전에는 늘 이 금고 같은 서랍에 고이 모셔두고 갑니다.” ​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 “그리고 내담자분들이 오실 때가 되면, 지존께서 내려주신 이 영광을 이렇게 자랑스럽게 꺼내놓는 편입니다.” ​ ‘천마님의 선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 상전 모시듯이 하고 있습니다.’라는 소리다. ​ 내 선의의 거짓말에 뾰로통하게 닫혀 있던 자화연의 붉은 입술이 움찔, 하고 경련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꾹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쌀쌀했던 그녀의 눈빛도, 어느새 살짝 누그러져 있었다. ​ “흥.” ​ 그녀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이처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 알겠다. 이번 한 번만 그대를 용서해 주겠다.” ​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내온 따뜻한 라떼 잔을 집어 들었다. ​ 그거 마시면 끝인데. ​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 - 홀짝. ​ 자화연은 라떼를, 자신의 붉은 입술 사이로 가져가 작게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고 그녀가 필사적으로 유지하던 뾰로통한 표정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자화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의 윗입술에는 하얀 우유 거품이 귀엽게 묻어있었다. ​ 나는 자화연의 기분이 완전히 풀어진 것을 확인하고, 본론을 꺼냈다. ​ “그런데 혹시 무슨 심려라도 있으신 겁니까? 이 시각에 이곳까지 직접 걸음하신 것을 보면, 필시 중요한 용무가 있으실 터인데.” ​ 내 질문에 자화연의 행복했던 표정이 멍하게 굳었다. 그녀는 라떼 잔을 입으로 가져간 채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 “용무? 용무라….” ​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 방문에 대한 그럴싸한 명분을 찾아내려는 듯,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볼 뿐이었다. ​ ‘아, 별거 없구나.’ ​ [자화연] [메인 스탠스] [진짜 별거 없습니다.] ​ 실제로도 그런 듯했다. 그래도 괜찮다. 원래 상담사는, 내담자의 방문이 겉보기에 이유가 없어 보여도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게 기본자세이니까. '이런 문제가 있어서 왔어요.'라고, 명확히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상담사를 계속해서 찾아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내면 어딘가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정서적 결핍이 있다는 소리일 수도 있다. ​ 그러다, 정말로 마땅히 말할 것이 생각난 듯. ​ “!” ​ 자화연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주먹을 탁, 쳤다. ​ 그녀는 한 모금 더 홀짝, 삼키더니 신나게 입을 열었다. ​ “요즘, 정파 놈들의 자세가 심상치가 않구나.” ​ 그녀의 목소리가 군주 다운 서늘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 “참…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의 무림맹주는 그래도 말이 통하는 상대였는데 말이지. 다시 그 고지식하고 꽉 막힌 노괴(老怪)로 돌아왔을 줄이야….” ​ 노괴…? 나는 그녀가 말하는 그 단어에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알고 있는 무림 맹주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묘사였으니까. 그녀는 이곳 지구에서는 그 무력보다도 오히려 다른 것으로 더 유명했다. 아름다운 외모로. ​ 모 갤러리를 보다가 발견했던 글귀가 하나 떠오른다. ​ [창천맹주 젖탱이가 세상을 구한다] ​ “…….” ​ 정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자화연을 바라보는 건 불경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길어지는 내 침묵을 자화연은 다른 의미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 “… 무엇이지?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게냐.” ​ 그녀의 목소리에 미세한 노기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 “의원, 설마 네놈마저도 그 노괴가, 절세 가인에 탐스럽다고 생각….” ​ 아. ​ 제발. ​ 나는 헌터 갤러리가 싫다. ​ 그러던 바로 그때였다. ​ - 위이이이이이이이이잉! ​ 고막을 찢을 듯한, 거대한 사이렌 소리가 도시를 뒤흔들었다. ​ “…!” ​ 이건 단순한 화재 경보나 훈련 따위가 아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알고 있는. 마력 재난 경보. ​ 고등급의 게이트가 열리거나… 혹은 새로운 전이가 발생했다는 신호. 그리고 이 사이렌이 이렇게나 가깝게 들린다는 것은 그 재난이 근처에서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 - 띠리리링! ​ 그때, 내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나는 재빠르게 연락을 받았다. ​ 연락이 도착한 곳은 헌터 협회였다. ​ “유선우입니다.” ​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상담사님. 전이입니다. 규정된 세계인 중원에서 넘어온 이방인입니다. ​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막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도시의 풍경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 - 초기 파동 측정 결과… 측정치 S급 이상. 지금 바로… 현장으로 출동 준비를 해주셔야…겠습니다. ​ “그래야죠.” ​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래.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 이것이 헌터 정신상담사라는 직업이 만들어진 큰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 -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왕진을 담당하고 있는 유니온 길드에서, 즉시 출동 대기 헌터들로 상담사님의 경호를… ​ 한 주에 왕진 길드가 정해지면, 그 길드가 해당 주간에 발생하는 모든 비상사태에서 상담사를 책임지는 구조다. ​ 그리고 현 왕진 주간은 유니온. 즉, 유니온 길드가 나의 경호를 맡게 된다는 뜻이었다. ​ 유니온 정도면 믿고 맡길 수 있다. ​ 전화는 그렇게 끊었다. ​ 휴대폰으로 방금 전송된 현장의 좌표를 확인했다.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 나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 “천마님.” ​ 그러나 나는 바로 말을 멈췄다. ​ “어…?” ​ 자화연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 ​ ​ ​ ​ ​ ​ ​ *** ​ ​ ​ ​ ​ ​ 금요일 이른 아침. 오늘은 유니온 길드의 마지막 왕진 날이었다. ​ 루나는 토끼굴에서의 단장도 평소보다 오랜 시간을 들였다. 선생님을 만나는 것일 뿐인데 그럴 이유가…? ​ 이유는, 그녀 자신도 아직은 잘 몰랐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 오전 일찍부터 루나는 헌터 전용 라운지의 가장 안쪽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녀는 애써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한 척했지만. ​ 문이 열리는 아주 작은 소리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 그때였다. ​ “응?” ​ 길고 지루했던 지방 출장을 막 마치고 라운지로 복귀한, 여우 수인. 릴리는 자신의 코끝을 스치는 아주 기묘한 향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 아주 오랜만에 맡아보는… 본능 발현기의 향기였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처럼 달콤하지만 동시에, 제어하지 못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 미숙하고도 강렬한 암컷의 페로몬. ​ ‘어머… 누구야? 길드에 이런 귀여운 애가 있었나?’ ​ 릴리는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그 향의 발원지를 찾아 여우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향기는, 놀랍게도 라운지의 가장 구석진 곳 한 마리의 하얀 토끼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 으잉…?” ​ 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루나라고…?” ​ 착하지만 고지식하고 순수하다 못해, 놀리는 재미조차 없는 그 토끼? 엘리스도 아니고, 루나한테서 이런 아찔한 향이 난다고? ​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릴리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 “루나~” ​ 그녀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루나의 옆자리에 아주 자연스럽게 털썩 앉았다. ​ “릴리? 오랜만이에요. 출장은 잘 다녀왔어요?” ​ “응, 그건 그렇고. 혹시… 루나.” ​ 릴리는 그런 루나의 뺨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취조 아닌 취조를 시작했다. 루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가늘게 휘어지는 눈웃음과 함께 물었다. ​ “혹시… 수컷 생겼어?” “네?! 아, 아니요…!” ​ 루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 그녀의 그 격한 부정에 릴리는 더욱 확신에 찬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그래? 그럼 뭔데? 우리 하얀 토끼한테서 왜 달콤한 냄새가 진동을 하지?” ​ “그, 그냥…! 요즘 잘 쉬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 루나의 서툰 변명에, 릴리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런가아~? 그럼 오늘도 푹 쉬겠네. 상담도 취소됐고. 그렇다고 비번이 풀린 것도 아니잖아?” ​ 그러나 그 말에 루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 전까지 붉게 물들어 있던 뺨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 “네…? 무슨… 소리예요? 상담이, 취소됐다니….” ​ 이번에는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 “응? 못 들었어? 오늘 아침에 전이 터졌잖아. 그래서 그 상담사도 바로 현장으로 갔다던데?” ​ 릴리는 덧붙였다. ​ - 벌떡! ​ 루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 “그럼 제가…!” ​ 왕진 중인 길드에서는 상담사에 대한 모든 신변을 책임진다. 그렇다면 S급 헌터인 자신이 ‘직접’ 선생님의 경호를 서는 것이 맞았다. ​ “응? 아니야~ 루나는 오늘 비번이잖아. 걱정 마. 이미… 엘리스가 갔을걸?” ​ 그러나 그녀의 그 결의에 찬 말은 릴리의 하품 섞인 말에 가볍게 잘려버렸다. ​ “…… 엘리스요?” ​ 그 이름 하나에 방금 전까지 타오르던 루나의 의지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서서히 지워져갔다. ​ 오늘은… 상담이 없다. 선생님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비번 같은 건 의미가 딱히 없다. ​ 선생님은 종족을 혐오하던 그녀의 눈을 뜨게 해 주었고. 평생을 짊어진 상처를 마주할 용기를 주었다. ​ 루나의 눈동자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 다만 선생님은, 무력적으로는 자신에 비해서는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 그렇다면, 만약 그런 선생님에게 무력적인 위기가 닥친다면. 위기에서 그를 지키고, 힘이 되어주어야 하는 사람 또한, 그에게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그녀. 루나여야만 했다. ​ 그게, 마땅한 이치이자. ​ 루나가 가지고 있을 권리였다. ​ 그런데 왜? ​ 왜…. ​ 엘리스가? “…….” 루나는··· 초조함에 휩싸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