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으후, 그럴 것 같더라.” ​ 내 단호한 거절에 엘리스는 의외로 책상에서 몸을 떼고 쭉 벗어나 의자에 털썩 앉았다. 포기가 빠른 토끼라 다행이었다. 그때,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 - 킁킁. ​ “음… 근데 아까부터 이 방에서 되게 답답하고 꽉 막힌 딸기 냄새가 나는데….” ​ “그런 냄새도 있나요…?” ​ 세상에 그런 냄새도 존재했나? 혼자 킁킁거리며 고개를 갸웃하던 엘리스가 뭔가 알아챘다는 듯이 손뼉을 짝하고 쳤다. ​ “아… 루나 언니 상담했었구나?” ​ 엘리스는 턱을 괴며 내게 물었다. ​ “그 언니, 피곤하죠?” ​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담자의 이야기는, 그것이 무엇이든 타인에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그저 잠자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엘리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 “루나 언니… 착하죠. 엄청 착하고, 좋은 사람인 건 맞는데…. 그 언니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이 뭔지 알아요?” ​ 무심고 뭐냐고 반문할 뻔 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S급 헌터 루나. 그녀의 주변인이 직접 해주는 이야기는, 상당히 귀한 정보였으니까. 엘리스는 내 기대감 담긴 눈빛을 즐기듯, 잠시 뜸을 들이다. ​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 “아다에여.” ​ “… 네?” ​ 잘못들은 건가. 엘리스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 “아-다-라-구-요. 아다몰라여?” ​ 안다 아는데. ​ 그게 대체 이거랑 무슨 상관이…. ​ “아다라서 완전 꽉 막혀있다니까여? 여러~모로.” ​ 그녀는 여러모로라는 단어를 길게 늘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맨날 자랑스러운 제국의 일원으로서 무슨 몸가짐을 어쩌구~, 수인으로서의 본능을 경계 어쩌구~ 저한테 잔소리를 얼마나 하는지 몰라여.” ​ 엘리스는 질렸다는 듯, 긴 귀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웃기지도 않죠. 정작 그 잘난 제국 놈들은, 우리 같은 수인… 사람 취급도 안 해주는데 말이에요.” ​ 뭔가… 단서를 얻은 듯하다. 루나의 고민. [제국의 일원, 수인의 일원. 그 정체성 사이에서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라는 문장의 진짜 의미. ​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자꾸 내 내담자를 디스해서 그런 건가. ​ 약간 아픈 손가락을 건드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엘리스에게 공격적으로 말했다. ​ “엘리스님은 아는게 많으시네요. 경험이 풍부하신가봅니다.” ​ 그러자 엘리스의 표정에 걸려있던 요염한 미소가 살짝 굳었다. ​ “… 네? 무, 무슨… 하, 하하… 당연히, 그렇겠죠…? 제가 토, 토끼 수인이잖아요?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닌…가요?” ​ 어색하고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더니, 급하게 화재를 돌렸다. ​ “… 와! 이건 뭐에여?” ​ 엘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책상 위에 놓아둔 작은 쿠키 바구니에 꽂혔다. 그녀는 내 허락도 구하지 않고 쿠키 하나를 집어 들어, 그대로 입안에 쏙 넣었다. ​ “냠냠, 음?! 이거 맛있다!” ​ 그녀는 오물거리며,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 “그거 들고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 “어, 진짜요? 냠냠. 그럼 하나만 더 주면 나갈게요.” ​ 그녀는 입에 쿠키를 가득 문 채, 웅얼거리며 말했다. 나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손짓으로 바구니 전체를 가리켰다. ​ “가져가세요….” ​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엘리스는 다람쥐처럼 남은 쿠키들을 전부 자신의 전투복 주머니에 쓸어 담았다. ​ 그러나 그때. ​ “내려놓으시죠. 엘리스님.” ​ 인사팀장이 들어왔다. 엘리스는 쿠키를 든 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 “지금 업무 시간에… 여기서 뭐 하십니까…” ​ “에잉 아깝다….” ​ 팀장의 한숨 섞인 질책에, 그녀는 쫑긋 세웠던 귀를 축 늘어뜨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주머니에 쑤셔 넣은 쿠키들을 하나씩 다시 꺼내 놓았다. ​ 결국 엘리스는 인사팀장에 의해 질질 끌려 나갔다. ​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 ​ ​ ​ ​ *** ​ ​ ​ 그 시각, 루나의 토끼굴. ​ 토끼굴은 무슨 대단한 마법은 아니었다. 그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그녀의 침실. 그중에서도 침대 위로 곧장 다이빙할 수 있게 해주는, 지극히도 개인적인 도주 마법일 뿐이었다. ​ - 포옥! ​ 공간이 일그러지는 감각과 함께, 루나의 부드러운 몸이 푹신한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그대로 얼굴을 거대한 베개에 파묻었다. ​ 침실은 그녀의 대외적인 냉랭한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온통 파스텔 톤의 가구와 토끼 인형들로 가득했다. ​ “으으…….” ​ 잠시 후, 그녀는 두 다리를 허공으로 들어 올려, 애꿎은 침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 - 콩! 콩콩! 콩콩콩! ​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하얀 이불을 그녀는 하얀 양말을 신은 발로 마구 두들겼다. ​ 정체도 들켰다. 우는 모습도 보였다. S급 헌터 루나로서 쌓아 올린 제국의 위엄과 품위가 전부 박살 나 버렸다. ​ 더 들킬 거리도 없었다 이제. ​ 그녀는 발길질을 멈추고, 침대 머리맡에 있던 거대한 당근 모양의 바디 필로우를 끌어안았다. ​ “망했어….” ​ 그날 저녁까지 루나는 자신의 방 침대에 틀어박혀 있었다. ​ 루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별 모양 야광 스티커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 ‘아직 길드에 있으려나….’ ​ 저녁 늦게까지 상담을 이어간다고 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시간을 확인했다. ​ ‘이 정도면….’ ​ 그녀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이대로 결근할 수는 없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보니 유니온의 건물 앞까지 도착했다. ​ 루나는 도둑고양이, 아니 도둑토끼처럼 조용히 복도를 걸어, 자신의 개인 대기실로 향했다. 다행히, 상담실이 있던 층은 불이 꺼져 있었고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방문을 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아… 루나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루나의 어깨가 굳었다. 국해원 팀장이었다. ​ 그는 오늘 하루가 쉽지 않았는지, 퀭한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다가왔다. ​ 그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작은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 “유선우 상담사님께서 퇴근하시기 전에, 이걸… 꼭 좀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 루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가방을 받아들었다. 안에는 예쁜 리본으로 묶인 작은 상자와 빳빳한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 그녀는 먼저 카드를 열었다. 그리고 적혀있는 편지를··· 읽어 내렸다. [루나님께] 많이 놀라셨죠? 오늘 오전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으로 많이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상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내담자가 스스로 원할 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먹으셔도 됩니다. 루나님께서 준비가 될 때까지, 저는 상담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건 작은 다과입니다. 단 것은 기분을 나아지게 하니까요. 그러니 부디, 편안한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 상담사, 유선우 드림. 루나는 한참 동안, 그 편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날카롭고 선이 진하게 생긴 얼굴과는 완전 딴판인… 상당히… 몽글몽글하고 마음 한구석이 이상해지는 편지였다. 그의 글에는 서두르지 않는 배려심만이 담겨 있었다. ​ 그 온기에, 그녀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살짝 붉어짐을 느꼈다. ​ ‘뭐지…?’ ​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설프지만 진심이 담긴 연애편지를 받은 듯한, 그런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달콤한 버터 향과 함께, 하얀 생크림이 통통하게 샌드 된 먹음직스러운 쿠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 “뭐야 이 사람….” ​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과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몰래 숨어서 먹던 쿠키였다. ​ 쿠키를 집어 들던 바로 그 순간, 쿠키 아래에 깔려 있던 작은 메모지 하나를 발견했다. 편지와는 다른 조금 더 가벼운 필체로 휘갈겨 쓴 듯한 글씨. ​ [다음에는 딸기도 올려 드리겠습니다. :)] ​ “…….” ​ 그 메모를 본 루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 “… 팀장님, 저 내일 공식 일정 있나요?” ​ “네? 아… 아니요. 내일은 비번이신 걸로 압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 팀장은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하며 대답했다. 루나는 그의 눈을 보지 않은 채, 손에 든 쿠키를 내려다보며 웅얼거렸다. ​ “그럼 저 내일… 연차 좀….” ​ “네?” ​ “내일… 그 상담소, 가보려고요….” ​ 팀장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몇 번이나 권유해도 단 한 번도 받아들인 적 없는 상담이었다. 그런 그녀가 먼저? ​ 국해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한 번은. ​ 꼭, 만나봐야 할 것 같다. ​ 그녀는 결심을 굳히듯, 손에 든 쿠키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와···."​ 입안 가득… 달콤하고 부드러운 생크림이 퍼져나갔다. ​ ​ ​ ​ ​ ​ ​ ​ ​ *** ​ ​ ​ ​ ​ ​ 그날 저녁,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허공에 떠 있는 반투명한 시스템 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 [루나] [PINNED] [현재 상태: 침실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현실을 외면하는 중. 정신적으로 매우 창피한 상태. 자신의 정체를 들킴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중.] [메인 스탠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침대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함.] ​ 사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감정은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다소 묵직한 주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 그녀의 모든 감정은 수치심과 창피함이라는, 훨씬 더 다루기 쉽고 명확한 감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 만성 질환을, 일시적인 급성 질환으로 바꾼 것이다. ​ 치료의 첫 단계로는 더할 나위 없다. ​ 그때, 시스템 창이 깜빡이며 그녀의 상태가 바뀌었다. ​ [현재 상태: 회사로 향하는 중. 단, 그 상담사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느낌. 조우 시, 즉시 토끼굴 사용 예정.] ​ 도착했다면, 슬슬 팀장에게 전해 둔 나의 선물을 전달 받았을 것이다. 나는 시스템 창을 계속 주시했다. ​ 이게 상담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만약, 내담자가 상담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방법이 없다. ​ 그리고 잠시 후, 기다렸던 변화가 일어났다. ​ - 치지지직! ​ [루나] [PINNED] [현재 상태: 혀에서는 정신을 놓을 정도의 달콤함이, 눈과 머리에서는 낯 뜨거움과 함께 심장이 몽글몽글해지는 감각이, 여러 복합적인 감각이 그녀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메인 스탠스: ‘진짜 한 번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됐다.” ​ 나는 허공에 떠 있던 시스템 창을 닫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이 정도면 충분하다. ​ 경계심 가득했던 상처 입은 토끼가, 마침내 만들어둔 통발에 제 발로 뛰어들었다. 미끼는 아마도… 생크림 쿠키? ​ 이제 남은 것은, 이 겁에 질린 토끼를 치료하는 일. ​ 지금부터 수의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 “제국과 수인.” ​ 나는 퇴근길에 협회 자료실에서 받아 온, 규정된 세계: 제국에 대한 두꺼운 논문들을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았다. 이 서류들로 제국의 역사, 사회 구조에 대한 공식적인 지식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공식적인 정보를 채웠다면, 비공식적인 정보 또한 필요했다. ​ 나는 컴퓨터를 켜고, 익숙한 사이트로 접속했다. ​ [헌터 갤러리] ​ 온갖 억측과 정보. 때로는 날것 그대로의 진실이 뒤섞여 있는 혼돈의 공간. ​ 나는 검색창에 수인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했다. ​ 수백 개의 게시글이 화면을 채웠다. ​ 그리고 그중 한 게시글이 내 이목을 끌었다. ​ [제목: 토끼 수인의 발정기가 실제 토끼의 발정기인 365일로 동일한 과학적인 이유. fact] ​ “…….” ​ 이거…. ​ 맞는 거겠지? ​ 나는 짧은 고뇌 끝에, 결국 혼란스러운 토끼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