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른한 주말의 저녁. ​ “흐으… 흐….” ​ 진세아는 자신의 펜트하우스 거실, 거대한 통유리로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있었다. 방금 막 격렬한 운동을 마친 참이다. ​ 기분 좋은 근육통과 함께, 솜털에 맺힌 땀이 식으며 서늘한 쾌감이 전신을 감쌌다. ​ 그때였다. ​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익숙하면서도… 조금 다른 시선이 느껴진다. 그녀는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즉시 알아챘다. ​ - 파지지지직! ​ “앗… 깜짝 놀랐네.” ​ 그녀의 눈앞, 허공에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드러났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와 기호들이 노이즈와 함께 발광하고 있었다. ​ [진■■] [■I■NED?] [현재 ■태: 전■적 ■성■ ?…?…] [메■ ■탠■ : ■■■ ■■■ ■■] [???!?!!?!????] “휴….” ​ 상시 방어를 켜놓길 잘했다. ​ 시스템은 그녀의 내면을 그대로 투영하며 필사적으로 점멸했다. 진세아는 공중에 떠 있는 시스템 창으로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길을 감지한 시스템은 필사적으로 빛을 터뜨리며 저항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상대는 고작 저항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 진세아는 놀라움을 느꼈다. ​ “선우 어빌리티 각성했어?” ​ 그녀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속박당한 채 버둥거리는 시스템을 보며, 장난기가 어린 미소를 지었다. ​ 이걸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지. ​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가볼까. ​ 그녀는 허공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시스템 창이 종잇장처럼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 - 으저저적… 저적…. ​ 진세아의 하얀 손끝에서 피어난 고압의 마력 전류가, 시스템을 강제로 해체하고 데이터를 강제로 재조립했다. 깨져 있던 문자들을 하나씩 떼어내 예쁘게 배열하고, 순수하고 무해한 문장들을 새겨 넣는다. ​ [진세아] [PINNED] [현재 상태: 휴식 중! 심리적으로 완전 평안, 극도로 안전하며 절대 무해한 상태!] [메인 스탠스: 주말이 가는 것이 싫음!] 그녀가 만들어낸 완벽한 거짓 정보. 그것이 화면에 떠오르는 순간, 시스템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경고: 본 시스템은 모든 정보 조작 행위를 엄중히 규탄합니다 !!] [!! 경고: 본 시스템은 모든 위해 행위를 멈출 것을 강하게 요청합니다 !!] ​ 시스템 창 전체가 새빨갛게 물들며, 필사적으로 경고 메시지를 뿜어냈다. 진세아는 그 경고를 향해 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 “으응… 그건 싫어.” ​ 그녀는 자신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방금 저지른 행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너무 부끄럽단 말이야….” ​ 자신의 속내를 그에게 들킬 뻔했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간질거리고 두근두근 뛴다. ​ 그러다 느껴지던 기시감이 사라졌다. 그가 능력 사용을 멈춘 것이다. ​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대한 통유리 앞으로 다가섰다. 아득하게 펼쳐진 반짝이는 서울의 야경. ​ 그녀의 금빛 눈동자는 오직 한곳만을 향했다. ​ 유독 선명하게 보이는 검은 오피스텔 건물. ​ “…….” ​ 저곳은 진세아가 유선우에게 추천해 준 집이었다. ​ ‘보안이 철저하고 상담소랑도 가까우니 좋아.’ 라고. 물론 진짜 이유는 이거였다. ​ 그때, 창가의 불빛이 툭하고 꺼졌다. ​ 그의 하루가 끝났으니, 이제 그녀의 하루도 끝낼 시간이었다. ​ “잘 자.” ​ 진세아는 건물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 그리고, 그녀도 방의 불을 껐다. ​ ​ ​ ​ ​ *** ​ ​ ​ ​ 월요일의 이른 아침. 도시가 막 잠에서 깨어나는 시각. 새벽의 공기가 창문을 통해 상담실로 들어온다. ​ 나는 프린트에서 출력한 A4 용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 [금일 상담소는 오후부터 진료합니다. 방문에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 나는 유리문에 그것을 반듯하게 붙였다. 오늘 오전 상담은 없다. ​ 아침부터 바로 유니온 길드로 향하기로 했거든. 내 첫 번째 왕진. ​ 본격적으로 찾아가는 상담사의 시작이었다. ​ 유니온 길드. ​ 이방인 연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갖 규정된 세계에서 넘어온 이방인들의 요람 같은 곳이다. 창천맹도 마교에도 속하지 않은 중원의 무인, 제국의 기사, 심지어 수인까지. 각기 다른 상식을 가진 이들을 상대해야 한다. ​ 아마… 길드의 인구 분포상 가장 비율이 높은 건 역시 제국일 것이다. ​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어빌리티를 활성화했다. ​ [루나] [PINNED] [현재 상태: 출근 준비 중, 그래도 오늘은 임무가 없어서 다행….] [메인 스탠스: 출근 시러. 시러. 시러!!!] ​ 겉으로는 성실하게 일어난 사회인의 모습이지만, 속마음은 월요일 아침을 맞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었다. 오늘 임무가 없는 이유는 상담 때문일 거고. ​ 나는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 ​ ​ *** ​ ​ ​ 월요일 아침의 길드의 라운지란, 루나에게 있어선 강한 소음과 짜증남이 가득한 공간일 뿐이다. ​ 헌터들을 위해 제공되는 값비싼 원두는 쓴 물일 뿐이며. 인체공학적이라는 소파는 허리를 불편하게 찌른다. ​ 길드의 대표 이방인 헌터이자, 길드의 얼굴. ​ 루나. ​ 그녀는 만성적인 두통에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맞은편에 앉은 길드의 관계자, 최수호를 노려봤다. ​ “무슨… 상담이요?” ​ “정신 상담.” ​ 최수호의 건조한 대답에, 루나의 미간이 한층 더 깊게 구겨졌다. ​ “싫어요.” ​ “나도 싫어…. 근데 길드장님 직속 명령이래.” ​ 최수호는 피곤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 오늘 간만에 계획된 임무가 없기에 안심했었다. ​ 그런데 대체 무슨 상담? ​ 어쩐지 라운지에 길드의 문제아들만 앉혀놨더라. ​ 유니온 길드는 명확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루나처럼 상담을 교묘하게 피해 가는 이들을 골라내기 위해, 일부러 당일 아침에 통보하는 방식을 택했다. ​ 게다가. ​ “헌터 전문 상담사란다. 우리 길드에 제일 처음으로 와주는 거래.” ​ 그 말을 듣는 순간, 루나의 붉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 헌터 전문 상담사. 그 사람이라고? ​ 알고 있었다. 일주일 전, 그녀는 이미 그를 찾아갔었으니까. ​ 그 전날은 유독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그래서 루나는 연차를 쓰고,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상담소를 찾아갔다. ​ 일단 한 번 들어나 보고, 만약 좋으면… 그녀도 한 번 받아볼까 해서. ​그리고 가장 깊숙한 구석 자리에 앉아, 클로킹을 펼쳤다. ​ 그녀의 뛰어난 청력은 상담실의 모든 소리를 빨아들였다. ​ 다른 헌터들의 고민, 그리고 그에 대한 상담사의 대답. 그의 방식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싹텄다. ​ 그래서, 조용히 듣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 ​ [클로킹이 강제 해제됩니다!] ​ ‘뭐라고?’ ​ 자신을 감싸고 있던 은신의 장막이 강제로 찢겼다. 그리고 의사 가운을 두른 남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 “혹시… 환자분?” ​ 그대로 들켰다. 이렇다 할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상담사에게. ​ 결국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도망쳤다. 너무 창피해서. ​ 그리고 상담은 포기했었다. ​ 그런데. ​ 그 남자가, 이곳으로 직접 찾아온다. ​ “아아아아아…….” ​ 루나는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 그러자 눈앞의 최수호가 그녀를 진정시켰다. ​ “진정해. 분명 좋은 상담사일 거야.” ​ 안다. 나도 안다고. ​ 그의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헌터의 트라우마를 몇 마디로 진정시키고, 박수가 나올만한 기가 막힌 해결책을 제시하더라. ​ 근데. 아는데. ​ “아…….” ​ 그 모든 것을 알기에, 더 가기가 싫었다. ​ 애초에 그녀가 처한 이 상황은…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 따라서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는. 자신의 클로킹을 강제 해제한 그를 맞이할 창피함이 더 클 뿐이었다. 그녀의 출신지, ‘제국’에서 펼친 마법이 강제 해제 당했다는 것은··· 그런 뜻이니까. ​ “루나님!” ​ 그때, 라운지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길드 매니저였다. ​ “가실까요?” ​ 모든 퇴로가 막혔음을 깨달은 루나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녀는… 상담실로 질질 끌려갔다. ​ ​ ​ ​ ​ ​ *** ​ ​ ​ 유니온 길드에서 나를 위해 마련해 준 상담실은 꽤나 쾌적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내 맞은편에 앉은 유니온 길드의 인사팀장은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와 있다. ​ 상담이 필요한 건 이 사람이 아닐까. ​ “뭐… 뭐 이렇게 많아요?” ​ 그러나 나는 유니온의 명단을 받아들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면에는 스무 명이 넘는 헌터들의 프로필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 첫 왕진이다 보니 협회와는 분명 양보다는 질에 집중하기로 합의했었다. 따라서 길드에서 반드시 원하는 이들만 선별하기로 했는데…. ​ 유니온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을 제시했다. ​ - 쾅! ​ “부탁드립니다, 상담사님….” ​ 눈앞에서 매니저가 머리를 박았다. ​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듯했다. 헌터 관리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담소는 오후에도 오픈하지 못할 것 같다. ​ 헌터들의 명단을 쭉 내리다. 한 명을 발견했다. ​ “이분부터 시작할까요.” ​ 내가 가리킨 이름을 보자. 매니저의 표정이 밝아졌다. ​ [루나] ​ “넵. 바로 모시겠습니다….” ​ 팀장은 환한 얼굴로, 황급히 상담실을 뛰쳐나갔다 그의 뒷모습에서, 루나라는 이름이 이 길드에서 얼마나 다루기 힘든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 - 끼이익…. ​ 마침내, 문이 아주 느리게 열렸다. ​ 문틈으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 백발의 미인. ​ 루나는 문 앞에서 그대로 멈춰섰다. 다가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 나는 그녀의 그 모든 경계심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 저번 주, 그녀는 클로킹이 벗겨진 채 당황하며, 나를 마주치자마자 도망쳤다. ​ 그렇다면 내가 지금 취해야할 태도는 단순하다. ​ “처음 뵙겠습니다.” ​ 그녀의 기억. 그 모든 것을, 내가 먼저 지워주기로 했다. ​ 지난 일을 없는 것으로 하겠다. 너와 나는 오늘 처음 만났으며, 나는 너의 그 부끄러운 과거를 전혀 모른다. ​ 아예 그녀의 관계를 새로 시작해, 루나의 심리적 저항을 지워버리고자 했다. ​ 그러자 그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루나의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아주 작게, 간신히 열렸다. ​ “아··· 네… 안녕하세요···.” ​ 그녀는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 ​ 그리고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의자 끝에 위태롭게 걸터앉았다. ​ 좋다. 시작 자체는 나쁘지 않다. 최소한 대화가 가능한 테이블 위에는 올려놓았다. ​ 이제, 확인할 차례다. 그녀의 문제는… 뭘까. ​ 나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 보며, 조용히 능력을 사용했다. ​ [루나] [메인 스탠스] [제국의 일원, 수인(獸人)의 일원. 그 정체성 사이에서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90%] [그녀의 정체성을 찾아주십시오.] ​ 나는 시스템이 제시한 문장을 읽고, 의문이 생겼다. ​ 수인? ​ 무슨 수인…. ​ 내 앞에 있는 그녀는 누가 봐도 인간이었다. 동물의 무언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 바로 그때였다. ​ [경고: 인식 저하(B급)이 당신의 시야를 교란합니다.] ​ 저번 주에 봤던 메시지가 또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투명한 상태가 아니다. ​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능력은 자동으로 작동했다. ​ [상태 이상: 인식 저하 (카모플라주)에 저항합니다. 강제 해제를 시도합니다.] ​ [카모플라주(B) 강제 해제 성공.] ​ 뭘 해제했다는 거야. ​ 세상은 똑같아 보였다. ​ 나는 의아함에 시선을 돌리다… 문득, 내 눈동자가 멈췄다. ​ “…….” ​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 위에 고정됐다. 루나는 내 눈빛이 향하는 곳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똑같이 위를 바라봤다. ​ 그녀의 머리 위. ​ 백발 사이에서, 길고 하얀색의 한 쌍의 무언가가 솟아나 있었다. 안쪽으로는 옅은 분홍빛이 비치는, 솜털로 뒤덮인, 탐스러운 귀. ​ 그러니까. ​ 토끼 귀가. ​ 그녀도 발견했는지 양쪽의 귀가 파르르, 하며 떨렸다. ​ 루나는, 천천히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손끝에, 익숙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있어서는 안 될 부드러운 감촉이 닿는 순간. ​ 그녀의 눈이, 미친 듯이 떨렸다. ​ “어? 어, 어?! 이게 왜?” ​ 루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귀를 두 손으로 감쌌다. ​ “안 돼! 보면 안 돼요!!” ​ 그러나, 그녀의 작은 손바닥으로 그 길고 큰 귀가 가려질 리는 만무했다. ​ ‘아.’ ​ 나는 속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