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설유월은 극한의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몸을 푸는 것은 평생을 반복한 습관이었다. 텅 빈 방 안이었지만, 그녀는 손에 검이 있는 것처럼 수백 번 허공을 갈랐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온몸이 기분 좋게 비명을 지를 때까지. ​ 그렇게 아침의 수련이 끝났다. 어머니가 넣어 주신 서적 또한 잘 읽었다. ​ [여성으로서의 바람직한 몸가짐 21선] ​ 중원의 서적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모양새. ​ 그 서적의 내용 또한 중원의 서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덜 엄격한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 그것마저 다 읽고 나니 정말로 할 게 없었다. ​ 의원님이 직접 오시는 것은 목요일. 지나가는 직원에게 확인까지 마쳤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 즉, 내일이라는 소리인데…. ​ “윽….” ​ 그녀는 소파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어떻게 기다리지. ​ 최근까지만 해도 하루하루가 너무나 짧고, 또 신기한 것들로 가득했다. ​ 의원님의 손을 잡고 걸었던 거대한 시장. 의원님이 떠먹여 주었던 달콤한 음식. 편하지는 않았지만, 의원님이 좋아해 준 새로운 의복까지. ​ 그러나 그가 없는 이 방안은 폐관수련의 동굴과도 같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 결국 또다시 소파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다, 손끝에 딱딱하고 길쭉한 무언가가 잡혔다. ​ ‘이것을 누르면… 이렇게, 빛과 소리가 나올 겁니다.’ ​ 며칠 전 직원이 물건을 설명해주며 알려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설유월은 반신반의하며, 손에 쥔 길쭉한 도구의 붉고 큰 버튼을 꾹 눌렀다. ​ - 삑. ​ 바로 그 순간, 벽의 검고 커다란 칠판이 눈 부신 빛을 뿜어냈다. 화면 속에서는 하얗고 동그란 강아지 수십 마리가 푸른 잔디밭 위를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있었다. ​ “헤에….” ​ 귀엽다. 작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 무해하고 평화로운 모습에 설유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중원 여성이든 현대 여성이든 귀여운 것에는 사족을 못 쓴다. ​ 그렇게 설유월은 바보상자 속의 세상에 깊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 그러나, 그때. ​ - 띠링! 띠링! ​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귀엽던 강아지들이 사라지고 화면 가득 붉고 무서운 글씨들이 나타났다. ​ [긴급 속보] ​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 속보입니다. 대한민국 1호의 헌터 정신 상담사 유선우 씨가 오늘 오전, 근무지인 해태 길드에서 실종되어… 현재, 정황상 납치된 것으로…. ​ 설유월의 미소가 굳었다. ​ “의원… 님…?” ​ 유선우… 상담사?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화면 속에는 의원님의 얼굴이 떠 떠올라있었다. ​ 의원님이 납치당했다고? ​ - 툭. ​ 그녀의 손에서 힘없이 리모콘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 ​ ​ ​ ​ *** ​ ​ ​ ​ ​ ​ ​ ​ 나는 진세아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사과를 깎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해줄 게 있다며 자신 있게 가져왔길래 뭔가 했더니…. ​ “그러니까 위재완 팀장도… 아 잠시만… 익… 익….” ​ 내 앞에서 용을 쓰며 사과와 씨름하고 있다. ​ 그녀는 S급 헌터답게 손에 쥔 과도는 아주 능숙하게 다루었다. 하지만 찌르고 베는 것은 몰라도, 정작 사과를 깎는 데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 ​ 껍질보다 과육이 더 많이 잘리는 것 같은데. ​ 나는 이러다 진세아가 사과 전기구이를 만들지는 않을까 싶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 “… 그냥 나 줘.” ​ 나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사과와 과도를 뺏어오다시피 가져왔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껍질을 깎아냈다. ​ 껍질을 깎으며 진세아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팀장님이 먼저 당했다고.” ​ “응.” ​ 백시은은 자신의 계획을 위해 내부의 조력자를 만들려 했고. 위재완 팀장을 꼭두각시로 만든 모양이었다. 그는 진세아를 적절한 타이밍에 밖으로 불러내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 지금 그 또한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고 한다. ​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납치당한 것은 나지만 피해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 - 사각사각. ​ 나는 사과를 전부 토끼 모양으로 깎아냈다. ​ “됐다.” ​ 그중 가장 예쁘게 깎은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진세아에게 넘겼다. 그러나 진세아는 포크를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먹여달라는 무언의 시위. ​ “네가 환자야?” ​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 ​ 결국 원하는 대로 입가에 넣어주었다.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사과를 맛있게 받아먹는다. ​ “어휴.” ​ 바로 그때, 병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사과를 오물거리는 진세아를 잠시 내버려 두고 문 쪽을 향해 대답했다. ​ “네, 들어오세요.” ​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담당 간호사였다. 그녀는 손에 든 패드를 보며 내게 정중히 물었다. ​ “환자분 괜찮으시다면 잠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환자분의 면회를 기다리는 대기자분들이 있으셔서요.” ​ 면회 대기자? 나한테 면회를 올 사람이 있었나. 그리고 면회를 올 것도 없다. 당장 오늘 저녁 퇴원일 것 같다던데…. ​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네… 괜찮긴 한데….” ​ 그러나 간호사는 패드를 손가락으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 “우선 이서령 님이라고… 혹시 아시는 분 맞으십니까?” ​ “아, 네. 뭐 맞습니다.” ​ 이서령은 아는 사람이긴 하다. 단지 그녀가 직접 내 쪽으로 면회를 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 설유월을 책임지고 있는 상담사니까 겸사겸사 온 것 같다. ​ “그리고… 루나 헌터와 엘리스 헌터님도 와 계십니다. 이분들도 아시는 분이신가요?” ​ “아… 네 그분들도 맞습니다.” ​ 루나와 엘리스도 찾아온 모양이다. ​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 “그래도 될 것 같긴 한데….” ​ 나는 옆의 진세아를 바라봤다. ​ 이서령과 루나 엘리스는 내 내담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녀가 나가는 편이 대화하기에 매끄러울 것 같았다. ​ 방금 전까지 사과를 아삭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그녀는 씹고 있던 사과를 천천히 삼켰다. ​ “… 좀 이따가 올게.” ​ 그녀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 역시 그녀는 눈치가 빠르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쌩하고 나가버렸다. ​ “네, 괜찮을 것 같아요.” ​ 나는 간호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 ​ ​ *** ​ ​ ​ ​ ​ ​ 한편, 면회 대기실. ​ “…….” ​ 오후의 햇살이 창문 밖에서 쏟아졌지만, 대기실의 공기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 세 명의 여성은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 엘리스는 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저희도 환자분께 직접 물어봐서 확인하면 되는 거잖아요?!’ ​ 만약 조금 전, 언니의 슈퍼 세이브가 없었으면 두 사람은 꼼짝없이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엘리스는 그런 루나의 엉덩이를 소파 밑으로 톡톡, 두들겨줬다. ​ “읏….” ​ 고맙다는 무언의 감사인사였다. 사실 엘리스의 원래 성격이었다면 저 이서령이라는 사람이 나타나기 전부터, 당돌하게 요구했을 것이다. 확실히 아는 사이라며. ​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 이상하게 선생님과 관련된 일이면 소극적이고 보수적으로 변하게 된다. ​ 만약 아는 사이라고 소리쳤다가 괜히 거절당하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물론 선생님이 그렇게 매몰차게 굴리는 없겠지만…. ​ 그래서 더 놀라웠다. ​ 원체 소심하고 남에게 피해 끼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루나 언니에게, 방금 전의 그 행동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 확실히 언니는… 바뀌었다. 이 변화는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 그녀와 가장 가깝고, 또 가장 오래 봐온 엘리스만이,눈치챌 수 있는 변화였다. ​ 그 변화가 시작된 시점을 엘리스는 되짚어봤지만…. 역시 하나밖에 없었다. ​ ‘선생님….’ ​ 엘리스는 그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애써 깊게 고민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그녀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 바로 그때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한 명의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 “이서령 보호자님?” ​ “네.” ​ 그때, 한 간호사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 “환자분께서 지금 면회할 수 있으시다고 합니다. 사실 오늘 바로 퇴원하실 예정이라 정식 면회 시간은 따로 없어서요. 짧게만 부탁드리겠습니다.” ​ 오늘 퇴원. 이서령, 루나, 엘리스는 동시에 안심했다. ​ 어디 다친 곳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 “네. 알겠습니다.” ​ 이서령은 자애롭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병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 병실의 문이 열렸다. ​ 이서령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침대에 반쯤 기대어 앉아 있던 유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상체를 일으키려 애썼다. ​ - 후닥닥. ​ 이서령이 다급한 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지그시 붙잡았다. ​ “부디… 그대로 앉아 계셔주세요….” ​ “아… 네.” ​ 유선우는 주춤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서령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그리고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기 시작했다. ​ 조금 창백해진 낯빛과 피곤함이 짙게 배어있는 눈가. ​ 그러나 그녀가 걱정했던 공포나 절망의 감정들은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이서령에게는 그것이 천금보다 더한 위안이 되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유선우였다. ​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유선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 “아닙니다.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더 빨리 찾아뵙지 못한 것이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충분히 감사하네요.” ​ 그 말에 이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 그녀의 머릿속에 오전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 [아내는 지아비의 옥체를 자신의 목숨보다 귀히 여겨야만 한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구구절절한 대화가 아니었다. ​ 여기서는 무언가 더 대화를 나누기보다, 그에게 휴식 시간을 보장해 주는 것이 훨씬 바람직해 보였다. 이곳에서 더 머무르는 것은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 그의 평온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 이서령은 수줍은 얼굴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 “무사하신 것을 확인하였으니,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 그녀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 그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지아비의 단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현숙한 아내처럼. ​ - 찰칵. ​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그녀가 남기고 간 난초 향이 맴돌았다. ​ “… 으응?” ​ 유선우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 ‘방금 뭐였지?’ ​ 약간 당황했지만, 생각할 틈은 없었다. ​ - 똑똑. ​ 누군가가 연속적으로 또 문을 두들겼다. 다음 방문자가 온 것이다. ​ “네, 들어오세요.” ​ 병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 그리고 이번에는 둘이었다. ​ 루나와, 엘리스. ​ 두 마리의 토끼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거기서 뭐 하세요?” ​ 유선우는 의문을 담아 고개를 쭉 뻗어 바깥을 바라봤다. ​ “선생니임….” ​ 루나와 엘리스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슬픈 표정으로 유선우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외관상으로 보이는 상처는 전혀 없었다. ​ 다소 피로해 보이기는 했지만. ​ “루나님이랑 엘리스님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아시고 다들 찾아와 주신 건지 모르겠네요….” ​ 유선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그녀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 “아니에여….” ​ 먼저 대답한 것은 엘리스였다. ​ “몸은… 정말 괜찮으세요?” ​ 루나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그 순간에도 유선우의 얼굴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 혹시나 상처가 있지는 않은지. ​ "네, 괜찮습니다. 오늘 저녁에 바로 퇴원하기로 했거든요.” ​ 유선우는 그런 그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 지었다. ​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습니다.” ​ 그 말에 두 토끼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바로 그때 유선우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를 집어 들었다. ​ 접시 위에는 진세아가… 아니 유선우가 깎은 토끼 모양의 사과 조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 “토끼입니다. 귀엽죠?” ​ 그는 웃으며 그녀들에게 이쑤시개로 사과 조각 하나씩을 찍어 건넸다. 토끼에게 토끼를 건넨 꼴이다. ​ 하지만 두 자매의 눈은 그 순수한 호의가 아닌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 유선우는 마지막 남은 토끼 한 마리를 길고 뾰족한 이쑤시개로 천천히… 깊숙이 꿰뚫었다. ​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 두 자매의 붉은 눈동자가 멍하니 그 모습을 쫒았다. ​ - 아삭. ​ “맛있네요.” ​ 유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의 맛에 감탄했다. ​ 그러나. 두 토끼는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그녀들의 귀에는 ‘맛있네요.’라는 소리만이 맴돌았고. ​ 눈에는 유선우가 토끼를 맛있게 먹는 것만이 보였다. 토끼들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