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흐음….” ​ 자화연은 놈들의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낯선 주소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금강 또한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위치는 도심에서부터 꽤나 떨어진 한적한 들판이었다. 드문드문 별장처럼 보이는 호화로운 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 ​ 하지만. ​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녀가 예상한 것과 조금 달랐다. ​ - 에에에에에에에에엥!! ​ 일대를 뒤흔드는 마력 재난 경보 사이렌. 그리고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어두운 밤처럼 변해있었다. ​ “…….” ​ 게다가 저 상공에. ​ - 찌르르르르…. ​ 검은 구름 사이로 푸른 번개가 뱀처럼 꿈틀거린다. 자화연은 눈을 가늘게 떠 그 대상을 확인했다. ​ “… 허.” ​ 수만 가닥의 번개가 서서히 모여든다. 한 여성의 손으로. 마치, 거대한 창처럼. ​ - 찌르르르르…. ​ 자화연은 그 기묘한 풍경을 잠시 서서 바라보았다. 일전에 의원과 함께 있을 때, 그의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내공을 희미하게 느낀 적이 있다. ​ 이 세계에서는 마나라고 하는… 종류의 힘. ​ 그때는 무엇인가 했었는데…. ​ 바로, 저 마나였다. ​ 즉, 저 여인은 처음부터 의원을 지키는 호법사자였다는 뜻. ​ 목적이 비슷하다면, 막을 이유는 없다. ​ 자화연은 눈을 감고, 손을 뻗었다. 그녀의 발밑에서부터 칠흑 같은 어둠의 기운이 파도처럼 솟아올라 일대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암막(暗幕). ​ 사납게 여러 갈래로 터져 나오는 번개들의 소리와 빛이, 근처에 그녀의 장막에 가로막혔다. ​ 그러자, 사이렌의 소리 또한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에서는 어떠한 공격도, 그 누구도 나갈 수 없으며 또한, 어떠한 이들도 들어올 수 없다. ​ “제법 쓸만한 호법을 두었구나.” ​ 상공을 바라보는 자화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 한편, 그 주택의 상공. ​ 진세아는 눈을 감은 채 하늘의 모든 전하를 자신의 손끝으로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삐쭉삐죽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 쿠르르릉…. ​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 느껴진다. ​ 저기 아래에, 선우가 있다. 저 저급하고 더러운 암컷의 소굴 안에, 선우가 있다. ​ 단번에 꿰뚫는다. ​ 유선우는 번개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애초에 그녀의 번개가, 유선우를 적으로 인식하는 일 따위는…. ​ 아마 그녀가 죽는 그날까지 없을 테니까. ​ - 쿠르르르릉!! ​ 마침내 모인 전하들이 그녀의 손끝에서 하나의 형태로 응축되었다. ​ 거대한 창의 형상. ​ [뇌창(雷槍)] ​ - 찌르르르르르르르!! ​ 하늘 전체가 비명을 지른다. 진세아는 그 창에, 무언가를 더했다. ​ 단번에, 땅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의지. ​ [벙커버스터(Bunker Buster)] ​ 그리고 뇌후는…. ​ - 콰과과과광!! ​ 그 창을 지상을 향해 내리꽂았다. ​ ​ ​ ​ ​ *** ​ ​ ​ ​ ​ “안 들려?” ​ 유선우는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야 속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약효가 한계까지 다다랐다. ​ 그와 그의 신체는 이성을 상실하는 것 대신, 정신을 잃는 것을 선택했다. 정신력의 발현이었다. ​ “천둥소리가.” ​ 백시은이 천장을 바라보는 표정이 점점 굳기 시작했다. ​ ‘왔구나….’ ​ 동시에 유선우는 극도의 안도감으로 인해 순식간에 긴장감이 풀렸다. 붙잡고 있던 마지막 동아줄을 놓아버렸다. ​ - 쿠르릉…. ​ 번개가 치는 소리. 해태의 길드원이라면. ​ 아니, 그냥 이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면. ​ 대한민국에서 이런 종류의 번개를 다룰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진… 세아…?” ​ 백시은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대체 어떻게… 여기를… 이렇게나 빨리….” ​ 그녀의 완벽했던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 백시은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 그리고. ​ - 타닥!! ​ 그녀는 침대 너머 벽에 걸린 두꺼운 커튼을 거칠게 걷어냈다. 그 뒤로는 붉고 기이한 빛을 내뿜는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 정확히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도주용이 아닐까. ​ 그녀는 마법진의 중심으로 달려가 자신의 마력을 미친 듯이 쏟아붓기 시작했다. ​ - 주우웅…. ​ “빨리, 제발… 빨리!!” ​ 백시은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 ‘막아야… 하는데….’ 유선우는 점점 침잠해가는 시야 속에서 손을 뻗으려 했다. ​ “됐…!” ​ 백시은이 활짝 웃으며 마법진을 건드는 순간. ​ - 치지직…. ​ 붉게 타오르던 마법진의 빛이 잿더미처럼 검게 죽었다. 그리고 그 죽어버린 마법진의 중심에서부터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 그 어둠 속에서 한 명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검은 생머리에 검은색 무복. ​ 자화연. ​ 천마였다. ​ “쥐새끼가 밖으로 나가려 하길래, 강제로 비집고 들어와 봤는데….” ​ 그녀는 붉은 비단으로 치장된 방 안을 경멸하듯 훑어보았다. 자화연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 “… 더럽구나. 내 의원이 있을 곳은 아니야.” ​ 백시은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검게 타버린 자신의 마법진을 매만졌다. ​ “이… 이게 왜….” ​ 바로 그때였다. ​ - 쿠르르르르르릉!! ​ 천장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욱 커졌다. 이제는 건물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 자화연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녀는 망설임 없이 유선우의 곁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녀의 소매에서 흘러나온 어둠이 자화연과 유선우를 완벽하게 감쌌다. ​ “천마… 님….” ​ 유선우는 흐려져 가는 시야로, 자화연을 불렀다. ​ 하지만 대답할 틈은 없었다. ​ - 슈우우우우웅…. ​ - 두우우우웅… 콰과과과광!! ​ 세상이 하얗게 불타올랐다. ​ 유선우는 자화연이 펼친 장막 속에서 일대가 먼지가 되는 장면을 눈에 담았다. ​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세상이 하얗게 변한 후, 가장 먼저 들려오는 것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였다. ​ - 콰과과과광!! ​ 천둥소리 사이로 누군가의 비명이 처절하게 섞여들었다. 자화연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 번개는 금방 멎었다. ​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자화연은 고개를 내렸다. ​ 충분히 지하실이었던 것 같은데, 바닥 밑에 지하실 있다 하던가. 마법진을 더듬거리던 백시은은 새까맣게 타버린 상태로 저 밑에 꽂혀 있었다. ​ 죽지는 않았다. 차라리 죽었다면 고통 없이 갔겠지만… 안타깝게도 힘 조절이 완벽했다. 남아 있는 번개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백시은을 태우고 있었으니까. ​ 이후에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뻥 뚫린 천장 위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먹구름이 걷히고 평온을 되찾은 하늘이 보였다. ​ 그녀와 유선우를 감싸고 있던 어둠의 장막을 제외하면 건물과 그 건물이 서 있던 땅은 통째로 증발해버렸다. ​ 그리고 햇살 사이로. 한 명의 여인이 천천히 내려왔다. ​ 금빛 눈동자에 회색으로 긴 머리칼. ​ 백시은은 뇌창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전기구이가 되어, 바닥에 쳐박혀 있었다. ​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백시은 따위가 아닌 유선우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의자에 묶여있는 채로 기절해 있다. ​ 옷은… 아침에 입고 있던 그대로다. 어디, 다친 곳도 없어 보인다. '다행이다.' ​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몸을 휘감던 살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 진세아는 지상으로, 아니 지하로 재빠르게 내려갔다. 그리고 자화연과 의자에 앉아있는 유선우를 향해 걸어갔다. ​ 그녀는 유선우를 감싸고 있는 자화연의 검은 장막을 보았다. ​ 진세아는 그녀가 유선우를 지키기 위해 장막을 펼친 것 같다고 판단했다. 물론 진세아의 번개가 유선우를 헤칠 일은 없으니… 그러지 않아도 됐겠지만. ​ 게다가 일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 천마(天魔). ​ 선우의 첫 번째 내담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저렇게 강하고 콧대 높은 여인이 백시은 같은 버러지랑 손을 잡았을 리는 없었다. ​ 따라서. ​ 그녀는 진세아의 적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 진세아는 자화연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유선우에게 향했다. 형식적인 예의에 가까웠다. ​ 바로 그 순간. 자화연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비틀렸다. ​ “발칙한 짓을 했더구나.” ​ 진세아는 자화연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선우를 속박하고 있는 밧줄을 풀어냈다. ​ “아주 깊숙한 곳에 박아놨어.” ​ 자화연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의원도 아느냐?” ​ 진세아는 마침내 속박을 풀어낸 유선우의 몸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 - 우뚝. ​ 그러나 진세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보이지 않은 손이 그녀를 잡은 것처럼. ​ “의원도 아느냐 물었다.” ​ 그녀는 몸을 천천히 돌렸다. 진세아의 금빛 눈동자가, 자화연의 붉게 변한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 두 여왕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힌다. ​ 하지만 먼저 눈을 꾹 감은 것은 진세아였다. ​ 선우의 내담자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싸웠다가 진세아나, 그녀가 상처를 입는다면··· 그가 슬퍼할 것 같아서. ​ 그것만큼은 죽도록 싫었다. ​ 진세아는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 “네.” ​ '발칙한 짓'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위한 장치였다. 언제든 그가 위험에 빠졌을 때 알아챌 수 있도록. 그리고, 그를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도록. ​ 진세아는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나… 지켜줄 수 있겠어?’ ​ ‘…응.’ ​ 선우가, 진세아에게 그렇게 말했으니까. ​ 진세아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 “선우가 부탁했어요.” ​ 그리고,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그게 무엇이든.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