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서령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 물론 중원에 남존여비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쯤은,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던 사항이었다. 다만 그 정도가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을 뿐. ​ 모든 이방인들은 이곳에 와서 이 세계와 중원이 다른 점에 대해 교육을 받는다. 사상과 문화적인 배경의 차이로 발생하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 따라서 중원의 이방인들이 무언가 문제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 게다가 내가 처음으로 접촉한 중원의 집단은 마교. 천마 자화연의 호법이었던 금강도 그렇고, 관계 어디에서도 자신의 주군을 여인이라 얕보는 듯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 아마 지금 생각해 보면, 마교는 남녀의 구분보다 힘의 논리가 우선이었기에 가능했던 일 같지만…. 사도의 끝판왕인 마교에서조차 느낄 수 없었던 남녀차별을, 그들보다 더 정의롭고 고결하다고 알려진 정파에서는 만연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착각이었다. ​ 하지만, 그녀의 긴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 이서령은 설유월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 사실만은 확실하다. 다만, 그 사랑이 뒤틀려 있을 뿐. ​ 그녀에게 있어 설유월은 자신의 과거를 투영하는 거울이었다. 설유월이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겪게 하지 않겠다는 명목으로…. ​ 이서령은 그녀를 통제하고 있었다. ​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속에 쌓여 있던 많은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 또한 두 분의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 내 말에, 이서령의 서글펐던 얼굴 위로 희미한 안도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감화되었다고, 그리 믿는 눈치였다. ​ 그러나 나는 그녀가 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착각을 바로잡아주어야만 했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하지만 맹주님께서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 내 차가운 목소리에 그녀의 미소가 다시 굳었다. ​ “이곳은, 더 이상 당신이 살아왔던 그 지옥 같은 중원이 아닙니다.” ​ 나는 창밖의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의 야경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 이곳은 대한민국이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 “이곳에서는 여인은 노리개가 아닙니다. 남성의 보호가 없어도 얼마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맹주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렇다 하더라도…!” ​ 이서령이 본능적으로 반박하려던 그 순간. 나는 자연스레 호칭을 바꿨다. ​ “서령 씨가 딸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그 성벽이, 이제는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로운 세상을 가로막는 감옥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 그녀의 표정이 점점 더 침잠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두 번째. 이서령 씨의 딸인 설유월씨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과거를 인정해 주었다. ​ “그 잿더미 속에서 어린 유월 씨를 거두어주신 것은… 누가 보아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유월 씨 또한, 평생을 그리 생각하며 살아왔을 겁니다.” ​ 그 말에 그녀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 “그러나….” ​ 나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 “그렇다 하더라도 그 선행이 한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정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 내 마지막 말에 상담실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 이서령의 온화하던 미간이 아주 희미하게 찡그려졌다. 분노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평생 동안 지탱해온 신념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런 얼굴. ​ 그녀는 거의 애원하듯 더 슬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내 손을 부여잡았다. ​ “아닙니다… 의원님….” ​ 그녀의 뜨거운 온기가 내 손등 위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 “중원의 사내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세계의 법도에 맞춰 연기하고 있을 뿐. 그들의 뿌리 깊은 생각은,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 “그렇군요.” ​ 그녀는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라도 붙잡듯, 말을 이었다. ​ “따라서 제 딸이 그 짐승들로부터 안전하기 위해서는….” ​ 바로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 “그렇다면 서령 씨.” ​ 나는 내 손 등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들을 아주 천천히, 하나씩, 풀어냈다. 그리고 그 손이 도망치기 전에 다시금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 그녀의 눈이 내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람으로 커졌다. 나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그런 위험한 사상들을 가진 자들과 소중한 딸을 붙여놓지 않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보호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 “…….” ​ “그런데 왜 굳이 그 짐승들의 우두머리로 당신의 딸을 세우려 하십니까.” ​ 이서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내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 아주 약하게 버둥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 미미한 저항마저 이내, 스르르 힘이 풀렸다. ​ “이제는 그녀는 창천맹주라는 울타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아마 그녀도 은연중에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설유월에 대한 그녀의 보호 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 이 세계 홀로 오게 되면서 그녀의 유일한 목표이자 삶의 방향성이었던 설유월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 거대한 공허함과 걱정 속에서도, 그녀는 삶의 이유를 만들어냈다. ​ ‘혹시라도, 내 딸이 이곳으로 오게 된다면.’ ​ 그녀는 그 실낱같은 가능성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창천맹이라는 거대한 성을 쌓았다. 그리고 그 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오직 딸을 위해 다시 맹주가 되었다. ​ 그리고 마침내 설유월이 나타났다. 그녀의 유일한 목표이자 살아가는 이유가 멀쩡하게,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 그녀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 다만, 그녀가 딸을 위해 지은 완벽한 감옥이 다소 시대착오적이었을 뿐. ​ “흑….” ​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아주 작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이서령은 결국 흐느끼기 시작했다. 기댈 곳을 찾듯, 내게 붙잡혀 있던 그녀의 손이 오히려 내 손을 필사적으로 꽉 맞잡아왔다. ​ 이서령은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쉴 새 없이 흑옥 테이블 위로 떨어뜨릴 뿐.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이 원하는 바를 들어줬을 뿐. ​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나는 앞으로의 대화 목표를 명확히 세웠다. ​ 이 기묘한 모녀 관계는 사실 일방적인 의존이 아니었다. 설유월이 어미에게 의존하는 만큼, 역설적으로 이서령 또한, 지켜야 할 딸인 설유월에게 지독할 정도로 의지하고 있었다. ​ 따라서 이서령의 그 뒤틀린 의존을 먼저 끊어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치료법일 터. ​ 그렇다면, 그 방법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데…. 지금 바로 무언가를 더 할 수는 없다. ​ 이서령에게도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단번에 많은 변화를 요구하면 그 반동도 강해지는 법이니까. ​ 그때였다. 내 눈앞에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비정상적인 내담자의 접근을 확인했습니다!] ​ [사용자에게 시스템이 두 가지의 접근 방식을 제시합니다! (ノ´∩。• ᵕ •。∩)ノ ] ​ 응? 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 능력이 이런 식으로 선택지를 제시하며 말을 걸어오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 내가 처음 이 세계에 떨어져 능력을 각성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헤매던 시절. 시스템은 이런 방식으로 내게 도움을 주고는 했었다. ​ ‘좋아, 해봐.’ ​ 나는 간만에 향수를 느끼며 시스템의 말을 들었다. 실제로 당시 능력의 제안과 해결법은 늘 우수했었다. 이번에도 슬기로운 해결책을 가져올 것을 기대하며, 제시를 기다렸다. ​ [첫 번째입니다!] [남존여비 사상이 뼛속까지 박힌 중원 출신인 내담자 이서령에게 당신과의 완벽한 상하관계를 주입시킵니다! ] 뭐? [여인의 진정한 안식이자 기쁨은, 옥좌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사내의 비호 아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녀가 평생을 갈구했던 진정한 평온은 지배하는 것이 아닌 기꺼이 지배당하는 희열 속에 있다는 것을….] ​ 야. ​ [ (〃⌒▽⌒〃)ゝ] ​ 뭘 잘했다고 이렇게 해맑아. 미쳤어? ​ [ ( っ◞‸◟ς) ] ​ 대체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다 보니 아주 끝까지 간다. 이게 어딜 봐서 치료방법의 일종이라는 건지. ​ 얘가 진짜 요즘따라 상태가 이상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진지한 상담이 필요해 보이는데…. ​ 일단 들어보기나 하자. 두 번째는 뭔데. ​ 아직 녀석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 [두 번째 입니다!] 바로 신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평온을 사용자가 직접 만들어주는 겁니다.] [내담자 설유월에게는 그녀가 평생을 갈구했던 다정한 아버지가 되어주십시오. 그리고 내담자 이서령에게는… 그녀가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다정하고 믿음직한 지아비가 되어주는 겁니다.] [한낮에는 딸의 머리를 빗겨주고, 늦은 밤에는 따스한 이불 속에서 지친 지아비를 위해 아내가 온몸으로 올리는 극진한 봉사를 받으며 두 명의 길 잃은 여인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안식을….] ​ 당분간 말 걸지 마. ​ 나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 [(☍д⁰) ] [그러나, 본 시스템은 언제나 궁극적이고 절대적으로 사용자를 위한 최적의 선택지만을 제시한다는 점을 기억해 주십시오!] [어디까지나 내담자의 내면에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제시한 선택지임을 강조 드립니다···.] 녀석은 억울하다는 듯, 마지막 항변을 남기고는 힘없이 사라져 갔다. ​ [ ꜀( ꜆´⌓`)꜆ ] 나는 텅 빈 허공을 보며,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날 위한다는 게 뭘까? 과연 이서령에게 완벽한 상하관계를 주입시키는 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 일단 치료도 아닐뿐더러 그런 방식은 말이 안 된다. ​ 나는 어지러운 생각을 멈추고, 눈앞의 현실에 집중했다. 눈앞의 흐느끼는 이서령에게 티슈를 뽑아 조용히 건넸다. ​ “서령 씨.” ​ 이서령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녀의 젖은 눈을 부드럽게 마주했다. ​ “오늘은 우선 여기까지 하시죠. 스스로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 “네….” ​ 이서령은 젖은 휴지를 쥔 채, 소리 없이 일어나 비틀거리며 상담소를 나섰다. ​ 나는 그녀가 떠난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모래성 같았던 어머니의 신념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모래성 안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딸이 있다. ​ 이제 저 모래더미 위에 쓰러진 두 모녀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까. ​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 새로운 과제의 시작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