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근 진세아는 유선우의 뒤를 캐고 다니는 누군가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러나 상대 또한 상당히 철두철미해, 그 배후가 누군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 하지만, 경고를 남기기에는 충분했다. ​ ‘더 접근하면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 ​ 이라고. 아마 제대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진세아는 그것을 실행할 의지도, 능력도 충분했으니까. ​ 따라서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선우 근처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다. ​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상담소의 문이, 아주 살짝 열려 있는 것을. ​ 진세아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소리 없이,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 그때였다. ​ 안쪽 깊숙한 곳에서, 아주 희미하게 흐느끼는 듯한…. 혹은, 달뜬 것 같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 - 아…! ​ “…?” ​ 그녀는 망설임 없이, 소리가 들려온 상담실의 문을 열었다. ​ “누구세요?” ​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었다. 내부에 있던 것은 진세아의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 ‘… 루나?’ ​ 대외적으로도 알긴 하지만, 일전에 본적도 있었다. 그때도 선우의 상담소 앞이었다. ​ 진세아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도 전에, 본능적인 불쾌감이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 열에 들떠 붉어진 뺨. 식은땀인지 모를 물기가 맺힌 이마. 가쁘게 몰아쉬는 숨결과, 살짝 흐트러진 옷차림까지. ​ 그리고 그 위치가 선우의 의자 위라는 점에서, 솔직히 말해 전에 뒤를 캐고 다니던 조무래기를 발견했을 때보다 기분이 나빠지려 했다. ​ 따라서, 진세아는 한결 차가워진 목소리로 루나에게 다시금 질문했다. ​ “여기서, 뭐 하시냐고요." ​ 루나 또한 상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해태 길드의 S급 헌터, 진세아. 토벌률 1위에 빛나며 언제나 언론의 중심에 서 있는, 유명 헌터였다. ​ 루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열쇠 꾸러미를 내밀었다. ​ “이거… 돌려 드리려고….” ​ 진세아는 그것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 ‘선우 상담소 열쇠를 왜 이 사람이?’ ​ 이유가 어찌 되었든,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녀의 시선이 루나의 앞, 선우의 책상으로 향했다. 그 위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작은 화분이 놓여 있었다. ​ 선의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이건 여자의 직감이었다. ​ 진세아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 “아, 그러셨구나.” ​ 진세아는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루나의 손에서 제 물건을 되찾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열쇠 꾸러미를 가져왔다. ​ “아…!” ​ 루나는 열쇠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깊은 탈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진세아는, 바로 옆 선반에 놓여있던 방향제를 집어 들었다. ​ - 칙칙. ​ 인공적인 라일락 향기가, 루나의 코끝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진세아는 웃는 얼굴로 루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 “이제 볼일은 끝나셨겠네요? 돌아가시면 되겠다. 여기 정리는, 제가 할게요.” ​ - 칙칙. ​ 그녀는 노골적으로 루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듯, 허공에 다시 한번 방향제를 뿌렸다. ​ 루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날 뿐. ​ 그녀는 본래 분쟁을 싫어한다. 누군가와 갈등을 빚기보다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것이 언제나 그녀의 방식이자 루나의 본성이었다. ​ 지금도, 그래야만 했다. ​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 그런데. ​ 그런데…. ​ 머릿속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 ‘루나, 왜?’ ​ 왜, 내가 피해야 하지? 여기는 선생님의 공간이다. 저 여자의 공간이 아니다. ​ 왜 저 여자가 주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나는 침입자처럼 물러나야 하는가. ​ ‘축복.’ ​ 선생님은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축복이라 했다. ​ 루나의 진짜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된 선생님은, 그것을 영광이라 말했다. ​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선생님의 공간에서 나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는가. ​ 그 의문이 그녀의 착한 본성을 밀어내고. 그녀의 내면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뜨거운 감정을 피워 올렸다. ​ 분노? ​ 루나의 눈동자가 선명하고, 진한 핏빛으로 달아올랐다. “…….” ​ 그녀는 책상 위 화분의 겉흙을, 손끝으로 가만히 만져보았다. ​ “흙이 말라서… 라벤더에 물만 주고 가도 괜찮을까요?” ​ “네~ 그러세요~” ​ 진세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상담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루나는 주방에서 물컵을 들고, 화분을 향해 다가갔다. ​ 책상에 다가간 그때. 루나의 발이 살짝 헛디뎌졌다. ​ - 촤악. ​ 그리고 그것을 부었다. 아니, 반절 정도 쏟았다. ​ 물컵의 물이 의자에 걸쳐둔 선생님의 하얀 가운을 그대로 덮쳤다. ​ “어, 어떡해…!” ​ 루나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살짝 젖은 가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굳어있는 진세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죄, 죄송해요… 제가, 제가 책임지고 꼭 세탁해서 가져다 놓을게요…!” ​ 그녀는 젖은 가운을 수습하듯, 두 팔로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진세아의 시선을 피하는 척, 그 안에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 “흐읍….” ​ 선생님의 향기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방향제 따위로는 감출 수 없는 그의 향. 진짜 선생님의 향기가, 그녀의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 - 후닥닥. ​ 루나는 그 자세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상담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 “잠시만…!” ​ 진세아가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손을 뻗었을 때, 루나는 이미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S급 토끼의 작정한 도주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진세아는 텅 빈 복도를 보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벽하게 사라졌다. ​ 한편, 정신없이 자신의 토끼굴로 도망친 루나. 현관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를 지배하던 뜨거운 감정이 거짓말처럼 차게 식어버렸다. ​ “어떡해… 어떡해….” ​ 그녀는 현관에 주저앉아, 자신이 저지른 일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 “선생님 죄송해요오….” ​ 선생님의 가운에 물을 적시고. 그것에 코를 파묻은 채. 훔쳐 오기까지 했다. ​ 어떻게 보면 절도다. 절도. ​ 대체 내가 왜 그랬지? 요즘따라, 자꾸만 낯선 자신이 튀어나왔다. ​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하얀 가운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코끝을 간질이는 그의 향기는 그녀의 모든 이성적인 후회를 마비시켰다. ​ ​ - 킁킁. ​ 루나는 홀린 듯, 다시 한번 가운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그래도, 일단 한 번 더 맡고…. ​ ‘방으로 가지고 들어갈까…?’ ​ 루나는 상당히 오랜 시간 고심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저게 방에 있는 이상,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을 리가 없다. ​ “세탁은 제대로 해드리자….” ​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터덜터덜 세탁실로 향했다.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하얀 가운을 세탁 바구니 안에 소중하게 모셔놓았다. ​ ‘피곤해….’ ​ 현관으로 돌아온 그녀의 앞에, 마침 건너편 방의 문이 열렸다. ​ “언니! 점심 먹고 온 거야?” ​ 잠이 덜 깬 엘리스가, 배를 긁으며 나왔다. ​ “아니… 피곤해서 좀 자려고…. 점심은 혼자 먹어야 할 것 같아.” ​ 루나는 동생의 눈을 피하며, 서둘러 자신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 “응? 알았어.” ​ 엘리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 킁. ​ 그녀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 “…?!” ​ 맡았다. ​ 쫑긋 솟은 잿빛 귀가, 파르르 떨렸다. 엘리스의 나른했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 여기에 절대 존재할 수 없는 향기가. 아주 희미하지만, 진하고 달콤한. ​ “뭐야…?” ​ 엘리스는 코를 킁킁거리며 그 향의 근원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흔적은 정확히 세탁실 문 앞에서 가장 짙어지고 있었다. ​ 그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안쪽에서 훅, 하고 농밀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 “으잉…? 이게 왜 여기에….” ​ 엘리스는 세탁 바구니 가장 안쪽. 유선우라고 적혀 있는 하얀색 의사 가운을 발견했다. 저번에 상담소에서 살짝 신세진 그 옷. ​ 엘리스는 가운을 집어 들었다. 가운의 명찰에는, 유선우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등 쪽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 엘리스의 머리에서 몇 개의 단어가 빠르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걸 조합해 보자. ​ 투명하게 젖은 의사 가운. ​ 피곤해 보이는 언니. ​ 붉게 달아오른 언니의 뺨. ​ 엘리스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 ‘하지 말자.’ ​ 조합하는 건 언니에게 상당한 실례가 될 것 같았다. ​ 그리고, 아마 아닐 것이다. 루나 언니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분명, 무슨 실수가 있었을 것이다. ​ 모종의 이유로 물을 쏟은 게 아닐까? ​ 그래, 그게 합리적이었다. ​ “…….” ​ 엘리스는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다,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닫힌 언니의 방문을 한번 힐끗 보고는, 조용히 세탁실 문을 닫았다. ​ - 달칵 ​ 잠그기까지 했다. 불도 껐다. ​ 어둠과 정적. 그리고 진한 향기만이 남은 공간. ​ 엘리스는 구석에 주저앉아, 손에 든 가운을 코끝으로 가져갔다. ​ - 킁킁. ​ 그녀는 아주 깊게, 또 천천히 옷에 밴 향기를 들이마셨다. ​ ‘… 어쩔 수 없어.’ ​ 저번에도 간신히 참았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이 안정되는 향을 맡으려 하는 건…. ​ 수인의 본능이었으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