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천맹의 총본산, 그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정원. ​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 속, 난초의 은은한 향이 감돌았다. ​ 이서령은 정자에 앉아,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백옥처럼 하얀 손가락이, 코 끝에 전해지는 향을 음미하며 아주 천천히 찻잔을 기울였다. ​ 그녀의 등 뒤, 그림자가 드리운 기둥 옆에서 한 사내가 소리 없이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맹주의 그림자를 관장하는 자, 암명대주였다. ​ 이서령은 찻잔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직하게 물었다. ​ “암명대주, 의원에 대한 조사는 마쳤는가?” ​ “예. 맹주님.” ​ 그제야 이서령은 찻잔을 내려놓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깊은 흥미가 감돌고 있었다. ​ “말하라.” ​ 암명대주는 고개를 숙인 채, 외워둔 정보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 “의원의 이름은 유선우. 전(前) 해태 길드 소속의 헌터였으나, 은퇴 후 새로운 직종을 택했습니다.” ​“그가 가진 헌터 정신 상담사라는 직업은… 현재 국가에 단 한 명뿐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암명대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 ​ “그 직위가 주는 권한은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적어도 이방인과 헌터에 관한 지침과 판단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듯합니다.” ​ “그렇군.” ​ 이서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자신감의 근원은 역시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었구나. ​ 그녀는 근거 없는 오만은 경멸했지만, 실력으로 증명하는 자신감은 싫어하지 않았다. ​ 오히려, 꽤 마음에 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 자신감은. ​ “따라서 협회 또한,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유일한 의원인 유선우를 상당히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몸담았던 해태 길드 역시, 여전히 비공식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 “협회, 그리고 해태라….” ​ 이서령의 손가락이, 찻잔의 표면을 부드럽게 쓸었다. ​ 협회는 균형을 유지하는 가장 강한 세력 중 하나다. ​ 그러나 해태는 예상 밖이었다. 해태는 창천맹과 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10대 길드다. ​ 이러면, 쉬이 손을 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의원에게 손을 댔다가는 해태와의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다. ​ ‘갈수록 놀라워지는구나.’ ​ 그러나 그의 보고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암명대주는 잠시 망설이는 듯한 침묵 끝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정보를 꺼내놓았다. ​ “그리고 한 가지… 더.” ​ 이서령은 계속하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 “저희 정보원이 그의 주변을 조사하던 중, 알 수 없는 세력으로부터 경고를 받았습니다.” ​ 그 말에 이서령의 미소가 처음으로 옅어졌다. ​ “경고라.” ​ “예. ‘그 이상 접근하면 흔적 하나 남지 않을 것’이라… 그리 전해왔다고 합니다.” ​ 보고가 끝나고, 정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서령이 정자의 난간을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리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렸다. ​ 그녀는 눈을 감고, 지금껏 들은 모든 정보를 정리했다. ​ 첫째로 개인의 능력도 출중한데다, 강단까지 있다. 그 눈빛만 보더라도 쉬이 꺾이지 않을 것이란 건 보였다. ​ 둘째, 그의 뒤를 봐주는 협회와 해태라는 세력도 있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피로하다. ​ 셋째, 정체를 알 수 없는 강자도 그를 수호하고 있었다. ​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 “… 흐.” ​ 이서령의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작게, 그러다 점점 더 크게. ​ 정원을 가득 채울 만큼, 맑고 우아한 웃음소리였다. 암명대주는, 처음 보는 주군의 모습에 당황했다. ​ ‘무력하구나.’ ​ 창천맹주, 이서령은 무력감을 느꼈다. 무력감에서 피어난 허탈한 웃음이었다. ​ 어떤 수를 쓰더라도, 지금은 딸에게 갈 수 없었다. ​ 어떤 수를 쓰더라도, 당장은 저 사내를 제칠 수가 없다. ​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분하면서도, 동시에…. ​ 기묘할 정도로 즐거웠다. ​ ​ ​ ​ ​ *** ​ ​ ​ ​ ​ ​ 협회의 자료실은 오늘도 고요했다. 아침이라 특히 더. ​ “이거는 반납할게요. 감사합니다.” ​ “앗, 네. 알겠습니다.” ​ 나는 어제 대여하고 밤새 파고들었던 자료들을 반납했다. 아주 유익하고, 건전하며, 희망찬 내용만 담겨 있었단 자료들. ​ 데스크의 담당 사서가 반납을 처리하는 것을 잠시 기다리다, 나는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내 들었다. ​ “그런데 사서님….” ​ 나는 누렇게 변색한, 낡은 종이 뭉치를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 “혹시 이 논문의 저자분에 대해서 좀 알 수 있을까요?” ​ 나는 계속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토해냈다. ​ 이 모든 것을 연구하고 기록한 자는 대체 누구인가. ​ “아! 네, 잠시만요….” ​ 모든 논문에는 일련번호가 있다. 따라서 자료실의 컴퓨터에 입력하면 저자가 누구 인지쯤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녀는 문서의 귀퉁이에 낡은 잉크로 찍힌 일련번호를, 능숙하게 단말기에 입력했다. 그러나 사서의 미간이, 이내 곤란하다는 듯 찌푸려졌다. ​ “으음… 이거는 비공개네요.” ​ “네?” ​ 그런 게 어딨어. ​ “기증자분께서, 신원 비공개를 강력하게 요청하셨다고 나옵니다. 이런 경우는 저희도 저자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 잠깐. 그 말에, 내 머릿속에 한 줄기 희망이 스쳤다. 익명의 기증, 출처는 불분명. 그럼 근거가 없는 허위 논문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 나는 순간적으로 희망을 품고 물었다. ​ “혹시 그럼 거짓 논문….” ​ “아니요.” ​ 내 희망은 그녀의 단호한 답변에 가차 없이 잘려나갔다. ​ “설령 익명의 자료라 해도, 저희 자료실의 모든 기록은 협회의 다중 검증 절차를 거칩니다.” ​ 그녀는 모니터의 인증 마크를 가리키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 “이 기록 또한, 모든 사실 검증이 끝난 공식 자료가 맞습니다.” ​ 아. ​ “… 감사합니다.” ​ 나는 멍한 머리로, 협회 자료실을 나섰다. 결국 확인사살까지 당했다. ​ 그런데 저자도 모른다. ​ “아오.” ​ 고요하던 자료실과는 달리, 협회 중앙 로비는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 나는 그 인파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 내가 상담사 자격증을 얻을 때 자주 보던 직원이었다. 그가 무언가 분주하게 지시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직원이 먼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 “아 유선우씨… 아니, 상담사님! 어쩐 일이십니까?” ​ 나는 웃으며 가볍게 인사했다. 그리고 고갯짓으로 로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가리켰다. ​ “오늘 무슨 날인가요? 유독 사람이 많네요.” ​ “아, 모르셨군요. 오늘이 헌터 정신상담사 자격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 “오, 그런가요?” ​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 동료. 혹은 내 짐을 덜어줄 후임. 어느 쪽이든 좋은 소식이었으니까. ​ 나는 순수한 기대감에, 미소 지으며 물었다. ​ “몇 명이나 붙을까요?” ​ “음… 글쎄요. 어디 보자….” ​ 내 질문에, 팀장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톡톡, 두드렸다. ​ “저번달도 0명.” “저저번달도 0명.” ​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결론을 내렸다. ​ “그러니 이번에도, 아마 0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 “네?” ​ 내 되물음에,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 “상담사님은 모르셨겠지만, 저희가 일부러 안 뽑는 게 아닙니다. 계속 모집은 하고 있었습니다.” ​ 그는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지금까지, 협회가 내건 최소 자격 조건을 통과하신 분이… 상담사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 갑자기 떠오른다. 후임은 내가 사라지고 나서 나올 것이라는 직원의 말이. ​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담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렇다면… 자격 기준을 조금 낮추는 건 어떻겠습니까?” ​ “그건 어렵습니다. 이미, 너무 많이 낮췄습니다. 상담사님이 처음 통과하신 이후로도 기준을 수도 없이 완화했습니다.” ​ 팀장의 대답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 “이 이상은 안됩니다.” ​ 그는 로비를 가득 메운 지원자들을 씁쓸하게 훑어보았다. ​ “단순한 상담사만 뽑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 나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 직원은 내게 고개를 숙였다. ​ “그러니 앞으로도,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제든 불편하신 부분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협회는 유선우 상담사님의 모든 편의를 지원할 겁니다.” ​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닙니다.” ​ 그래. 신세 한탄은 여기까지다. ​ 나라도 내 할 일을 해야지. ​ 나는 다시 설유월이 격리된 시설로 향했다. ​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나의 내담자에게로. ​ ​ ​ ​ ​ ​ ​ *** ​ ​ ​ ​ ​ ​ ​ ​ 루나는, 작은 라벤더 화분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선생님의 상담소로 향하고 있었다. ​ 오늘 선생님은 협회에 간 것 아니냐고? ​ 알고 있다. ​ 그래서, 몰래 가는 것이다. ​ “♪~~♬” ​ 루나의 입가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발걸음조차 가볍다. ​ 오늘 오전, 비번이라 늦잠을 자는 척하던 엘리스가, 현관에서 몰래 빠져나가려는 것을 발견했었다. ​ ‘엘리스, 어디 가?’ ​ 루나의 부름에, 엘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멈춰 섰다. 그 손에는, 어제 선생님이 건넸다는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 ‘아, 그게… 이거 돌려주려고….’ ​ ‘내가, 가져다줄게.’ ​ 엘리스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루나는 동생의 손에서 열쇠를 낚아챘다. 잠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던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그녀는 품에 안은 작은 라벤더 화분을 고쳐 안았다. 선생님이 주신 달콤한 케이크에 대한, 아주 작은 보답. ​ 그리고… 이 차분한 향기를 맡을 때마다, 루나를 떠올려주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에…. ​ ‘앗….’ ​ 루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 꼭 그런 의도는 아니다. 그저, 선생님이 조금 더 편안한 공간에 머물기를 바랐을 뿐이다. ​ 상담소 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리자, 고요한 복도에 찰칵하고 선명한 소리가 울렸다. ​ 문은 바로 열렸다. 엘리스의 말에 의하면, 선생님이 발판 아래 열쇠를 숨겨두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안에서 할 일이 있었으니까. ​ 루나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 “흐응….” ​ 바로 느껴지는 선생님의 향기. ​ 루나의 어깨에서, 자신도 모르게 힘이 쭉 빠져나갔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 그녀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가 가장 오래 머무를 공간인 상담실로 향했다. ​ 상담실 중앙에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거대한 흑옥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루나는 화분을 그 위에 올려둘 생각으로 다가갔다. ​ “…….” ​ 하지만 테이블에 가까워지는 순간, 그녀의 코끝에, 아주 희미하지만 불쾌한 향이 스쳤다. ​ 아니다. 여기는 뭔가 아니다. 선생님의 부드러운 향과 다른, 기분 나쁜 향이 느껴진다. ​ 루나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뒷걸음질 쳤다. ​ 그녀는 대신, 창가에 놓인 선생님의 자그마한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이 가져온 라벤더 화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 “흠흠….” ​ 선생님의 눈에, 가장 예쁘게 보였으면 했다. 따라서 그의 각도에서 보기 위해 의자에 천천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 “아…!” ​ 그리고 자리에 앉는 순간, 그녀는 숨을 멈췄다. ​ 루나는 당황했다. 단순히 공간을 채우던 향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가 가장 오래 머무는 이 의자에는, 그의 체향이 아주 진득하게, 압축되어 남아 있었다. ​ 루나의 머리가 어질해졌다. 그녀는 양손으로 치마를 꽉 붙잡으며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온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감각. ​ “아… 앗….” ​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그녀는 몽롱한 정신으로, 자신과 선생님만이 존재하는 세계로 깊이, 아주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 “누구세요?” ​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상담실의 문이 열렸다. 루나도 그 즉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문을 연 것은, S급 헌터 진세아였다. ​ “으아앗!” ​ 그녀는 거의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튀어 올랐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여기서 뭐 하세요?” ​ 진세아의 물음에. 루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