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영상은 생각보다 상당히 잘 짜여있다. ​ 규정된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의 출신 이방인들이 직접 첨언하고 또 영상 제작에 도움을 준다. ​ 어떻게 하면 이방인들이 이 낯선 세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지,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협회는 그런 정보들을 적극 반영했다. ​ 이방인이 빠르게 이 세계에 적응할수록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으니까. ​ 따라서 지금 설유월이 보고 있는 영상 또한 그녀 같이 중원 출신의 이방인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이었다. ​ [중원의 무림인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사천당가(四川唐家)의 금지옥엽, 당희란입니다!] ​ 화면 속 화사한 녹색 의복을 입은, 앳되고 아름다운 소녀가 나타나 자신을 소개했다. ​ “희란…?” ​ 설유월이 모니터를 보는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모니터에 손을 뻗어, 화면 속 여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 [어라? 분명 독접(毒蝶)은 사라졌다고 했는데···? 눈 앞에 떡 하니 있네? 하하하···.] [지금 많이 정신없고 어지러운 상황이죠? 조금만 참고 저희의 안내를 따라주신다면 곧,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거예요.] ​ “분명…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 ​ 설유월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친분이 있는 사이인 듯했다. ​ 그녀의 표정이 한층 나아졌다. ​ 출신 세계의 유명인을 영상에 노출시키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심리적 접근 방법일 것이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유명인이, 혹은 친분이 있는 자가, 영상에 나와서 얼굴을 비추며 설명한다? ​ 순식간에 마음 한구석, 안심이 들 수밖에 없다. ​ 바로 그때. ​ [- 쉬이이이익!! 파바바바박!] 화면속의 당희란이 눈깜짝할 새에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손에서 날아간 수십 개의 은침이 옆에 있던 나무 목판에 빠른 속도로 박혔다. ​ [-스스스스….] ​ 그리고 암기가 박힌 자리의 나무가 시커멓게 변색되며 서서히 부식하더니, 이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 [인피면구가 아닌, 진짜 당희란입니다. 믿으셔도 좋아요.] ​ 화면속 당희란은 볼을 쭉 늘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중원인들이 대상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상이나 가문의 고유한 무공일테니까. 아무래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인듯 했다. ​ 그렇게 몇가지 설명을 이어가던 당희란이 두발로 딱 섰다. ​ [자! 지금 여러분 앞에 계신 분은 심의(心醫)입니다! 여러분의 적응을 도와주실 의원 분이니 말 잘 듣고, 빨리 적응하시길 바랄게요!] ​ 당희란의 나에 대한 소개와 함께, 화면 속 이야기가 끝났다. ​ “살아… 있었군요… 희란….” ​ 설유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심리상태가 상당히 안정된 듯 보였다. ​ 아무래도 당희란이라는 사람과 친분이 있었던 듯했다. 당희란이 언제 이 세계로 넘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그쪽 세계에서는 실종 혹은 사망처리가 되어있겠지. ​ 그런데 그런 그녀가 눈앞에서 살아있는 모습을 보니, 당연히 안심이 될 수밖에. ​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다음 사람. ​ “…….” ​ 나 또한 아는 사람이었다. ​ 나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은 채, 화면이 아닌 설유월의 반응에 시선을 고정하며 관찰을 지속했다. ​ 이번 영상의 주인공은 창천맹주,이서령이었다. ​ [중원의 무림인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무림맹주 이서령입니다.] ​ 화면 속 그녀의 어머니가 온화한 미소로 말했다. ​ [아, 이곳의 명칭을 따라야 할까요? 창천맹주라고 해야겠군요.] ​ 순간, 설유월의 반응이 바뀌었다. ​ “어… 머니…?” ​ 방금 전 당희란을 보며 희미하게 풀렸던 그녀의 얼굴 근육이 서서히 굳어졌다. 화면을 향해 뻗어 있던 손 또한, 서서히 움츠러들었다. ​ 나는 심리학을 전공하지는 않았다. 다만, 매우 노력했다. ​ 적어도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지기에 부끄럽지는 않게끔, 능력에만 의존하지는 않게끔 말이다. ​ 따라서 나는, 설유월이 보이는 저 반응이 무엇인지쯤은 알고 있었다. ​ 그녀는 불안감에 눈을 깜빡이며 모든 행동을 멈췄다. 몸 전체가 움츠러들면서 서서히 TV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 스스로는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겠지만. ​ “…….” ​ 아무래도 좋은 판단이었던 것 같다. 이서령이 이 방으로 못 들어오게 했던 것은. ​ [훗날 시설에서 나오게 된다면 창천맹으로 오세요. 중원의 무인들이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 이서령의 말과 함께 그녀의 영상은 끝났다. ​ 그리고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의 여러 설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설유월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비언어적 행동에는 진전이 없었다. ​ 그래도 다행인 점은… 설유월은 이곳에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헌터가 무엇인지 등의 정보들은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영상이 그렇게 끝이 났다. 화면이 검게 변하며 방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 나는 그녀가 모든 정보를 소화할 여유로운 시간을 준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조금 진정이 되셨습니까?” ​ 내 목소리에 그녀의 어깨가 아주 희미하게 움찔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가로막고 있는 투명한 유리벽을 바라보았다. ​ 지금은 이 정도다,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닌 유리벽을 바라보는 정도. ​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 어차피 내가 보이는 건 똑같으니까. ​ “아직 의심이 가신다면 괜찮습니다. 당희란 헌터님을 모셔올 수도 있고, … 네 당희란 헌터님을 모셔올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물어보셔도 괜찮습니다.” ​ 나는 그녀를 가장 안심시킬 수 있을 만한 제안을 건넸다. 일단 그녀의 어머니인 무림맹주를 불러오겠다는 말은 참았다. 지금 그녀에게 그 이름이 약이 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 그러나 설유월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아닙니다. 이해는… 했습니다.” ​ 설유월의 목소리는 텅, 비어 있었다. ​ “제가 마인에게 붙잡힌 게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곳이 내가 알던 중원이 아니라는 것을.” ​ “아직 전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중원의 무인들이 이 세계에서 창천맹과 천마신교를 세워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까지… 전부 이해했습니다.” ​ 그녀는 이 현실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해 보였다. ​ “그렇다면… 저는.” ​ 설유월의 푸른 눈동자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 “… 나는.” ​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예상하던 질문은 아니었다. ​ ‘어떻게 됩니까.’ 질문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 영상으로 봤겠지만 이 세계는 자유롭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중원과는 차원이 다른 문명의 이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 그렇다면, 최소한의 규율을 지키며 이방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저버리지만 않는다면. 설유월은 앞으로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 창천맹에 들어가 존경받는 헌터가 되어도 좋다. 아니면 천마신교에 들어가는 것 또한 괜찮다. 어차피 이 세계의 천마신교는 이름만 천마신교일 뿐, 헌터 길드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 그것도 싫다면, 그냥 평범한 삶을 사는 것도 괜찮다. 전부, 설유월의 자유였다. ​ 따라서 나는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 내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후보가 떠오른다. ​ 다만, 이번에는 능력을 사용할 차례였다. ​ [설유월] [메인 스탠스] [평생을 누군가가 설정해 준 목표만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누군가도 사라졌고, 이제는 그 목표마저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 혼자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90%] [설유월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70%] [헌터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0%] [설유월님의 어머니에게 물어보시겠습니까?] ​ “…….” ​ 누군가가 설정해 줬다는 구절이 상당히 걸리긴 하지만…. ​ 일단 상태창의 따르면, 설유월은 목표가 사라져 번아웃이 온 상태라 봐도 무방했다. ​ 나 또한 몇 번 상담한 적이 있는 형태의 내담자다. ​ 보통 번아웃이 온 내담자들을 상대로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거나, 혹은 스스로 그 목표를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 것이 정석이다. ​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1번과 2번의 선택지는 상당히 우수하다. 정석적인 답변이라 볼 수 있겠다. ​ 다만. ​ 내 능력이 제시하는 답변은 적합률이라는 형태로 그 효과가 눈에 보인다. ​ 따라서 그 답변이 얼마나 좋은 효과를 얻을지에 대한 예상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그 답변이 얼마나 나쁜 효과를 얻을지에 대한 예상도 가능했다. ​ 마지막 선택지의 적합률은 0%.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 최악의 질문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 따라서. ​ “설유월씨는 앞으로 어떻게 하시고 싶으십니까?” ​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 내 질문에 설유월의 푸른 눈동자가 살짝 찡그러졌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 고민하는 듯했다. ​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 그녀는 아주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 “… 모르겠습니다.” ​ 목소리는 여전히 갈라져 있다. ​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 나는 그녀의 그 대답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괜찮습니다.” ​ 그리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그러려고 제가 있는 거니까요.” ​ 그때. ​ - 삐비빅. ​ 건너편의 설유월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가 있는 상담실의 작은 프롬프터에서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상담사님! 오늘은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대상의 기본적인 현실 인지는 완료된 것으로 보입니다! 』 ​ ​ 아마 그들은 카메라를 통해, 설유월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카메라는 상담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외부에서 내부의 상태를 알아야 했으니까. ​ 물론 소리는 안 들리지만. ​ 『※다음 상담은 그녀의 보호자인 어머님이나, 혹은 다른 이방인분들을 만나게 하여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은 어떨까요?』 ​ 내 미소는 그 프롬포트를 보자마자 굳었다. ​ “…….” ​ [NOPE.] ​ 응. ​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 - 지직. ​ 나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프롬프터의 전원 버튼을 꺼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인사가 늦었군요.” ​ 그리고 고개를 돌려 CCTV를 한 번 바라보다, 다시 유리 벽 너머의 그녀를 바라봤다. ​ “설유월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설유월님의 상담을 담당하게 된, 유선우 상담사입니다.” ​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먼 길 오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 이제, 진짜 상담을 시작할 차례였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