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 밤새 창문을 두드리던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구름 사이로, 오랜만에 보는 쨍한 햇살이 상담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 나는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어젯밤의 일을 복기했다. ​ ‘첫 상담은….’ ​ 일단 성공적이다. ​ 나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 애초에, 자화연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 아니었다. 광적인 부하들과 권력욕에 눈이 먼 부하들 사이에 고립되었을 뿐. ​ 전형적인, 주변 환경이 개인을 옥죄는 케이스. ​ 따라서 내가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처한 상황을 명확히 알려주고, 마음속으로 내린 결단에 확신을 얹어준 것뿐. ​ 나는, 그녀가 앞으로 훌륭한 군주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과정은 조금 과격해도 그녀는 적어도 교단을 올바른 길로 이끌 우수한 군주가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첫 번째 환자와의 상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축하합니다!] ​ 눈앞에, 난데없이 푸른색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 이런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수백 번도 넘게 상담사의 능력을 사용했었지만 이런 메시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상담사'의 특수 어빌리티가 일부 개방됩니다.] ​ [어빌리티 : 핀(PIN)이 활성화됩니다!] [상담사를 통해 대상을 지정하면, 거리에 상관없이 대상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 [현재 사용 가능한 슬롯: 1] ​ “…어?” ​ 어빌리티. 헌터들이 각성 이후, 추가적으로 얻게 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스킬들을 뜻한다. ​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는 줄 알았다. ​ 그런데 있었다. ​ 상담사의 능력으로 살펴 봤던 대상을 핀으로 고정하여 원격으로 지켜보는 능력이었다. ​나는 시험 삼아 자화연에게 핀을 꽂았다. ​ [자화연] [PINNED] ​ [현재 상태: 깊은 수면 중. 심리적 안정도 90%] ​ [메인 스탠스] [……ZZZ.] ​ 잘 자고 있구나. ​ 이거··· 생각보다 엄청 좋다. 중요한 환자들을 멀리서도 살펴보고, 또 케어할 수 있게 됐으니까. ​ '잠깐.' ​ 나는 기쁨과 동시에, 어딘가 찝찝한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원격으로 환자를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엄청난 이점이다. ​ 하지만, 이건 어떻게 보면…. ​ ‘스토커 아닌가?’ ​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뭐 나도 중요한 상황이 아니면, 함부로 들여다보지는 않을 테니까. ​ 아쉬운 점은 슬롯이 한 개라는 점일까. 핀을 바꾸는 데에는 쿨타임도 존재했다. 12시간. ​ 어찌 되었든 새로운 어빌리티를 각성했다는 점은 호재였다. 내게는 절대 없을 상황이라 생각했었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쁨의 기지개를 쭉 켰다. ​ 오전 7시. ​ 햇살은 쨍쨍하지만, 내 눈 밑은 퀭하다. ​ 결국 퇴근을 못 했기 때문. 자화연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 떠보니 해가 밝아 있었다. ​ 그녀는 천마의 신체를 가져서 그런지, 아주 쌩쌩한 표정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꿀잠 중.​ ​ ‘또 오도록 하마.’ ​ 왜 다시 온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해결은 다 된 거 아닌가? ​ 내일이 주말이라 망정이지··· 다행히도 오늘만 버티면 이번 한 주가 끝이난다. ​ 좀비 같은 몸을 이끌고, 상담실에 딸린 자그마한 부엌 옆의 냉장고로 향했다. 자화연은 밤새 내가 구워낸 브라우니를 무한대로 뽑아 먹고 갔다. ​ 언제나 환자가 올 것을 대비해 달달한 과자를 준비 해놔야 했기에…. ​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 “음….” ​ 텅 빈 계란판이, 나를 맞이했다. ​ 가장 중요한 재료인 계란이 단 한 알도 남아있지 않았다. ​ 쉬게 놔두지를 않는구나. ​ 나는 목을 빼내 시계를 확인했다. ​ 가리키는 시간은 7시 15분. ​ 상담소의 정식 오픈 시간은 아침 9시. 그리고 이 건물 건너편 지하에 있는 백화점의 식품관은 8시에 문을 연다. ​ 지금 대충 씻고 준비해서 내려가면, 오픈 시간에 맞춰 장을 보고 9시 전까지는 돌아와서 준비를 할 수 있어 보였다. ​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헌터들의 정신을 구원하는 것도 좋지만… 빵에 계란이 없는 건 말이 안 되니까. ​ ​ ​ ​ ​ *** ​ ​ ​ ​ ​ “그러니까 환자분은, 성과에 대한 압박이 강한 길드보다는… 좀 더 여유로운 쪽으로 가셔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으시는 게 나아 보입니다.” ​ “그렇군요….” ​ “네. 물론, 그런 경쟁을 통해 동기부여를 얻는 타입의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환자분 같은 경우는, 오히려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거든요. 어느 쪽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맞지 않는 옷일 뿐이죠.” ​ [박수형] [메인 스탠스] [길드 내에서의 무한 경쟁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 나는, 깔끔한 글씨체로 서류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 ‘사내 경쟁으로 인한 번아웃 증후군….’ ​ 상담이 끝난 환자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상담사님.” ​ “네, 고생하셨습니다.” ​ - 덜컥 ​ ‘와….’ ​ 헛웃음이 나온다. ​ 상담실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파묻고, 뜨거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문틈 사이로 대기실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의 모든 환자를 합쳐도, 오늘 이 금요일의 환자 수보다 적을 것이다. ​ 퀭한 눈과, 핑핑 도는 머리를 독한 커피로 간신히 붙잡고 있을 뿐. 가장 최악의 컨디션인 내게 역대 최고의 환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 - 위이잉. ​ 나는 커피 한잔을 또 내리며, 조용히 방의 문을 열었다. ​ “다음 환자분 들어오세요.” ​ 그 말을 시작으로, 시간의 감각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 길드 이전 문제로 고민하는 C급 탱커. 던전 공략 실패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B급 마법사. 은퇴한 이후로도 PTSD에 시달리는 퇴역 헌터까지. ​ 수십 명의 환자가, 내 작은 상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나갔다. 나는 쉴 새 없이 커피를 들이붓고, 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분석하고 처방을 내렸다. ​ 어느새 창밖의 햇살이 노을로, 그리고 점차 어둠으로 변해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방금 나간 환자의 진단서를 마무리하고, 거의 기계적으로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 “다음 환자분, 들어오세요….” ​ “…….” ​ 대답이 없었다. ​ 혹시…? ​ “… 다음 환자분?” ​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 드디어 끝이 난 건가. 나는 거의 기어가는 듯한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상담실의 문을 열었다. ​ 텅 비어 있다. ​ 불 꺼진 대기실은 고요했다. ​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 “…….” ​ 상담실 문 바로 옆, 문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사각지대가 되는 구석의 의자. 그곳에서 의문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공간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린다. ​ 뭔가… 뭔가 있다. ​ 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동시에,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 [경고: 인식 저하(C급)이 당신의 시야를 교란합니다.] ​ C급? C급은 할만하다. ​ [상태 이상: 인식 저하에 저항합니다. 강제 해제를 시도합니다.] ​ [클로킹 강제 해제 성공.] ​ 내 눈은 꽤 좋은 편이다. 적어도 내 근처에서는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는 많지 않다. ​ S급 정도 되는게 아닌 이상. ​ 노이즈가 일렁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한 여성이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백색 머리카락과 그 사이에 물든 빨간색 브릿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뺨, 공허하게 풀린 붉은 눈동자. ​ ‘… 이방인.’ ​ 명백한 이방인이었다. ​ 이런 이방인은 티가 난다. 동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느낌을 주니까. ​ 그녀는 자신의 은신이 풀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신체를 더듬었다. ​ “어…? 어?” ​ 클로킹이 풀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나는 나직이 물었다. ​ “혹시 환자분…?” ​ “아… 아니요…! 저는 그냥…!” ​ 그녀는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상담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동체시력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사라졌다. ​ 나는 그녀가 나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 ‘뭐지?’ ​ 이론상, 이 자리는 가장 깊은 자리. 상당히 일찍 와야 앉을 수 있다. 자리를 일부러 옮긴 게 아닌 이상에야…. ​ 그러면 클로킹을 한 상태로 계속 고민을 한 건가? ​ 상담실로 들어올지, 말지. ​ 나는 눈을 다시 크게 떴다. 그러자 눈앞에 그녀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 내용을 읽어 내린 순간, 등골을 타고 오싹함이 흘렀다. ​ “이런 씨…!” ​ 나는 바로 땅을 박차며, 복도를 가로질러 뛰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 “하….” ​ 놓쳤다. ​ [루나] [메인 스탠스]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 [적합 답변][만족 답변률 100%] [최대한 빠르게 붙잡으십시오.] ​ “루나… 루나.” ​ 얼굴이 익숙했는데… 바로 알아봤어야 했다. 그녀는 이방인이다. ​ 이방인인 그녀의 추정 랭크는 당연히 S급. S급 헌터의 전력 질주를 내가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 좌절하던 나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한 가지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 ‘맞다. 핀.’ ​ 나는 허공에 다급하게 시스템 창을 띄웠다. ​ [PINNED: 자화연] ​ 망설일 시간은 없다. 나는 곧바로 자화연에게 고정해두었던 핀을 해제했다. ​ 그리고. ​ ‘루나.’ ​ [루나] [PINNED] [현재 상태: 음속으로 이동 중. 심리적 불안정 상태. 그러나 즉각적인 위험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메인 스탠스: 상담사에게마저 자신의 클로킹이 간파되었다는 사실에, 극심한 자괴감과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 “…….” ​ 나는, 새롭게 갱신된 상태창을 눈을 가늘게 뜨고 읽어 내렸다. ​ 그러니까 나한테 클로킹이 들통나서 자존심이 상했다? ​ 뭔가··· 기분이 나쁜데. 애초에 등급 자체도 C급이었다. ​ 그녀의 주특기도 마법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고. ​ “됐네 그래도.” ​ 심리적으로 불안하긴 한데. 핀에 의하면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 어차피, 루나의 소속은 유니온. 그리고 나의 첫 왕진도 유니온이다. ​ “다음 주에 봅시다.” ​ 우리는 싫든, 좋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