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흐….” 내 손길에 루나의 입술 사이로 아주 작고,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엘리스보다 조금 더 격한 반응에 나는 그녀의 귀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 자리에 앉았다. “엘리스님에게 이 방법이 수인 간의 기분 좋은 인사라고 들어서요. 저도 루나님의 용기에 수인의 방식대로 예를 갖춰 화답하고 싶었습니다.” 내 말에 루나의 붉은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랬군요… 엘리스….”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이 인사는… 우리 수인들 사이에서는, 칭찬이자 두 번째로… 기분 좋은 인사.” 그리고, 붉어진 뺨을 한 채, 나를 올려다보며,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앞으로도… 자주, 해주세요. 선생님.” “그러겠습니다.” 나 또한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루나는 이게 두 번째로 좋은 인사라 했다. 나는 그 묘한 순위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덧붙였다. “다음에는, 루나님이 직접 첫 번째로 좋은 인사도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내 말에 루나가 아주 짙고 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첫 번째 인사요….” 그녀는 비밀이라는 듯, 자신의 붉은 입술에 하얀 손가락을 가만히 가져다 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건, 나중에. 좀 나중에요. 제가… 꼭 알려드릴게요.” 루나가 웃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나 또한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좋다. 오늘 상담은 이걸로 마쳐도 무방하다. 솔직히 말해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녀의 깊은 상처를 메꾸고, 제한적이지만 마주할 용기를 심어주었으며 마침내 그녀 스스로가 베일을 걷어내게 만들었다. 오늘의 상담은 여기까지 해도 될 듯했다. 나는 이 긍정적인 경험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녀를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 오늘 상담은 이걸로… 마무리해도 괜찮으실까요? 오늘 너무 큰 용기를 내셨으니, 조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마무리 지었다는 만족감과 함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나 루나는, 내 예상을 깨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요…?” 그녀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순진한 미소로 되물었다. “지금이 23분 23초… 24초. 아직 …스 보다 상담 시간이 조금 적어요.” “……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저도 귀를 보여드렸으니까… 이 모습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루나는 내가 말해준 상담의 이유들을 써먹으며,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를 덧붙였다. “또, 선생님이 제 본모습을 보고 말씀해 주시는… 감상도 더 궁금해요. 다른 사람들이 절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공부가 된달까요?” 첫 번째 이유는 순간적으로 이해가 잘 안됐지만, 뒤이어 나온 이유들은 납득이 갔다. 루나로서는 당연히 궁금할 만한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마주하려는 내담자로서 보일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요구였다. “아, 네. 제가 미처 거기까지는 인지하지를 못했네요. 내담자님의 적극적인 태도에 감사드립니다. 상황을 직접 마주하려는 용기야말로, 모든 치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내 진심 어린 칭찬에 루나의 뺨이 다시 한번 희미하게 붉어졌다. 상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선생님은 모르겠지만. 귀를 밖으로 내보인 그 시점부터. 루나는 단 한순간도, 시선을 선생님에게서 떨어트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낸 지금. 선생님이 과연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그 시선이 향하는 곳 하나하나를, 최정상급 수인의 초월적인 감각으로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선생님은, 상담사답게 젠틀하고 신사적이었다. 그녀가 평생 겪어왔던, 다른 제국의 귀족들이나 여타 남성들과는 달랐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화에 집중했다. 루나가 평생의 상처라고 생각했던 토끼 귀에도 기분 좋은 미소만 보낼 뿐, 호기심이나 혐오, 혹은 그 어떤 다른 감정의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이나, 다리 같은, 필요 이상의 부위로도 그의 시선은 결코 향하지 않았다. 내담자에 대한 완벽한 존중. 흠잡을 데 없는 신사적인 태도. 귀족보다 더욱 귀족 같은 행동. 그런데 루나는,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무언가 답답하고 초조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왜?’ 아름답다고 말해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증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귀뿐만이 아닌데. 정작, 자신의 귀도, 가슴도, 입술도. 그가 아름답다고 칭찬해 준 모든 것을, 그가 더 봐주었으면 좋겠는데. 선생님의 시선을 갈망하고 있는 자신을 루나는 발견했다. 그 조급함에 루나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자신의 검은색 와이셔츠 가장 위에 있는 단추로 향했다. 엘리스처럼 이것마저 풀어 보이면 그때는, 그도 봐주지 않을까. ‘아?’ 차가운 단추의 감촉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그녀는 황급히, 손을 무릎 위로 가져왔다. ‘내가 무슨 짓을….’ 아직, 루나에게는 이 새로운 감정을 제어할 한 톨의 이성이 남아있었다. 그때였다. 선생님의 시선이 아주 짧은 시간,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가 다시 부드럽게 루나에게로 떨어졌다. 루나 같은 수인이나 겨우 눈치챌 수 있는, 찰나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왼쪽 검지와 중지를, 오른쪽 손바닥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감쌌다. ‘아….’ 저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상담에서, 그가 상담을 끝내자는 말을 하기 직전에 보여주었던 무의식적인 습관이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올 말은 뻔하지만…. “…….”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루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또, 배려를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루나가 상담을 더 이어가고 싶다고, 억지를 부렸으니까. 그는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고, 그녀가 먼저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 더 이어가는 것은, 그의 이 배려심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루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오늘 상담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걸로 충분해요.” 그녀의 말에, 선생님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상담이 드디어 끝났다는 후련함이나 귀찮음 같은 감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루나를 칭찬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 마지막 배려심에, 순간 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아니지. “네 저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인사를 끝으로 오늘의 상담이 끝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배웅하려는 듯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오른쪽에 놓인 자신의 가방으로 향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놀랐다가,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왜 그러시지…?’ 그러나 선생님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오늘 상담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왕진은 금요일이겠네요.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 말을 끝으로, 루나는 상담실을 나섰다. 카모플라쥬를 사용해 귀를 없애는 것과 동시에.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는 싫었으니까. 문이 닫히고, 복도에 홀로 남은 루나는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코너를 돌아, 아무도 없는 차가운 벽에 등을 가만히 기댔다. 그러고는, 자신의 두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뭐야….” 루나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분명, 분명, 아까 상담실 앞에서 마주쳤던 엘리스의 손에는 분명. 그가 주었다는 바닐라 맛 마카롱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루나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고작 마카롱을 먹고 싶은 게 아니다. 선생님이 주신 마카롱을 먹고 싶은 것이다. 그의 손에서 직접 건네받아, 입안에서 녹여가며, 그 맛을 음미해가며. “나는 왜… 안 주시지…?” 그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서운함이 가득한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너무 선생님을 귀찮게 한 건 아닐까. ‘마지막에, 내가 너무 억지를 부렸어….’ 그랬으면 안 되는데…. 루나는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으로, 유니온 길드의 라운지로 돌아갔다. 상담을 받기 전보다, 어째 더 기운이 빠진 듯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라운지의 문을 열었다. 아직 많은 이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의 가장 편안한 소파에는, 엘리스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엘리스의 옆에는 아까 그녀가 받아왔던. 이제는 텅 비어있는 바닐라 마카롱 봉지가 놓여 있었다. ‘…….’ 루나는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엘리스는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지 언니가 돌아온 것을 모르는 듯했다. 그러나. - 킁킁. 엘리스의 코가 움직였다. 게임을 하던 그녀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녀는 마치 맹수를 감지한 초식동물처럼, 천천히 고개를 뒤로 획 돌렸다. 그리고 거기에는, 루나가 서 있었다. 엘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녀도 당황했다. 지금 자신의 언니에게서 이전에 맡아본 적 없는, 정신 나갈 정도로 달콤하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향기가 나고 있었으니까. 엘리스는 충격적인 표정을 감추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상담… 잘 했어…?” “응.” 그러나 루나는 동생의 그 물음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엘리스가 앉아 있는 옆자리에 힘없이 푹, 주저앉을 뿐이었다. ‘착각인가…?’ 엘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스마트폰 게임에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건너편 귀족들의 휴식 공간에서 한 남자가 일어섰다. “제국의 시민이라면, 마땅히 정신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지.” 제국 백작가의 차남, 리안이었다. 평소 그의 곁을 지키던 다른 귀족들은 아무래도 단체로 임무를 나간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그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루나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루나는 알고 있었다. 저 자가 평소 자신을 가장 성적인 욕망이 섞인,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대라는 것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은 루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요하게 훑어 내리고 있었다. “수인.” 그는 경멸적인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 “정신을 논한다는··· 저잣거리 천민 광대가 지껄이는 말을 들어봤자,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리안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이 내가, 너의 그 불안정한 정신을 바로잡을 고결한 수양 방법을 알려줄 수도 있다.” 평소의 루나라면, 그저 무표정으로 그를 무시하며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옆에 있던 엘리스가, 대신 ‘꺼져, 병신아.’라고 쏘아붙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은. 루나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루나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에 대한 모욕과. 그녀에게 단 하나뿐인 선생님에 대한 모욕까지. 여러 상실감과 결핍감··· 그리고 분노까지. 그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그녀의 내면에서 위태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리안의 그 오만한 한마디는, 그 모든 혼돈의 감정 위로 기름을 부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는 행위였다. 엘리스가 평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루나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들렸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체념이나 슬픔은 없었다. 오히려 입꼬리를 끌어올려 나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루나는 마치 질문을 던지듯 나직하게 말했다. “제국에서 천민과 귀족을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법의 사용이죠. 그렇죠?” 루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다음 질문을 이었다. “그럼, 그 귀족의 양손을 전부 으깨서 두 번 다시 마법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리면….” 그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순수했다. “그 사람은, 그날부터 천민이 되는 걸까요?” 라운지에 모든 소음이 멎는 정적이 흘렀다. 커피 잔을 내려놓는 소리도 대화를 나누던 목소리도 전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곳에 있던 모든 헌터들이, 루나를 바라봤다. 리안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평소의 루나가 아닌. 목덜미를 물어뜯기 직전의, 포식자의 눈빛이 담겨 있었으니까. 루나는 그런 그의 공포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맑은 눈으로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일 뿐이었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엘리스는 그런 자신의 언니를 보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편. 유선우의 상담실. “어쩌다가 이랬지….” 유선우는 마카롱을 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루나에게 주려고 가방을 여는 순간, 확인해버렸다. 마카롱의 위에 나 있는 큼지막한 균열을. “이런 건… 못 주지.” 평소라면 모르겠으나…. 그녀가 트라우마를 깨고 내디딘 완벽한 첫걸음에 대한 선물로 주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의 상담사로서의 에고가 허락하지 않았다. 유선우는 아쉬운 마음으로, 마카롱의 봉지를 뜯었다. “다음에 더 좋은 걸로 만들어 주지 뭐.”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딸기 향이 진하게 나는, 마카롱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좋겠지?’ 딸기 좋아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