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 어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잤던 것 같다. 잔 건지 기절한 것인지조차 애매했다. ​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이미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알게 모르게 밤샘 작업으로 인한 피로가 잔뜩 쌓여 있던 모양이었다. ​ 게다가, 시스템 또한 최대치로 가동했었다. 수십 명의 내면을 동시에 읽고, 분석하고, 악마의 기운을 감지하고. 아무래도 능력을 계속 사용하고 누적하는 과정 동안 피로가 쌓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나는 자다 깨, 쉰 목소리로 녀석을 불렀다. ​ “친구야….” ​ 너무 피곤해서 혹시 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고. ​ 그리고 잠시 후 내 시야에 힘겹게 깜빡이는 시스템 창 하나가 떠올랐다. ​ [ (ᴗ_ ᴗ。) Zzz……. ] ​ 그러나 내 시스템 또한 자고 있었다. 자는 와중에 웃겨서 피식 웃고 넘겼었다. ​ 결국, 눈을 떴을 때는 금요일이 되어 있었다. 어차피 상담소고 비대면 상담이고 다음 주까지는 셧다운이다. ​ 이번 사태가 터짐과 동시에 그렇게 공지를 띄워놨었다. 막말로 이렇게 스피드런으로 해결 해야 하는 저주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해독에 열을 올리고 있었을 테니까. ​ 결론적으로 나는 휴가인데…. ​ 나는 잠에서 덜 깬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향했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기 위해. ​ 창문을 보니 해가 중천이다. 낮 1시였다. 아주 늘어지게 잤구나. ​ - 벌컥. ​ “아.” ​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잊고 있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고이 놓여 있는 케이크 박스. ​ 치즈케이크. 진세아에게 줘야 하는데, 너무 바빠서 주지를 못했다. ​ 물론 냉장고 온도도 낮고 당분이 높아서 안전하긴 하다. 오히려 숙성되어서 맛있을 수도 있긴 한데. ​ 슬슬 줘야 할 것 같았다. ​ 금요일이기에… 진세아는 바쁜 편이다. 무슨 일정이 있을지를 모르겠다. 퇴근 후에 주는 게 베스트기는 한데…. ​ “…….” ​ 나는 일단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 [진세아] [PINNED] [현재 상태: 개 X같은 일정을 수행하는 중. 해태 길드 때려치우기 0.5초 전 느낌. 아까부터 치근덕거리는 남자 헌터에게 조용히 ‘경고’할까 진지하게 생각 중.] [메인 스탠스: 아~~ 선우랑 ■■하고 싶…?] ​ 나는 현재 상태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어이구. 많이 힘든 모양인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진세아의 메인 스탠스를 확인했다. [삐빅!] [메인 스탠스: 일정으로 인해 상당히 피곤한 상태 ㅠㅠ 선우가 준다고 했던 케이크가 먹고 싶음.] ​ 오…. 타이밍이 좋았다. 마침 줄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 - 톡톡톡…. ​ 일단 메시지를 보내놓긴 했다. ​ [유선우]: 세아야, 오늘 퇴근하고 시간 돼? ​ 일정이 있다 보니 답이 오려면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 그러나. ​ [진세아]: 시간 돼. ​ 1초도 되지 않아서 칼같이 답장이 돌아왔다. 시간이 되니 다행이긴 한데… 어디서 봐야 할까. 내가 그 고민을 하기도 전에, 연달아 메시지가 도착했다. ​ [진세아]: 고생 많이 했다며? 소문 들었어. [진세아]: 내가 몸보신시켜줄게. ​ 이런 고마운 일이. ​ 진세아는 추후에 음식점 정보를 알려주겠다며, 저녁에 보자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 나야 땡큐지 뭐. 모든 약속이 순식간에 잡혔다. 나는 다시 한번 길게 기지개를 켜고, 남은 휴식을 만끽하기 위해 서재로 돌아왔다. ​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 “…….” ​ 그런데 이제 뭐 하지? ​ 최근 너무 열심히 살아와서 그런지, 막상 쉬려고 하니 방법이 없다. 친구가 많아서 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즐기는 취미라고는 제빵 정도다. ​ 사실 그것도 취미라기보다는… 일에 가까웠고. ​ 컴퓨터를 키긴 했지만 할 게 없었기에. ​ [헌터 갤러리] ​ 나는 슬금슬금 헌터 갤러리에 손을 올렸다. 진짜 할 게 너무 없다. ​ 들어가자마자 여러 글이 눈에 들어왔다. ​ 일반적인 글은 클릭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추천을 많이 받은 글, 일명 개념 글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 [해태 주식 진짜 답 좆도없어보이냐?] [최근 전이된 이방인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어떤 씨 발 새끼가 수인사진이라해놓고 퍼리쳐올렸냐] [릴리를 품에 안고 싶다] 어, 보다시피 그렇다. 따라서 나는 개념글 목록으로 들어갔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제목을 눌렀다. ​ ​ ----------------------------- ✪ 올해 계약 만료 예정인 S급~A급 헌터들 총요약 [315] 작성자: qns빨 | 조회: 135,767 | 추천: 2145 | 댓글: 315 ----------------------------- 일단 이번 년도 끝나고 풀리는 계약 자체가 엄청 많음 10대 길드 내에서도 대어들 엄청나게 풀리는 듯? ​ [대해] [쥴리아 메어리] (S급) ​ - 말할 게 있나… 대해의 핵심 헌터, 사슬 지옥 공략의 핵심이었고 대해 길드는 최시혁도 잃은 상태. 대해가 재계약에 목숨 걸긴 할 듯. 그래서 FA긴 한데, 미리 재계약할 것으로 유력함. 만약 나오면… 이건 뭐 ㅋㅋ 0순위지. ​ [유니온][릴리] (A급) ​ - 헌갤 점유율 25% 담당하고 있는 릴황, 아마 큰 이변 없으면 유니온에서 안 나오긴 할 듯. ​ [그리폰][이설하] (S급) ​ - 신궁이긴 한데… 요즘 폼이 좀 많이 안 좋지? 흉흉한 소문도 돌고 바이아웃 조항 때문에 사실상 나온 것으로 추정되긴 함. [해태] [백시은] (A급) - 이하 설명 X 범죄자. ​ ​ ----------------------------- ​ 메어리 이외에도 풀리는 헌터들은 많았다.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 ​ 나는 스크롤을 내려, 댓글 창을 확인했다. ​ ​ ----------------------------- ​ - ㅇㅇ: 근데 왜 여헌터밖에없음? └ qns빨: 그럼 나보고 남헌터를 정리하라는 소리임? └ ㅇㅇ: ㅈㅅ └ mercy: 남헌터들도 해주세요~ └ qns빨: 완장 이새끼 갱차좀 ​ - ㅇㅇ: 근데 메어리 뭐 나간다는 소문도 있던데 └ ㅇㅇ2: 대해 좆망하겠네 ㅋㅋㅋ └ qns빨: 다른곳가면 궁금하긴 함 ​ - Xmas: 백시은 헌터는 불쌍하네.. 나는 아직도 누명일 거라고 믿음. └ dasbade: 이새끼 아직도 이러고있네 병원좀 가보라고 └ Xmas: 주인님이 계속 약 주시는데 왜 가? ​ ------------------------------ ​ ​ 기시감의 근원은 여헌터들만 나열되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이해는 한다. 여기 갤러리 자체가 그런 느낌이다. ​ 몇 개의 글을 더 읽다, 다시 전체 글 목록으로 나왔다. 그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글이 하나 있었다. ​ [메어리, 만약 해태 길드 가면 어떨 것 같아요?]] ​ 나도 평소에 갖던 생각이었다. 뭘 좀 아는 사람이라 생각한 나는 글을 클릭했다. ​ ----------------------------- 메어리 해태 길드로 가면 어떨 것 같아요? [11] 작성자: juila123 | 조회: 57 | 추천: 0 | 댓글: 11 ----------------------------- 진지하게 어떨 것 같으세요? 대해랑 재계약 안 할 수도 있다던데? ----------------------------- - 구조대원함: 뭘 어때 96층에 개쳐물린 나 탈출시켜주는거지 ​ - ㅇㅇ: 진세아랑 메어리… 걍 레전드네… 쌍으로 꼴림 └ juila123: ??? 비교가 되나? 걍 메어리가 훨씬 낫지않나요? └ ㅇㅇ: 난 둘다 ㄱㅊ └ juila123: 시력이 좀 나쁘신가보다~ ​ 나는 그 첨예한 논쟁을 잠깐 지켜본 뒤 조심스럽게 댓글을 달았다. 그냥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 ㅇㅇ2: 둘이 시너지 잘 나는 듯 └ juila123: ㅋㅋㅋ 잘 모르는 것 같은데요?? ​ 작성자는 내 댓글을 비웃었지만, 번개와 신성력은 애초에 잘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다. 속성상 그렇다. 둘 다 자연의 무결한 힘, 곧 신의 힘이니까. 사람 사이의 궁합이야 잘 모르겠다만. ​ 나는 더 이상 논쟁에 시간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미련 없이 컴퓨터를 껐다. 마침 메시지도 도착해 있었다. [진세아]: (지도 사진) [진세아]: 여기로 와~ 사진을 보니 유명한 백숙집이었다. 원기 회복에 좋다고 유명한 곳이라더니. 공짜로 얻어먹는 거라 나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할 옷을 입었다. 나갈 준비를 마쳤다. ​ 그리고 상자를 꺼내 들었다. 케이크의 주인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 ​ ​ *** ​ ​ ​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그녀는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예약된 룸의 문을 열자 창밖을 보고 있던 진세아가 나를 발견하고 미소 지었다. ​ “뭔가… 느낌상 되게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야.” ​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 “그러게.” ​ 나 또한 맞장구를 쳤다. 실제로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깨어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가 오랜만에 보는 듯했다. 나는 들고 있던 하얀 상자를 그녀에게 건넸다. ​ “아이스팩 넣어두긴 해서 문제 없을 거야.” ​ “힝… 고마워….” ​ 그녀는 상자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잠시 상자를 내려놓고,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 “고생… 많았다면서?” ​ 이번 사건을 해결한 사람은 나와 메어리 둘이다. 언론에 보도도 그렇게 됐고. 따라서 그녀도 이미 소문을 접한 모양이었다. ​ “약간?” ​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 진세아는 그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역시, 속일 수가 없다. 허세가 통하지를 않는다. ​ 진세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 우물쭈물하며 질문을 던졌다. ​ “그래서… 혹시… 안에서 별일은 없었고?” ​ “응?” ​ “아니~ 그냥… 계속 며칠이나 붙어있었다며?” ​ 메어리를 이야기하는 건가? 그녀는 저주를 이겨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 “별일 없었어. 일만 했지. 메어리도 저주를 이겨내서 딱히….” ​ “정말? 하긴, 너희 둘 사이도 별로 안 좋아졌다고 네가 옛날에 그랬었으니까….” ​ 진세아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아, 맞다. 그거 말이야.” ​ 갑자기 재밌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하고 있었던 오해에 대해서. ​ “그냥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진 줄 알았거든? 근데 그게 아니었더라고. 서로 바빠서 연락을 미루다 보니까, 둘 다 똑같이 오해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서로 연락을 피해서 서로 서먹해졌던 거지. ” ​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어이가 없다. 그렇게 몇 년을 태운 걸 생각하니. ​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 하하. 그래…? 그랬구나….” ​ 진세아는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재밌다. 웃기네.” ​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덧붙였다. ​ “그럼, 사이가 나빠진 게 아니니까. 앞으로는 계속 연락하겠네?” ​ “뭐, 그렇지 않을까?” ​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 “응… 그렇구나. 근데 너 입장에서는 조금 번거로울 수도? 있겠다. 선우 바쁜데.” “뭐, 연락 정도는 괜찮아.” ​“아··· 괜찮구나. 응.” 진세아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갑자기 좀 덥네? 선우야, 문 좀 열게?” ​ “어? 응···.” 살짝 쌀쌀하던데. - 쾅! ​ 진세아는 창문을 거칠게 열었다.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