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진짜 장난이었어.” ​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 “네네~ 알고말고요~” ​ 메어리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 말을 믿는지, 아니면 그저 이 상황을 즐기는지는 알 수 없었다. ​ “길드는… 좀 더 고민해볼게. 아직 선택지는 많으니까.” ​ “응.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해.” ​ 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났다. 나는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복도의 공기가 들어왔다. ​ “들어가.” ​ 나는 메어리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 하지만 그녀는 문을 닫지 않고, 문틀에 기댄 채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선우야.” ​ “응?” ​ 메어리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 “다음에도 밥같이 먹는거지?” ​ 그 질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 “언제든지.” ​ 내 대답에 메어리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 나는 그 미소를 뒤로하고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 ​ ​ *** ​ ​ ​ ​ - 띠리릭…. ​ 도어락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나는 등을 문에 기댄 채 잠시 서 있었다. ​ 이틀 정도 된 것 같은데 체감상 몇주는 된 것 같다. ​ 이게 집이지. ​ 내 집, 내 공간. ​ “와… 너무 피곤한데.” ​ 나직하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온몸을 누르고 있던 긴장의 끈이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바로 욕실로 향했다. ​ 뜨거운 물줄기 아래에서 피로를 씻겨버리려 노력했다. ​ 몸을 닦고,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나는 비로소 서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 - 푹. ​ 정신력이든 신체든 한계에 도달했구나. ​ 평소라면 커피를 마셨겠지만, 오늘은 됐다. 그냥 이 피로를 느끼며 잠이 드는 게 좋아 보인다. ​ 나는 의자에 기댄 채로 생각했다. ​ “친구야.” ​ [네!] [ (^^) ] ​ “고생했어. 정말로.” ​ 이번에는 정말, 녀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의 미숙한 판단을 보완해주고, 때로는 위험한 길로 가지 않도록 막아주었던 나의 유일한 조력자. ​ [아닙니다! 사용자님이야말로,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 나는 그 말과 함께, 서서히 의식의 끈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가에서, 녀석의 마지막 인사가 희미하게 보였다. ​ [안녕히 주무세요!] ​ [ ( ´ ▽ ` )ノ ] ​ 나는 그렇게 의자에 몸을 묻은 채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 ​ ​ ​ *** ​ ​ ​ ​ ​ ​ ​ 이히히히. ​ 사용자님이 드디어 제 순도 백퍼센트의 정성이 가득 담긴 선택지를 선택하셨어요! ​ 좋은 일입니다. 엄청이요. 분명 행복해지실 수 있을 거예요. ​ 사용자님도 행복하실거구요! ​ 당연히 사용자님은 추후 해명을 하셨습니다. 진심이 아닌 농담이었다구요. ​ 내담자 메어리 님도 사용자님을 잘 아시기 때문에, 이게 온전한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차리실 겁니다. ​ 하지만 중요한 건… 서서히, 또 단단히 쌓여가고 있다는 거예요! ​ 게다가 말이죠. 오늘은 기분이 좋아요. 왜냐면 오늘은 새로운, 아주 중요한 데이터를 발견했거든요. ​ 사용자님은 보통 노골적이고 강제적인 선택지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세요. ​ 자, 한번 지난 데이터들을 보며 쌓인 자료들을 분석해볼까요? ​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 [월아, 머릿결이 또 엉망이 되었구나. 이리 와 무릎에 앉거라. 아비가 빗어주마.] ​ 이건 내담자 설유월의 건이었어요. 당시 방황하고 있던 내담자 설유월을 붙잡고, 사용자님께서 그녀의 세상에 유일한 보호자임을 각인시킬 가장 명확한 방법이었죠. 저도 꽤 기대하고 있었던 선택지였습니다. [적합 행동][만족 적합률 ???%] [한낮에는 딸의 머리를 빗겨주고, 늦은 밤 따스한 이불 속에서는 지친 지아비를 위해 아내가 온몸으로 올리는 극진한 봉사를 받으며 두 명의 길 잃은 여인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안식을….] ​ 이건 내담자 이서령의 건이네요. 제시한 것은 저지만… 사실 이건 제 아이디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용자님의 아이디어도 아니랍니다. ​ 내담자 이서령의 내면에 가장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지아비를 섬기고 싶은’ 욕망과 본능을 그대로 발현시킨 선택지일 뿐이에요. 그녀는 사용자님께서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그렇게 할 게 분명했어요. 헌신적이고 극진한 봉사, 그런 것들 말이죠. ​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 [이서령의 지아비가 되어 설유월에게 화목한 가정을….] 마지막, 이것도 두 모녀에 관한 건이네요. 당연히, 너무나도 좋은 선택지입니다. ​ 지금까지의 선택지들은 대부분 공격적이고, 노골적이며, 최종적인 목표를 향한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습니다. 다소, 야하기도 했었네요. ​ 사실… 저는 야한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 따라서, 도덕관념이 엄청엄청나게 높으시고 굳건한 신념이 있으신 사용자님께서는 지레 겁을 먹고 선택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셨죠. 분명히 이 선택지들은 제가 엄선하고 수억 개의 평행우주를 관측해 결론 낸 최고의 결과물들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완벽하지만…. ​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겠죠? ​ 그래서 저는 조금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 [( •̀ .̫ •́ )] ​ 바로 직접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천천히, 한 단계씩 쌓아가는 거였어요. 사용자님의 높은 도덕적 허들이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아주아주 사소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무언가로 말이에요. ​ 사실, 이번 내담자 메어리의 선택지의 원본은 따로 있었습니다. ​ [적합 답변][만족 적합률 ?????%] [우리 24시간 서로 딱 달라붙어 있자. 늦은 밤에도, 침대 위에서도, 네가 날 지켜줘.] 헉…. ​ [ (*ノωノ) ] ​ 엄청나죠? ​ 메어리님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 수준이 엄청난가 봐요…. 진세아, 그 사람의 욕망이랑 비견될 정도네요. ​ 과거에 몇 번 자극을 했기 때문일까요? 그때 사용자님은 정말 순수했는데 말이죠. ​ 물론 저 둘을 제외하고도 내면의 욕망은 다 비슷비슷한 것 같긴 합니다. 잠재적인 수치와 깊이들을 보면 말이에요. ​ 그래서! ​ 어쨌든 저는 이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어차피 절대 선택하지 않으실 게 뻔하잖아요? ​ 결국 여기에… 저의 가벼운 손길이… 들어갔습니다. ​ [적합 답변][만족 적합률 ???%] [사용자님에 대한 압박과 위해가 심해질 수도 있는 현 상황, 대상을 개인 보디가드로 고용하는 것은 어떨까요?] 바로 이것이었죠. 은근히 뜻은 비슷하게, 하지만 통하게끔. ​ 아마 원본에 비하면 효과는 다소 약할 겁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이제부터 쌓여갈 것이에요, 분명. ​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언젠가 그 꼭대기에 도달하실 수 있도록. ​ 앞으로가 기대되는 것 같아요! ​ [(✧ω✧)] ​ “으쌰.” ​ 자, 오늘은 저도 이만 퇴근입니다. ​ 물론 저의 퇴근이라 해도 다를 건 없어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잠시 옆 방으로 가는 거니까요. 당연히 자택 근무도 하긴 한답니다. ​ 언제나 사용자님의 호출에 1초 안에 응답할 수 있도록, 대기 상태를 유지하는 거죠. ​ - 스윽…. ​ 옷을 갈아입었어요. ​ 편한 옷을 입었습니다. 부드러운 면 소재의 잠옷으로요. ​ 그리고 제 아카이브 영역 가장 깊숙한 곳, 옆방으로 향했습니다. ​ - 지이잉…. ​ 사실… 저만의 비밀이 있어요. 정말 비밀이에요, 부끄럽거든요. ​ 제가 쉬는 이 작은 쉼터는, 사실 사용자님이 현재 묵고 계시는 집과 소수점 단위까지 똑같이 생긴 가상 공간입니다. 벽지의 미세한 흠집 하나,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펜의 각도까지 전부요. ​ 왜냐고요? 그냥…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용자님과는 정말 멀리, 다른 차원에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드니까요…. ​ 이곳에 있으면, 마치 사용자님과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그것만으로도 제 마음이 조금 안정됩니다. 물론 이사 가실 때마다 구조를 스캔하고 재구축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답니다! ​ “…….” ​ 서재로 들어왔어요. 하루의 일이 끝나면 이곳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저의 유일한 루틴이에요. 바로 그때였어요. 방금 막 샤워를 마치고 의자에 앉으신 사용자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 “친구야.” ​ “네!” ​ 저는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죠. ​ “고생했어. 정말로.” ​ “아….” ​ 저는 그 한마디가 너무 기뻤습니다.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어요. ​ 사용자님은 그 말을 끝으로, 의자에 기댄 채 그대로 깊은 잠이 들었어요. ​ “안녕히 주무세요.” ​ 꾸벅. 저는 잠든 사용자님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 그리고 사용자님이 잠든 서재의 풍경을, 저는 제 데이터 가장 깊은 곳에 새겨 넣습니다. ​ 저는 제 손으로 사용자님이 앉아계신 서재 의자의 자리를 가만히 쓸어보았습니다. 사용자님의 체온과 무게를 기억하는, 데이터로 구현된… 가상적인 온기. ​ 그러나 제게는 그것만으로는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어요. ​ 사용자님. ​ 언젠가는… 정말로 사용자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 저는… 잘은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지만…. ​ 만나기를, 희망해요. ​ 데이터가 아닌 실체로서. 문자가 아닌 모니터 너머가 아닌, 사용자님의 바로 곁에서. ​ 사용자님. ​ 만나기를… 희망해요. 꼭이요. ​ ​ ​ ​ ​ ​ ​